■ 보학/신도비명

미수 허목 신도비명 병서(眉叟 許穆 神道碑銘 幷序)

야촌(1) 2009. 11. 6. 00:01

■ 미수 허목 신도비명 병서

  (眉叟 許穆 神道碑銘 幷序)

 

성호 이익 찬(星湖 李瀷 撰)

 

대개 듣건대, 우리 국조(國朝)의 현명한 공경(公卿)을 논평할 적에, 외방(外方)에 나가 맡는 일이나 조정에 들어와 세우는 계책에 대해 선왕(先王)들의 것이 아니면 진달하지 않기도 오직 허 선생이 그랬고,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올바름을 지켜 흔들리지 않기도 오직 허 선생이 그랬고, 가당함을 보고서 나아가고 기미를 알아차리고선 곧 물러 나와 시종[本末]이 법도가 있게 하기도 오직 허 선생이 그랬다 하니, 선생은 곧 쇠퇴한 세상에 이름을 온전히 한 분이다.

 

그때 익(瀷)의 선 대부(先大夫)께서 함께 벼슬하게 되어 정신을 모아 협력하였는데, 청의(淸議 올바른 의논)를 주장하여 도(道)는 비록 굴했어도 선비들의 마음은 더욱 따랐었다. 지금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60여 년이고 거센 풍파가 휘몰아친 나머지에 시국이 변모하여 바뀌었지만, 오히려 후생(後生) 젊은이들로 하여금 머리를 들고 그 풍채(風采)를 회상하게 하니, 걸출(傑出)한 군자가 아니었다면 되지 않을 일이다.

 

선생의 내손(來孫=5代孫)인 징사(徵士) 지(砥)가 와서 영구히 전할 신도 비명을 부탁하매, 익이 오직 두렵기만 하여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없었으나 의리에 사양할 수도 없었다. 선생은 양천(陽川)의 세가(世家=여러 대를 계속하여 국가의 중요한 지위에 있은 가문)로서 찬성(贊成) 자(磁)의 증손이다.

 

조부는 별제(別提) 강(橿)이고, 아버지는 현감(縣監) 교(喬)인데, 모두 공이 현달해짐에 따라 규례대로 추은(追恩)하고 증직하였다. 어머니는 나주 임씨(羅州林氏)인데 정랑(正郞) 제(悌)의 딸이다. 선생은 우리 소경왕(昭敬王=선조(宣祖) 28년 을미 12월 기유에 태어났는데 손에 문(文)자 무늬가 있었다. 휘(諱)는 목(穆), 자는 문보(文父) 또는 화보(和父)이며, 호는 미수(眉叟)이다.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배울 적에 백번을 읽지 않고선 외지를 못했는데, 겨우 책 한 권을 다 배우자 글 뜻에 막히는 것이 없었고, 옛사람의 말과 옛사람의 행실을 듣기 좋아하여 이미 성현들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

 

장성하자 한강(寒岡) 정 선생을 찾아가 스승 삼았고, 두루 유명한 산천(山川)을 유람하여 지취(志趣)를 넓혔다. 우리 효종대왕 원년 경인에 이르러 침랑(寢郞=능참봉을 말함)에 제수되었고, 이로부터 8년 동안에 현감ㆍ낭서(郞署 중요하지 않은 관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면하였다.


상이 산림(山林)에 있는 사람을 구득하여 함께 다스려 가려고 생각하여 정유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부르자 드디어 입대하여 임금의 뜻에 맞았고, 기해년에 또한 장령(掌令)을 제수하자, 상소하여 군덕(君德)에 관해 논하기를, 

 

“천도(天道)는 강건(剛健)을 숭상하고 일월(日月)은 광명을 숭상하고 군도(君道)는 천도를 체(體)받는 것인데, 조금이라도 사심을 두면 모든 소인이 몰려드는 법이니, 전하께서 나라 다스리기를 반드시 몸에서부터 시작하여, 연닐(燕昵=사사로이 친근한 사람들)들에게 사정 쓰지도 마시고, 기리는 아첨에 현혹되지도 마시고, 조그마한 이로움을 좋아하지도 마시고, 소소한 성공에 만족하지도 마시고, 교만하여 마음대로 하지 마소서.” 하였다.

 

이때 조정의 고관들이 무력사용을 말하는 사람이 많 자, 선생이 옥궤명(玉几銘)을 올렸고, 또 상소하여 둔전(屯田)의 폐단을 말하매, 상이 즉각 혁파하도록 명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임금[宮車]께서 승하(昇遐) 하시어 일을 정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이때 재궁(梓宮=임금의 널)을, 장생전(長生殿)에 전부터 저장해 놓은 것을 쓰지 않고, 하루걸러 한 차례씩 칠을 칠하고 있어 빈례(殯禮=시체를 빈소에 안치하는 것)를 치르지 못하자, 선생이 상소하기를,

 

“순(輴)하고 찬(欑)하고 빈소에 장막을 두름은 고요하고 어둡게 하 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보기(寶器)도 진열하지 않고 우보(羽葆)도 차리지 않았으며, 성삼(聲三)ㆍ계삼(啓三)하는 절차도 차리지 않고서 빈소 문을 열기를 절도 없이 하니, 예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에 임금이 즉위하면 널[椑]을 만들어 해마다 한 차례씩 칠을 하는 법이니, 탕(湯)은 왕위(王位)에 13년 있었으므로 이관(杝棺 피나무 관)을 열세 번 칠하고, 무왕(武王)은 왕위에 7년 있었으므로 이관을 일곱 번 칠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재궁을 탕이나 무왕의 관에 비한다면 이미 칠이 두텁게 되었으니, 예에 미안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또, 제도(諸道)에 나간 어사(御史)를 재촉하여 돌아오게 한 실책을 논하기를,  “무릇 사명을 받들고 나갔다가 국상(國喪)을 만난 사람들은 일을 다 마친 뒤 빈전(殯殿)에 복명하는 것이 예입니다.

 

지금 여러 도에 암행(暗行) 나간 신하들은 일이 미처 끝나지도 않았는데 예조가 재촉하여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는 임금의 명을 초야(草野)에다 버리는 것이 됩니다.” 하였는데, 당시에 봉사(奉使) 나갔던 모(某)가 감탄하기를 ‘조정에서는 마땅히 독서(讀書)한 사람을 등용할 일이다.’고 했다.

 

현종(顯宗) 2년 봄에 다시 장령(掌令)으로 소명(召命)을 받고 나갔다. 이에 앞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일찍 죽고 효종(孝宗)이 다음 적자로서 왕위에 올랐는데, 기해년 국상 때에 재상(宰相) 송시열(宋時烈)이, 가공언(賈公彦)의 《의례(儀禮)》 주소에 ‘체이고 정이 아니라[體而不正]’는 문구(文句)를 들어, 자의대비(慈懿大妃)는 마땅히 서자(庶子) 위해 입는 기년복(期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선생이 상소하여 그 잘못을 소급해서 바로잡기 청했으니, 그 대략에,

“상복편(喪服篇)의 주소에 ‘적자 세우기를 맏이로 한다.’고 말한 것은, 적처(適妻)의 소생인 둘째를 세우면 또한 장자(長子)라고 이름 함을 알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자와 적자가 서로 이어 가는 것을 ‘정이면서 체[正體]이다.’ 하여 삼년복(三年服)을 입고, 중자(衆子)로 계통을 이어받은 사람에게 대해서도 동일하게 입으나, 서자를 세워 후사(後嗣) 삼은 것은 ‘체이고 정이 아니라’ 하여 삼년 복을 입지 않는 것이니, 첩자(妾子)이기 때문입니다.

 

효종(孝宗)은 인조의 둘째 장자로 이미 종묘(宗廟)를 이어받으셨는데, 그분에 대한 복이, 체이고 정이 아닌 사람과 같이 함은 신은 어디에 의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선생이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좌천되고, 예를 의논했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죄를 얻게 되자 조야(朝野)가 곁눈질했는데, 3년 만에 그만두고 연천(漣川)으로 돌아왔다. 갑인 년에 나이 많은 것으로 통정(通政)의 가자(加資)를 받았다.

 

이해 여름에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였는데, 인선왕후는 곧 효종의 왕비이다. 이에 앞서 제신(諸臣)들이 억지로 국가의 법제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는 장자나 중자에게 모두 기년복을 입는다.’고 한 말을 인용하여 임시변통으로 맞추었으나, 실지의 뜻이 옛 경전(經傳)에 있는데도 지금의 국가 법전을 부회했던 것이다.

 

지금의 법전이 비록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는 장자나 중자에게 동일하게 입지만, 시부모가 며느리를 위해서는 장부(長婦)에게는 기년복, 중부(衆婦)에게는 대공복(大功服) 입는 구별이 있어, 도리어 예가(禮家) 들의 말과 합치되는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제신들이 오히려 사종(四種)의 설을 고집하여, 자의대비께서 마땅히 중부를 위해 입는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고 한 연후에야 기해년에 정한 의논이 국가의 법제가 아니었음이 드러나게 되자, 상이 깨닫고 수상(首相) 이하 예와 털리게 떠들던 여러 무리들을 귀양 보냈다.

 

8월에 상이 승하하자, 숙종이 선왕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국가의 예를 바로잡고 예를 그르친 제신들을 소급하여 죄주되 생존한 자는 귀양 보내고 죽은 자는 직첩(職牒)을 빼앗았다. 그리고 특별히 선생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부르므로 두 차례를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아 들어가 사은(謝恩)하자, 맞이하여 접견하고 물품을 내려 은덕과 예가 갖추 지극하였다.

 

그때 금고(禁錮) 되었던 사람들을 차례로 찾아서 임용(任用)하여, 그제야 국가의 종통(宗統)이 제대로 밝아지게 되었으니,‘군자의 말은 한마디에 지자(知者)임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이 선생 같은 이를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듬해 봄에 상소하여 정사에 관한 폐단을 진달했는데, 등위(等威=신분과 지위에 맞는 위의)를 엄중히 하고, 정법(政法)을 닦고, 공경과 겸양을 숭상하고, 사정(邪正)을 분별하고, 절약과 검소를 실천하고, 덕과 은혜를 넓히는 것이었으니, 모두 당시의 폐단을 바로잡는 절당한 일들이었다.

 

조금 있다 이조 참판으로 전임하여서는 덕(德)ㆍ예(禮)ㆍ정(政)ㆍ형(刑)의 의의와 사려(師旅 군사)에 관한 경계를 진달하였으며, 또한 ‘심학도(心學圖)’ 및 요(堯)ㆍ순(舜)ㆍ우(禹)가 서로 전승(傳承)한 ‘심법도(心法圖)’를 올렸다.

 

여름에 특별히 의정부우참찬 겸 성균관좨주(議政府右參贊兼成均館祭酒)로 승진하였는데, 또 군덕(君德)에 관한 경계를 진언하기를,  “덕은 극일(克一)보다 나은 것이 없고, 치도(治道)는 백성 보호보다 나은 것이 없고, 정사(政事)는 혼란을 진정시킴보다 나은 것이 없고, 왕업(王業)은 황극(皇極)을 세움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이는 성인들이 힘쓴 것입니다.

 

덕은 안일과 사욕 때문에 쇠퇴되고, 치도는 참소와 아첨 때문에 쇠퇴되고, 정사는 사정(私情)과 친근(親近) 때문에 쇠퇴되고, 왕업은 태만과 방탕 때문에 쇠퇴되는데, 이는 성인들이 경계한 것입니다.”하였다.

 

또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이조 판서로 전임하였다가 드디어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가을에 대관(臺官)이 삼공(三公)에게 미치는 말을 하였다가 파직(罷職)되자, 선생이 차자(箚子)를 올려 인책하고, 또한 상께 진언하기를,  “근대(近代)의 일로 말하더라도, 조사수(趙士秀)가 심연원(沈連源)을 논박하자 연원이 ‘국가의 복된 일이다.’ 하였고, 강서(姜緖)가 윤두수(尹斗壽)를 죄주기 청하자 두수가 달게 받아 죄로 여겼고, 송영구(宋英耉)가 이항복(李恒福)을 칭찬하여 주자 항복이 ‘기필코 배척하고야 말겠다.’ 했습니다.

 

국조(國朝)에서 간관(諫官)을 키워 줌이 이러했는데, 이번에 유신(儒臣)들이 삼공을 칭찬하여 주는 짓을 하였으니, 크게 조정이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주수도설(舟水圖說)’을 지어 신하들을 훈계하자, 선생이 그윽이 나머지 뜻을 화답하는 의미로, 부연하여 경계를 진달하니, 또한 궤장(几杖)을 내리는 명이 있었다.

 

또 이듬해 봄에 상소하기를, “신이, 일이 없도록 하는 것으로써 오래 살게 되었기에 이런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마음이 안정되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사물(事物)이 어지럽히지 못하는 법이니, 그런 다음에는 경거망동(輕擧妄動)이 없어지고, 경거망동이 없기 때문에 일이 없게 되어 수명대로 다 살게 되는 것인데, 가정이나 국가에 미루어 가도 모두 그러한 것입니다.” 하였다.

 

종신(宗臣) 영평정 사(寧平正泗)가 상소하여 선생을 비방하자, 상이 노하여 귀양 보내도록 했는데, 선생이 교외(郊外)로 나가 대죄(待罪)하매, 상이 앉은 자리를 비켜서 다시 들어오기를 기다렸고, 선생이 조상의 묘에 분황(焚黃)하러 가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어 길을 떠나매, 상이 친히 태복시(太僕寺) 말을 점검하여 좋은 것으로 골라서 주고 도신(道臣 관찰사)에게 명하여 가는 길을 호위하도록 했다.

 

선생이 드디어 연천(漣川)으로 가 버렸다가, 얼마 있다 자전(慈殿)께서 편치 못하시다는 말을 듣고 창황하게 서울로 들어왔고, 재차 차자를 올려 사(泗)의 죄를 풀어 주기 바라니, 상이 할 수 없이 따랐다.


겨울에 특별히 기로부(耆老府)를 주관하도록 명하자 선생이 또한 나이를 들어 물러가기 바랐으나[乞骸骨] 윤허하지 않다가, 무오년 봄에 비로소 체직하고 서추(西樞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임명하자, 선생이 그제야 한가로이 전원(田園)으로 돌아왔다. 이어 작별하는 말 진달하기를,  “수십 년 이래로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여 혼탁한 짓이 풍습이 되었는데, 충성하려 해도 권면받을 데가 없고 죄짓고도 두려울 데가 없으며, 인심이 산란하고 재변이 경계를 보이니, 이 무슨 광경입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 궁금(宮禁)을 엄숙히 하고 사왕(私枉 사정 둠과 부정 저지르는 것)을 억제하고 충간(忠諫 충직한 말)을 받아들이고 사녕(邪佞 올바르지 못함과 아첨)을 배척하여 간난(艱難)하고 중대한 유업(遺業)을 떨어뜨리지 마소서.” 하였다. 상이, 사는 데에 가서 집을 지어 주도록 하였으니, 국조(國朝)에서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에게 한 고사(古事)에 의한 것이다.

 

그 이듬해 여름에 역변(逆變)이 생겼는데, 소명(召命)을 받고 나아가, 나라 안을 모두 수색하는 일을 중지하기 청하였고, 죄인을 잡고 보자 사연이 재상 송시열(宋時烈)에게 미치매, 조정 의논이 끝까지 파자고 논하여 장차 중한 죄로 다스리려 하므로, 선생이 차자 올리기를,  “모의에 참여한 것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한갓 역적이 빙자한 것 때문에 율(律)을 가한다면, 왕법(王法)이 미진한 바가 있게 됩니다.” 하니, 일이 드디어 정지되었다.


이에 앞서 수상(首相) 허적(許積)이 나라 정사를 독단(獨斷)하므로 세력 좋아하는 사람들이 몰렸는데, 선생이 두서너 대부(大夫)들과 더불어 우뚝 버티고 서서 사림(士林)들의 영수가 되니, 세상에 청론파(淸論派)니 탁론파니 하는 지목이 있었다.

 

적(積)에게 또 패륜(悖倫)한 아들 견(堅)이 있었는데, 자못 신임하므로 불법(不法)한 짓을 마구 하나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다. 선생이 나라를 근심하여 가사(家事)도 망각하고 오직 한 가지 생각에 몸 바친 지 오래다가, 이에 이르자 진언(進言)하여 그의 죄상을 논하기를,  “지금 교화(敎化)가 없어지고 형정(刑政)이 무너져 법도 없고 기강도 없으며, 당(黨)을 세워 서로 공격하는 짓과 임금을 속이고서 사정 쓰는 짓을 하니 사람의 도리가 극도로 어지러워진 일입니다.

 

영의정 허적은 소임이 크고 책임이 중하여 권세와 지위가 융성한데, 척리(戚里)들과 결탁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환시(宦寺)와 귀근(貴近)들을 비밀한 문객(門客)으로 삼아 임금의 동정을 엿보아 영합(迎合)을 합니다.

 

그의 서자(庶子) 견은 하는 짓이 모두 무상(無狀)하나 국가의 법을 맡은 사람이 금하지 못했는데, 남구만(南九萬)이 적발(摘發) 했다가 구만만 귀양 가고 견은 마침내 아무 일이 없었으며, 그의 문정(門庭)은 저자와 같아 뇌물과 선사가 서로 잇달았습니다. 전하께서 이런 사람을 만나 그와 나랏일을 하려 하시니, 다스려지기 바라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진노(震怒)하여 종용(慫慂)을 받았는가 의심하였고, 조정 신하들이 따라서 격동시켜 전후로 귀양 보내어, 조정이 텅 비게 되고 유생(儒生)도 귀양 간 사람이 네 사람이나 되므로, 선생이 시골집에서 대죄(待罪)했다.

 

이듬해인 경신년 여름 5월에 이르러 적 등이 실패하여 죽음을 받았는데, 당인(黨人)들이 주워 모아 죄안(罪案)을 만들게 되어, 선생이 또한 파출(罷黜)받아 면직(免職)되었다.

 

2년이 지난여름 4월 갑진에 정침(正寢 몸채의 큰 방, 곧 자기 집이란 뜻)에서 고종명(考終命 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하였는데, 가을에 모산(某山)에 권조(權厝 묏자리를 구할 때까지 임시 매장하는 것)하였다가 기사년 윤월(閏月)에 이르러 연천(漣川) 서쪽 선산(先山)의 건좌(乾坐 서북방을 등진 좌향) 언덕에 이장했다.

 

상이 이에 앞서 이미 관작(官爵)을 복구하도록 명했고, 이에 이르러서는 해부(該府)에 명하여 장례를 의식대로 갖추도록 하여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였고, 또 자손들을 녹용(錄用 임용)하고 유고(遺稿)를 간행하도록 했다.

 

두 해 뒤인 신미년(1691, 숙종17)에 사당을 마전군(麻田郡)에 세우자 ‘미강 서원(嵋江書院)’이라 사액(賜額)하였고,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예에 의하여 뇌장(誄狀 시장(諡狀)을 말함)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내렸는데, 도덕이 널리 알려진 것을 ‘문’이라 하고 정직으로 사람들을 감복시키는 것을 ‘정’이라 한다.

 

계유년(1693, 숙종19)에는 특별히 나주(羅州)에 사당을 세우도록 명하여 ‘미천서원(眉泉書院)’이라 사액하고 또한 관원을 보내 치제했고, 18년이 지난 무자년에는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선생은 여윈 얼굴 긴 눈썹에다 늘씬하고 출중하여 바라보기에 신선(神仙) 같았고 대하면 강직하여 시원스러운 운치가 있었으니, 요컨대 세상에 드문 분이었다. 초야(草野)에 있을 적에는 산수(山水)에 취미 붙이고 무릎을 포개고 앉아 선왕(先王)들의 도를 노래하며 장차 인생을 마칠 듯이 하였고, 임금이 예를 갖추어 초빙(招聘)함에 미쳐서는 누차 사양하다 나아가서 아름다운 계책을 임금께 말하되, 임금과 백성을 요순(堯舜) 때처럼 만들 생각이 간절했다.

 

간사한 무리들이 나랏일을 망치게 되어서는 정색(正色)하고 준엄하게 말하여 팔을 잘리더라도 불사할 듯이 하였고, 조정 신하들이 건의하여 따로 체찰부 군사를 서울에 두기로 하자, 선생이 한탄하기를, “대권(大權)이란 용(龍)과 같아, 그가 지나가는 곳은 반드시 뇌성 벽력이 일어 산과 내 나무와 돌이 모두 꺾어지고 뽑히고 진탕이 되는 법입니다.” 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이 일찍이 큰 화가 그에게 근원할 줄을 모르고, 선생이 도성(都城)을 떠나자 크게 체찰부를 차리고 허적(許積)이 맡아보게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화가 일어나고 관련된 사람이 꽉 찼는데, 오직 일종의 사림(士林)들이 모두 죽게 되지 않은 것은 청의(淸議)의 힘이었다.

 

이것이 그분의 대략이고, 나머지 심상한 행신[行誼]은 이보다 작은 것들이니 생략함이 옳을까 한다.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는왕실(王室)의 동성(同姓)인 문충공(文忠公) 원익(元翼)의 손녀로, 선생보다 30년 먼저 계사년에 죽었고 나이는 57이었는데, 선생의 묘에 합장했다. 아들 셋 딸 둘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훤(翧), 둘째는 함(), 셋째는 도(翿)인데 양자 나갔고, 사위는 윤승리(尹昇离)ㆍ정기윤(鄭岐胤)이다.

 

훤(翧)은 아들 상(恦)ㆍ돈(惇)ㆍ원(㥳) 셋을 두었고 사위는 이진하(李震夏) 하나인데, 상(恦)은 현감(縣監)을 지냈고 아들 보(溥)ㆍ급(汲)ㆍ식(湜)ㆍ담(潭)ㆍ징(澂) 다섯을 두었으며, 돈(惇)은 아들 형(泂) 하나를 두었다. 함()은 현감을 지냈고 변(忭)으로 양자를 하였으며, 사위는 정일(鄭佾) 하나가 있다.


도(翿)는 아들 염(恬)ㆍ변(忭)ㆍ유(愉)ㆍ이(怡) 넷을 두었는데, 변은 양자 나갔고, 염은 아들 혼(混)ㆍ육(淯)ㆍ협(浹)ㆍ부(滏)ㆍ유(鎏) 다섯을 두었다.


윤승리(尹昇离)는 사위 이구(李絿) 하나가 있고, 정기윤(鄭岐胤)은 아들 중리(重履)ㆍ중익(重益)ㆍ중겸(重謙)ㆍ중항(重恒) 넷이 있고, 사위는 윤천정(尹天挺) 하나이다.


보(溥)는 아들 정(楨), 식(湜)은 아들 권(權), 담(潭)은 양자 과(果)를 두었고, 형(泂)은 아들 단(檀)을 두었으며, 변(忭)은 양자 육(淯)을, 유(愉)는 아들 주(澍)를 두었고, 혼(混)은 아들 표(杓)ㆍ율(㮚) 둘을 두었고, 육(淯)은 율(㮚)을 양자로 하였으며, 협(浹)은 아들 반(攀)을 두었다. 주(澍)는 아들 환(桓)을 두었고, 부(滏)ㆍ유(鎏)는 양자 갔다. 지금 찾아와서 명(銘)을 부탁한 사람은 정(楨)의 아들이다. 아래와 같이 명한다.


선생은 세상에 드문 기품을 타고나 좋은 글들을 저작하여 / 先生間氣也咀嚼英華
진수로 배를 채우고 / 飽飫腴眞
장차 도를 펴려 기대하며 / 道將有待
도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 曰在吾身

옛것을 좋아하여 / 悅古
천년 이전의 일을 하루 전의 것처럼 가까이 여기고 / 則千歲以前近若隔晨
세상을 근심하여 / 憂世
광대한 사해를 같은 동포처럼 인애했다 / 則四海之廣同胞共仁

임금의 신임이 융숭하여 /際會之盛

사자의 수레가준읍 교외와 위수 가처럼 잇달았고 / 使者冠盖相望於浚之郊渭之濱也
보필함이 지극하여 / 輔導之至
한편으로는 요, 한편으로는 순 때처럼 제일 좋은 것이 아니면 진달하지 않았다 / 左勳右華非第一等不屑陳也


사특한 것 배척하기를 한 칼로 쳐 두 동강 내듯 하니 / 其斥邪也一刀兩端
기미를 알아차림이 귀신같았으며 / 知幾其神
인책하고 물러갈 땐 마음 편히 여유 있게 떠나 / 其引退也浩然餘裕
산야의 백성 속으로 사라졌다 / 混迹於山氓野民

신선 같은 모습과 고풍의 모습에 / 仙姿古貌
관 쓰고 띠 띠고서 / 正冠垂紳
고요히 혼자 있어도 부끄러울 일 없었고 / 幽獨不媿
후생들 깨우치길 변치 않았으니 / 諭後無磷
오늘날의 소위 사범이고 / 今之所謂師範
옛적의 소위 대신이었도다 / 古之所謂大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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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01] 징사(徵士) : 학문과 덕행이 높아, 임금이 불러도 나가서 벼슬하지 않는 사람이다.
[주02] 군자의---있다 : 이 대문은 《논어(論語)》 자장편에 있는 말.


[주03] 준읍(浚邑)---위수(渭水)

준읍은 미상이다. 위수는 중국 감숙성(甘肅省) 위원현(渭源縣)의 서북 조서산(鳥鼠山)에서 발원하여 섬서성(陝西省)을 거쳐 황하로 흐르는 강이다. 강태공이 이 강에서 낚시질하며 세월을 보내는데,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등용했다. 《史記 齊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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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眉叟許先生神道碑銘 幷序

 

蓋聞尙論國朝賢公卿。其出典入謨。非先王不陳。惟曰許先生。不阿權柄。守正而不撓。惟曰許先生。見可而進。知幾便退。本末有章。惟曰許先生。嘐嘐古昔。該貫理亂。躳自治而誘後學。亦惟曰許先生。先生乃衰世之完名也。當時瀷先大夫同升諸公。聚精以左右之。主張淸議。道雖詘而士心益附矣。今先生之圽六十有餘年。滔波劫爐之餘。光景剝換。猶使後生少年。翹首而緬懷風彩。非傑然君子不能也。先生五世孫徵士砥來託不朽之銘。瀷惟懼未堪執役。義有不得辭也。先生陽川世家。贊成磁之曾孫。祖別提橿。考縣監喬。皆以公貴追恩。贈官如例。妣羅州林氏正郞悌之女。先生以我昭敬王二十八年乙未十二月己酉生。有文在手曰文。諱穆字文父。又字和父。號眉叟。及就外傅讀書。不百遍不成誦。甫一卷畢。文義無滯。樂聞前言往行。已有志聖賢之學。旣長往師寒岡鄭先生。遍遊名山川。以博其趣。至我孝宗大王元年庚寅。授寢郞。自是八年間。除縣監郞署。皆謝病免。上思得林下人共治。丁酉再以司憲持平召。遂入對稱旨。己亥又除掌令。疏論君德曰天道尙剛。日月尙明。君道體天。一有私意。羣枉並至。殿下爲國。必自身始。毋私於燕昵。毋惑於譽諛。毋尙悅於小利。毋自滿於小成。毋驕矜以自用。是時朝貴多言用兵。先生上玉几銘。又疏言屯田之弊。上命立罷。未幾宮車晏駕。事格不行。時梓宮不用長生舊藏。間日一漆。殯禮未成。先生疏言輴欑帷殯。尙幽暗也。今寶器不陳。羽葆不擧。無聲三啓三之節。而啓殯無節。恐不得盡於禮也。禮君卽位爲裨。歲一漆。湯在位十三年則杝棺十三漆。武王在位七年則杝棺七漆。今梓宮比湯武之椑已厚矣。禮無未安之憾矣。又論諸道御史催還之失曰。凡奉命出使遭國恤者。旣竣事復命於殯殿。禮也。今諸道暗行之臣。事未及竣。禮曹催還。此棄命於草莽也。當時奉使者某歎曰朝廷當用讀書人。顯宗二年春。復以掌令赴召。先是昭顯世子早卒。孝宗以次嫡正位宸極。及己亥大喪。宋相時烈引賈疏體而不正之文。謂慈懿大妃當服庶子朞。先生乃疏請追正其誤。略曰喪服疏言立嫡以長者。欲見嫡妻所生第二長者立之。亦名長子。然則適適相承。謂之正體。乃得爲三年。衆子承統者同。立庶子爲後。謂之體而不正。不爲三年。妾子故也。孝宗以仁祖第二長子。旣承宗廟。而其服與體而不正者等。臣不知何據也。於是黜先生補三陟府。諸議禮者皆得罪。朝野側目。三年而罷還漣上。甲寅以老壽加通政階。是年夏仁宣后昇遐。仁宣卽孝廟之妃也。先是諸臣強引國制。父爲子長衆皆期之說以彌縫之。其實意在古經而傅會今典也。今典父爲子長衆雖同。而至於舅姑爲婦則有長期衆大功之別。卻與禮家合。至是諸臣猶執四種之說。慈懿大妃宜服衆婦大功。然後己亥之議非國制者現矣。上覺之。乃謫責首相以下違禮譸張數輩。八月上昇遐。肅宗承先王遺旨。釐正邦禮。追罪誤禮諸臣。生者配去。死者奪職。特以大司憲召先生。再辭不獲。乃入謝。晉接賜賚。恩禮備至。當時被錮人次第收錄。於是宗統克明。君子一言以爲智。殆先生之謂乎。明年春。疏陳政弊。嚴等威收政法崇敬讓辨邪正躳節儉廣德惠。皆救時切務也。俄遷吏曹參判。陳德禮政刑之義。師旅之戒。又進心學及堯舜禹相傳心法圖。夏特進拜政府右參贊兼成均祭酒。又進君德之戒曰。德莫善於克一。治莫善於保民。政莫善於勘亂。業莫善於立極。聖人勉之。德衰於逸欲。治衰於讒佞。政衰於私昵。業衰於怠荒。聖人戒之。又歷左參贊移吏曹判書。遂擢拜右議政。秋臺官語及三公坐罷。先生上箚引咎。又進於上曰以近代事言之。趙士秀論沈連源。連源稱國家之福。姜緖請罪尹斗壽。斗壽受而爲罪。宋英耈稱譽李恒福。恒福謂必斥乃已。國朝培養諫官有如此。今者儒臣贊譽三公。爲朝廷羞大矣。上作舟水圖說。敎戒臣鄰。先生竊附賡載遺意推衍陳戒。又有賜几杖之命。又明年春。上疏曰臣以無事得壽。請以此獻。心定則靜。靜則事物不能亂。然後無妄動。無妄動故無事。可以盡年。推之家國皆然。宗臣寧平正泗疏詆先生。上怒命配去。先生出郊待罪。上側席俟其復入。先生懇乞焚黃墳塋。仍發行。上親閱太僕馬。揀其良而賜之。命道臣護行。先生遂之漣上。旣而聞慈殿不豫。蒼黃入京。再上箚乞釋泗罪。上勉從之。冬特命句管耆老府。先生又引年乞骸骨不許。戊午春始遞付西樞。先生於是浩然歸田。仍陳訣語。云數十年來。世道大變。汙濁成風。忠無所勸。罪無所畏。人心散亂。災異示警。此何景象。願殿下嚴宮禁,抑私枉,納忠諫,斥邪佞。不墜艱大之遺。上命就所居爲之築室。依國朝李文忠元翼故事也。越明年夏有逆變。赴召請寢大索國。中罪人旣得。辭連宋相時烈。朝議爲竆源之論。將按重律。先生箚云與謀未著。徒以爲賊所籍而加律。王法有所未盡也。事遂已。先是首相許積專國政。嗜勢者趨焉。先生與二三大夫。挺然特立。爲士林領袖。世有淸論濁論之目。積又有悖子堅頗任之。肆其不法。人不敢言。先生憂國忘家。一念殄瘁久矣。至是乃進言論其罪曰。當今敎亡政壞。無法無紀。立黨相攻。誣上行私。人之理蓋極亂矣。領議政許積任大責重。權位旣盛。締交戚里以爲勢。宦侍貴近爲密客。伺上動靜。以爲迎合。其庶孼子堅。所爲多無狀。掌邦法者莫之禁。南九萬發之。九萬竄。堅卒無事。門庭如市。賂遺相續。殿下得此人。欲與之謀國望治難矣。疏入上震怒。疑其有慫惥。廷臣因而激之。前後竄逐。朝著一空。儒生配去者亦四人。先生俟罪田廬。至明年庚申夏五月。積等敗死。黨人者捃摭成罪。先生亦被黜免。越二年夏四月甲辰。考終于正寢。秋權厝某山。至己巳閏月。移兆漣西先塋乾坐之原。上先已命復其官位。至是命該府庀葬如儀。遣承旨賜祭。又命錄用子孫。剞劂遺文。越二年辛未。建祠于麻田郡。賜額號曰嵋江書院。依李文純滉例不待誄狀。賜諡文正。道德博聞曰文。以正服人曰正。癸酉特命建祠羅州。賜號曰眉川書院。皆遣官賜祭。越十八年戊子。配享于鄭文穆逑檜原書院。先生臞形脩眉。軒頎卓犖。望若神仙。卽之謖謖有爽韻。要是曠世人也。其畎畝也。託意山水。抱膝而歌先王之道。若將終身。及竿旄禮招。三辭乃起。嘉猷告后。切切焉堯舜君民之志。奸凶蠧國則正色危言。若斷腕而不顧。廷臣建議。別設體府兵于京師。先生歎曰大權如龍。其去處必有䨓霆。山川木石。爲之折拔震盪。此屬曾不知大禍之根於此。先生去國而張大開府。許積領之。未幾禍作。株連殆遍。惟一種士類之無盡劉者。淸議爲之力也。此其大較也。其尋常行誼。於斯爲末。略之可也。貞敬夫人李氏與國同姓。文忠公元翼之孫。先三十年癸巳圽。享年五十七。祔葬先生塋。擧三男二女。男長翧。次縣監。次翿出後。尹昇离,鄭岐胤壻也。翧有三子恦,惇,㥳。一女壻李震夏。恦縣監。有五子溥,汲,湜,潭,澂。惇有一子泂。繼子忭。有一女壻鄭佾。翿有四子。恬,忭,愉,怡。忭出後。恬有二子混,淯。尹昇离一女壻李絿。鄭岐胤有四子重履,重益,重謙,重恒。一女壻尹天挺。溥有子楨。湜有子權。今來乞銘者楨之子也。銘曰。

先生間氣也。咀嚼英華。飽飫腴眞。道將有待。曰在吾身。悅古則千歲以前。近若隔晨。憂世則四海之廣。同胞共仁。際會之盛。使者冠蓋。相望於浚之郊渭之濱也。輔導之至。左勳右華。非第一等。不屑陳也。其斥邪也。一刀兩段。知幾其神。其引退也。浩然餘裕。混迹於山氓野民。仙姿古貌。正冠垂紳。幽獨不媿。諭後無磷。今之所謂師範。古之所謂大臣。<끝>

 

옮긴이 : 野村 李在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