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기타 金石文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

야촌(1) 2009. 11. 15. 18:29

↑북한산 진흥 순수비의 옛모습/사진(문화재청 자료)

 

[그림 1]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순수비는 신라 24대 진흥왕이 영토를 개척하고 그곳에 순행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진흥왕순수비는 현재까지 4개가 알려졌다.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진흥왕순수비가 바로 그것이다.

창녕비는 561년(진흥왕 22)에 세운 비로 현재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에 있으며 국보 제33호이다. 1914년에 보통학교 교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한 일본인의 신고로 세상에 알려졌다.

비는 화강암으로 높이 약 300~115.1cm, 폭 175.5cm, 두께 30.3~51.5cm이다. 비면은 자연석 그대로이고 글자를 새긴 면만 약간 다듬었다.

글자는 16행이며, 행당 26자 내외의 글을 새겼다. 서체는 예서와 행서의 중간으로 고졸(古拙)한 느낌을 준다.비의 내용은 561년에 진흥왕과 여러 신료들이 창녕에 행차하고,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비의 앞부분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표현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拓境碑)로 이해하고 있다.

 

일부 학자는 창녕을 순수하고 세운 기념비로 이해하기도 하고 또 왕과 신료들의 회맹비(會盟碑)로 보기도 한다. 비문의 마멸로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판독 가능한 부분을 중심으로 비문의 내용을 구분하면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제1행 1자에서 8자까지로 제기(題記)에 해당된다. 두 번째 부분은 제1행 제11자에서 제11행 제1자까지로 기사(紀事)에 해당하는 곳이다. 세 번째 부분은 제11행 3자에서 제27행 마지막까지로 왕을 따라갔던 신료들의 인명을 적은 곳이다.

 

제기에서 신사년(辛巳年) 2월 1일에 비를 세웠음을 천명하였고, 기사 부분은 건립배경과 진흥왕의 통치와 관련이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그림 2]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

 

비문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내용이 바로 진흥왕을 따라왔던 신료들의 명단을 기술한 세 번째 부분인데, 여기에 대등(大等), 사방군주(四方軍主), 주행사대등(州行使大等), 비자벌정조인(比子伐亭助人), 촌주에 관한 정보가 소개되어 있다.

현재 이 자료에 근거하여 진흥왕대에 중앙의 관리들은 대등(大等)이고, 지방의 주(州)에는 군주, 행사대등 등이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나아가 중고기 지방행정체계가 주-군-촌으로 이루어졌으며, 지방관으로 군주와 당주, 도사가 파견되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 아울러 비자 벌 정조인은 중고기 6정군단의 성격, 그것과 주(州)와의 관계를 규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밖에도 관등과 6부명, 그리고 촌주의 인명은 중고기 정치제도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북한산비는 국보 제3호로서 순조 16년(1816)에 김정희가 친구 김경연(金敬淵)과 북한산 승가사에 놀라갔다가 우연히 발견하였다. 원래 경기도 고양시 은평면 구기리 비봉의 꼭대기에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높이 155.cm, 폭 71.5cm, 두께 16.6cm이다. 비문은 12행으로 각 행 21 혹은 22자로 구성되었고,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글자가 많다. 비문의 앞부분에 진흥태왕이 여러 신료들과 더불어 영토를 순수할 때에 기록한 비라고 언급하였을 뿐이고 건립연대에 관하여 분명한 언급은 없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비문 중에 ‘남천군주(南川軍主)’란 표현을 단서로 하여 568년(진흥왕 29) 10월 이후로 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진흥왕 29년 10월에 북한산주를 폐지하고, 남천주를 설차하였다고 전하니, 군주가 남천지역에 머무를 수 있는 시기는 이때 이후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진흥왕 14년(553) 신주를 설치하였을 때에 군주가 남천지역에 머물렀다고 보이므로 신주를 폐지하고 한산주를 설치한 진흥왕 18년(557) 이전에도 남천군주(南川軍主)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창녕비에서 군주의 경우 신주군주 또는 상ㆍ하주군주로 표현하지 않고 주치에 해당하는 지명을 따서 ~성군주 또는 ~군주라고 표현하였는데, 553년에서 557년까지 신주의 주치는 남천이었으므로 당시 신주에 파견된 군주는 남천군주(南川軍主)라고 불렀다고 보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영토로 차지한 후인 555년에 북한산을 순행하였다고 전한다. 일부 학자는 이러한 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북한산비를 진흥왕 16년(555)에 건립하였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림 3] 단양신라적성비

 

북한산비는 마멸이 매우 심하여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많다. 때문에 비문의 내용도 정확하게 알기 힘들다. 판독 가능한 글자에 의거하건대, 비문은 앞부분에 진흥왕이 북한산을 순행하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세운 사실을 기술한 다음, 중간 부분에 진흥왕이 사방으로 영토롤 개척하고, 여러 지역을 순수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한다는 내용이다,

한성을 순행할 때에 도인을 만나고, 북한산을 순행한 사실을 돌에 새겨 기념하고자 한다는 내용을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는 진흥왕을 따라왔던 신료들의 명단과 아울러 비의 건립 배경과 보존에 관한 내용을 간략하게 기술한 것으로 짐작된다. 글자의 마멸이 워낙 심하여 사료로서의 가치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황초령과 마운령비는 각각 함경남도 함흥군 하기천면 황초령과 이원군 동면 사동 만덕산 복흥사 배후의 운시산 꼭대기에 세웠던 진흥왕순수비이다.

 

그 존재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황초령비는 화강암으로 비석의 높이는 130.3~138.2cm, 폭은 약 50.3cm이며, 두께는 32~24.5cm이다. 비문은 13행으로 행당 약 33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부의 일부와 좌측부의 상부가 깨어져 나가고, 또 일부 글자의 판독이 어렵다.

 

비의 전문은 마운령비의 내용을 통하여 어느 정도 복원이 가능하다. 마운령비는 화강암으로 높이 146.5cm, 폭은 44.2cm, 두께 30cm이다. 글자는 10행, 행당 26자로 구성되었다. 마멸이 비교적 심하지 않아 대부분의 글자를 판독할 수 있다..

 

두 비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내용은 태창(太昌) 원년(568)에 진흥왕대왕이 순수하여 돌에 새겨 그것을 기념한 사실, 진흥왕의 영토확장과 선정(善政)을 칭송한 부분, 변경지역을 두루 순수하고 백성들에게 훈시한 사실, 진흥왕을 따라 왔던 신료의 관직과 이름을 기술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두 비문은 진흥왕이 영토를 함경도 함흥지역까지 넓혔음을 알려주는 증거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태창(泰昌)이라는 연호의 사용, 6부명, 관직과 관등, 인명은 중고기 신라의 정치사 및 제도사를 이해하는 데 기초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사문도인(沙門道人)’이나 『논어』, 『서경』 등에서 인용한 구절 등은 진흥왕대 불교와 유교사상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