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세기 사대부가의 서책구입 방법
『비록 우리나라가 좁고 작다고 하지만 두실 심상규(斗室 沈象奎)의 속당(續堂)은 거의 4만 권이 넘고 유하 조병구(遊荷 趙秉龜)와 석취 윤치정(石醉 尹致定) 두분의 집, 또한 3,4만권 밑으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그밖에 진천현(鎭川縣) 초평리(草坪里)의 화곡 이경억(華谷 李慶億)의 만권루(萬卷樓)와 풍석 서유구(楓石 徐有榘)의 두릉리(斗陵里) 8천권은 또 그 아래가 된다.」
심상규와 조병구, 윤치정 등은 3,4만권, 그리고 이경억은 만권, 서유구는 8천권의 소장가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강관은 이들 외에도 최석정, 원인손, 이만수, 김조순 등도 대형장서가로 보았다.
김영진은 강준흠(姜浚欽, 1768~1833)의 「독서차기(讀書箚記)」에 실린 자료를 통해, 이들 외에 안산(安山)의 류명천(柳命天), 류명현(柳命賢) 형제와 진천의 이하곤(李夏坤), 서울의 이정구(李廷龜) 후손가 등이 18세기의 4대 만권당임을 밝히면서 이서구(李書九), 이만수(李晩秀), 정홍순(鄭弘淳) 등도 꽤 알려진 장서가였다고 한다.
이 글을 쓴 홍한주(洪翰注, 1798~1866)가 19세기의 문인이므로 거론된 사람들이 대개 18~19세기의 경화세족(京華世族)이지만, 허균의 예에서 보듯 그 이전에도 일부 경화세족을 중심으로 장서에 힘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허균이 4천여 권의 책을 사온 것은 1614년의 일인데, 이에 앞서 유강(兪絳, 1510~1570)이 중국에 갔을 때, 한 배 가득 책을 구입 해 와서 향장(鄕庄)과 경제(京第), 해양산방(海洋山房) 등의 세 곳에 나누어 비치해 두었다고 한다.
그 후손인 유만주((兪晩柱, 1755~1788)가 쓴 「흠영(欽英)」에 따르면, 해양산방에 두었던 책의 소장서 목록에 기재된 것이 2,874권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유강이 한 배 가득 사온 책은 6,7천권은 되었을 것이다.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서화(書畵) 소장 가이자 장서가였던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의 예는 이와 약간 다른 경우이다. 그 증조부인 이시발(李時發, 1569~1626)이 임진왜란 때 원병으로 온 명나라의 참장 낙상지(參將 駱尙志)와 의형제를 맺었는데, 낙상지가 중국책 수천 권을 실어다가 이시발(李時發)에게 선물함으로써 이하곤(李夏坤)의 집안에 장서가 많아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앞서 정철의 손자로 봉화(奉化)의 태백산 아래 도심리(道深里)에 우거하던 정양(鄭瀁, 1600~1668)의 장서가 만권에 달했다고 하고 선조의 손자로 「임지설림(臨池說林)」과 「대동금석록(大東金石錄)」을 지은 이우(李俁, 1637~1693) 역시 장서가 만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유강이나 허균처럼 개인적으로 수천 권의 책을 구매해오고 낙상지 처럼 수천 권의 책을 이국땅의 의형제에게 선물할 정도로 연경(燕京)을 중심으로 서적의 매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서지학자들은 가륭연간(嘉隆年間)은 출판의 신시대라고 할 만큼, 그때까지 오랫동안 출판되었던 고전작가들의 책들이 속속 출판되었고 출판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내용도 통속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중국에서 출판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일시에 수천 권의 책을 구매하는 것이 용이해지면서 17세기 이후로 점차 장서 취미가 동아시아 전반으로 확대되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 한일문화교류의 양상[한국18세기학회엮음/태학사 87쪽]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선조들이 남긴 중요한 문화유산중의 하나인 서책을 중요하게 여겼다. 서책의 보관은 정부에서는 규장각에 집중적으로 배치하고, 선비들은 개인이나 문중에 장서각을 설치하여 보관하였다.
규장각은 정조가 당대 최고의 선비들을 모아다가 자신의 정책추진 및 학문연구기관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왕권 강화와 학문을 장려하여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기관으로 규장각을 선택한 것이다. 창덕궁의 후원 중 가장 아름다운 부용지 바로 옆의 언덕에 2층을 지어 1층은 규장각, 2층은 주합루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가 들을 중점 배치하여 자신의 개혁정책을 이끌어나간다. 그리고 왕들의 어제나 어필을 비롯한 많은 서책, 서화 등을 보관하였다. 수많은 장서와 최고의 인재를 모아서 새로운 정책, 개혁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선비들은 규장각에 소장된 서책 열람의 불편함 때문에 개인의 서고를 만들기 시작한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서책은 소량으로 발행하기 때문에 구입하기가 어려워 중국에서 직접 수입한 책을 구입하게 된다. 중국에 수시로 가는 연행사절단 일행에게 사전에 부탁하여 구입하게 된다.
중국 북경의 유리창거리에는 다양한 책을 보유하고 있는 서점이 많이 있어 신지식에 목마른 선비들은 서책을 구입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고 구입하게 된다. 조선시대의 명망 있는 문중들은 장서각을 만들어 후손들의 교육과 고급문화를 선도하기 위해 많은 서책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담헌 이하곤(1677~1724)은 진천 초평리의 자신의 집에 장서각을 따로 만들어 완위각지[宛委閣址(만권루萬卷樓)]라 칭하고 친한 벗들과 교유하는 장소로 삼았다고 한다. 담헌의 서책 사랑은 남달랐다고 한다. 만권당 소개기인 임하필기林下筆記와 그가 남긴 두 수의 시를 소개한다.
초평에 만권루가 있는데, 이는 담헌(澹軒) 이공 하곤(李公 夏坤)이 지은 것이다. 고금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는데, 의약(醫藥), 복서(卜筮), 명필(名筆), 고화(古畫)에 이르기까지 수백 질(帙)이나 되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으며, 익재 선생의 고사를 쓴 것이다. 백 년을 전하여 오다가 지금에 와서는 모두 산일(散逸)되고 남은 것이라곤 단지 숙종(肅宗) 이전의 명현들의 문집뿐이다.
<林下筆記 第26卷 萬卷樓>
♣독서유감(讀書有感)
가빈지유오거서(家貧只有五車書) /가난한 집에 가진 거라곤 책 다섯 수레뿐
차외도무일물여(此外都無一物餘) /그것을 제외하면 남길 물건이 전혀 없다.
생사불이황권리(生死不離黃卷裡) /살아서나 죽어서나 서책을 못 떠나니
전신응시식선어(前身應是食仙魚) /전생에는 틀림없는 책벌레였나 보다
♣검서(檢書)
오려하소유(吾廬何所有) /우리 집에는 무엇이 있나
삽가만권서(揷架萬卷書) /서가에는 만 권 서책이 꽂혀 있네
음수풍육경(飮水諷六經) /맹물마시며 경서를 읊조리노니
차미과하여(此味果何如) /이 맛을 정말 어디에 견줄까.
최근에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399 양촌 마을에 있는 담헌의 만권루를 복원한다는 좋은 소식이 있어 반갑다.
우리 선조들이 서책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 만든 장서각을 복원하여 후손들이 보고 느끼고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더 높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 시에 수십 명의 제자 중 황상에게 공부하는 방법으로 서책을 근면하게 읽고 있고 또 읽은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제시하였다. 황상은 다산의 가르침으로 시인으로 성장하여 “치원유고”라는 문집을 남겼다.
선비들의 하루 일과 중 중요한 일과가 책을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독서를 통하여 자신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정하는데 있다. 현대인도 책 읽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옛 선비들의 가르침이 바로 책에 있기 때문에 책을 통해서 과거와의 대화가 꼭 필요하기에 항상 책을 가까이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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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곤(李夏坤)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은 지금의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양촌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재대(載大)이며, 호는 담헌(澹軒)·소금산초(小金山樵)·무우자(無憂子)·금산병부(金山病夫)·담옹(澹翁)·담헌거사(澹軒居士)·담암(澹庵)으로 21세 때인 1697년(숙종 23)에 김수항(金壽恒)의 아들 김창협(金昌協)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1708년(숙종 34) 진사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생원과에도 합격하여 세마부수(洗馬副率)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계속 수학하면서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1722년(경종 2) 과거를 단념하고 고향인 진천군 초평면으로 내려와 학문과 서화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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