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성씨별관향 95

본관(本貫)

■ 본관(本貫) 원래 본(本)은 본관(本貫), 본적(本籍), 향관(鄕貫), 관적(貫籍), 관향(貫鄕) 등으로 부른다. 관(貫)은 돈(錢)을 말하는 것으로 돈을 한 줄에 꿰어 묶어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이, 친족(親族)이란 서로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뜻(貫錢見之貫)이며, 여기에 더 나아가 본적(本籍)이란 뜻(本籍鄕籍也)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성씨가 점차적으로 확대되면서 같은 성씨(姓氏)라 하더라도 계통이 달라, 그 근본을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어려웠으므로 동족여부(同族與否)를 가리기 위해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 본관이다. 시조(始祖)나 중시조(中始祖)의 출신지, 혹은 정착 세거지(定着世居地)를 근거로 호칭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봉군(封君 : 고려 때 종1품, 조선 때 2품 이상의 공로자에게 주는 작위)..

전주이씨유례

■ 全州 李씨의 유래 우리 나라의 이씨는 한국 자생(自生)의 이씨와 외국에서 귀화한 외래(外來)의 이씨로 나눌 수 있다. 우리 나라는 처음에 성이 없다가 통치자, 곧 귀족부터 성이 있게 되었는데, 문자가 없었으므로 자연 중국 한자(漢字)로 표기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이씨는 본관이 237본이나 된다. 이 중에서 역사가 제일 오랜 성은 경주이씨이고, 중국에서 귀화한 대표적인 이씨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이며, 월남에서 귀화한 화산이씨(花山李氏)도 있다. 그러면 현재 240만명 정도로 추정되는 우리 全州李씨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여기에는 현재까지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 두 가지 설 모두 그 근거가 모호하여 우리 全州李씨의 정확한 생성유래로서 여러 종현 종친들의 단언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中국서 400년 혈통 지켜온 「번시 朴씨」

■ 中국서 400년 혈통 지켜온「번시 朴씨」 ↑中서 400년간 한민족 뿌리 지켜온 '번시 朴씨' (선양=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중국 랴오닝성 번시현에 한민족의 후예임을 당당히 내세우며 400년간 뿌리를 이어온 '번시 박씨' 집성촌이 있다. 번시 박씨의 한 후손이 자신들의 족보와 가계 내력을 정리한 문헌을 들어보이고 있다. 2010 16代 족보 이어와.....박혁거세 영정 모시고 '한민족 후예' 자부 (선양=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우리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해 아는 것도 많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한(韓)민족의 후예이며, 시조(始祖)가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朴赫居世)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중국 랴오닝(遼寧)성 번시(本溪)현에서 집성촌인 '박보가(朴堡家)'촌을..

고려세족과 조선조 양반귀족 성씨

■ 청주경씨(淸州慶氏) 조선실권 양반 34가문 중 29번째(관직 많은 종중 순) 사학자들이 ‘존 던컨의 경험주의 연구방법’에 의하여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 사료(史料)를 기초로 고려후기(1260-1392)와 조선 초(1392~1400)에 각각 중앙관직을 지낸 인물과 그 중 실권 층에 해당하는 재추직(宰樞職 : 장관급 요직)을 역임한 사람을 찾아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족보, 묘비명, 기타 문서를 자료로 그들의 출신가문을 추적하여 고려세족(勢族)으로 알려진 22가문과 조선조 양반귀족 34가문 출신을 가려내 중앙관직과 재추직에서 각각 그 비율을 양적(量的) 분석에 따라 비교하였다. 그 연구 결과 조선 초(朝鮮初) 중앙관직을 차지한 양반귀족 34가문을 가려냈는데, 그 가운데 청주경..

조선시대의 신분 구성과 제도

■조선시대의 신분(양반, 중인, 상민, 천민)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사회로 신분에 따라 가지는 권리와의무가 달랐다. 또한 한번 정해진 신분의 이동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조선시대의 신분구성] 1.양반(兩班) (1) 원래는 문관벼슬인 동반(東班)과 무관벼슬인 서반(西班), 즉 관직에 있는 사람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었 으나 점차 벼슬을 할 수 있는 신분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2) 조선사회의 지배계층으로, 유교적 내용을 담은 경서와 역사기록인 사서를 읽고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로 일하였다. (3)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오르면 나라에서 토지를 지급받아 노비와 소작농에게 농사를 짓게 하여, 지주 계급을 형성하였다. 2. 중인(衆人) (1) 양반과 상민사이의 신분계급으로, 원칙적으로 중인은 직업을 자손에게 대물..

영양 천씨(潁陽千氏)

■ 영양 천 씨(潁陽千氏) 영양 천 씨(潁陽千氏)의 시조(始祖) 천 암(千巖)은 중국 서 촉(西蜀)의 천고 봉 만인 암(千古峰萬仁巖)에서 출생하였으므로 그 지명을 따서 성(姓)을 천(千)으로 하고 이름을 암(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영양 천 씨 매 헌공 가승 보(潁陽千氏梅軒公家乘譜)」의 기록에 의하면 시조 천 암(千巖)은 1368년(명나라 홍무 원년) 도총장(都總將)을 지내며 나라에 공훈을 세워 판도승상(版圖丞相)에 이르렀고, 후손들이 대대로 벼슬을 역임하며 영양(潁陽)에 살았으므로 본관(本貫)을 영양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중시조(中始祖) 천만리(千萬里)가 1555년(명나라 가정 34)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경과에서 12세의 어린나이로 급제하여 황제를 뵙고 후한 상을 받았으며, 1571년..

목은 선생(이색)의 출생지

■ 목은 이색의 출생지 이색(李穡, 1328년~1396년)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읍 괴시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字)는 영숙(潁叔), 호(號)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찬성사(贊成使) 이곡(李穀)의 아들이며, 이제현(李齊賢)의 제자로서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선생이 이 곳에서 태어난 까닭은 아버지 이곡(李穀)이 복주(지금의 안동)에서 사록참군사직(事錄參軍事職)이라는 벼슬을 할 때 이 곳 영해지방의 토호인 함창김씨(咸昌金氏) 진사(進士) 김택(金澤)의 따님과 혼인을 하면서 외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로 보면 여말 조선의 개국을 반대한 성주 출신의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 영천 출신의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와 ..

경주이씨 유례

■ 경주이씨 유례 ● 본관 연혁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사로(斯盧)· 사라(斯羅)로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65년(신라 제4대 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 시조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56대 경순왕[敬順王=김부(金傳)]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고 식읍을 주었고, 그를 사심관(事審官=고려시대 중앙의 고위 관료들에게 자기 출신 지방을 다스리도록 주었던 특수관직)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

의흥박씨(義興朴氏)

■ 의흥박씨(義興朴氏) ● 지명유례 의흥(義興)은 오늘날 경상북도 군위군(軍威郡) 의흥면으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는 밝혀지지 않고있다. 고려 초에 의흥군(義興郡)이 되어 1018년(현종 9)엔 안동부(安東府)에 속하였고, 1413년(태종 13)엔 현(縣)으로 바뀌었다. 그 후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의흥군(義興郡)으로 승격 되고, 이듬해인 1896년 경상북도에 소속 되었으나 조선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적인 대대적 행정구역 개편안 공포에 따라 의흥군이 폐지되고, 의흥면(義興面)으로 바뀌어 군위군에 편입 되었다. ● 성씨의 역사 의흥박씨세보(義興朴氏 世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박을규(朴乙規)의 성(性)은 본래 왕(王)씨로 고려 왕족(王族)이었다 한다. 고려말에 형(兄) 박갑규(朴甲規..

춘천 박씨 중시조 박항(春川 朴氏 中始祖 朴恒)

■ 춘천 박씨 중시조 박항(春川 朴氏 中始祖 朴恒) ◇박항(朴恒 1227∼1281(고종 14∼충렬왕 7)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춘천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로서 박, 신, 최, 허를 들고 있다. 그러나 춘천박씨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춘천신씨, 춘천최씨, 춘천 허씨를 만나보지 못했다. 풍수학을 하는 사람들은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에 위치한 춘천박씨 중시조 박항의 묘소가 명당이기 때문에 27개 파까지 나뉠 정도로 가문이 번성했다고 말한다. 춘천박씨 중시조의 묘소를 답사해 보면 가문의 계승과 흥망성쇠가 풍수와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음 리로 넘어가는 배후 령을 사이에 두고 마적 산을 좌청룡, 수리봉을 우백호로 삼아 유택을 마련했다. 묘소에서 바라보면 넉넉하게 펼쳐진 우두 벌 건너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