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성씨별관향

中국서 400년 혈통 지켜온 「번시 朴씨」

야촌(1) 2010. 9. 21. 01:06

■ 中국서 400년 혈통 지켜온「번시 朴씨」

 

↑中서 400년간 한민족 뿌리 지켜온 '번시 朴씨'

 

(선양=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중국 랴오닝성 번시현에 한민족의 후예임을 당당히 내세우며 400년간 뿌리를 이어온 '번시 박씨' 집성촌이 있다. 번시 박씨의 한 후손이 자신들의 족보와 가계 내력을 정리한 문헌을 들어보이고 있다.<<국제뉴스부 기사 참조>> 2010

 

16代 족보 이어와.....박혁거세 영정 모시고 '한민족 후예' 자부

 

(선양=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우리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해 아는 것도 많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한(韓)민족의 후예이며, 시조(始祖)가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朴赫居世)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중국 랴오닝(遼寧)성 번시(本溪)현에서 집성촌인 '박보가(朴堡家)'촌을 이루며 400년 가까이 자신들의 뿌리를 지켜온 '번시(本溪) 박씨(朴氏)'들의 얘기다. 번시 박씨들이 어떤 연유로 중국 땅에 넘어와 정착하게 됐는지는 아직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집안 대대로 구전되는 얘기와 중국의 역사 기록들을 토대로 자신들의 선조가 1619년 후금(後金)을 정벌하기 위해 명나라와 연합전선을 펼쳤던 조선시대 강홍립(姜弘立.1560-1627년) 장군을 따라 압록강을 넘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부차(富車.현재의 랴오닝 푸순(撫順) 일대)전투에서 패배, 후금의 포로가 됐던 강홍립의 부하였던 그들이 번시 일대에 정착하면서 뿌리를 내렸다는 것. 강홍립은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갔지만 번시 박씨의 시조는 중국에 남아 계보를 이어갔다는 얘기다.

 

청나라 강희제 때인 1659년 '박영강(朴英强) 등 번시의 박씨 5형제에게 토지를 나눠줬다'는 문구가 당시 번시의 역사지에 기록돼 있다는 것을 그 증거로 내세운다. 후금 때 포로가 됐던 조상들이 중국에 정착, 청나라 때는 경작지까지 분배받았다는 설명이다.

 

1786년 제작된 번시 융닝(永寧)사 종(鍾)에는 집성촌을 의미하는 '박가보자(朴家堡子)'촌이 종 주조 기부자로 각인돼 있어, 번시에 정착한 박씨들이 이 때 이미 집성촌을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중국 동북지방에 기반을 잡은 '조선족'의 이민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 토지 수탈에 나선 1910년께 본격화됐다.

 

 

↑中서 400년간 한민족 뿌리 지켜온 '번시 朴씨'

 

(선양=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중국 랴오닝성 번시현에 한민족의 후예임을 당당히 내세우며 400년간 뿌리를 지켜온 '번시 박씨' 집성촌이 있다. 번시 박씨 후손들이 족보와 가계 내력을 정리한 문헌을 보여주고 있다. 뒤로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 영정이 보인다.<<국제뉴스부 기사 참조>> 2010.9.20. pjk@yna.co.kr

 

이 보다 앞선 1860년대 조선에 대기근이 발생하자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간도 개척에 나선 조선인들이 있었다. 이렇게 보면 조선족의 중국 이민사는 길게 잡아도 150년이다.

 

따라서 번시 박씨의 조상이 중국 땅을 밟은 것은 조선족 이민사보다 240년 앞선다.

만주족의 근거지였던 랴오닝에 터를 잡았던 번시 박씨들은 청나라 때는 만주족으로 분류됐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이뤄진 1958년 인구 조사 때 한족(漢族)으로 편입되는 굴곡을 겪었다.

 

그러다 1982년 시행된 인구 조사 때 자신들이 한민족의 후예라며 촌민 전체가 집단 청원에 나선 끝에 조선족으로 바로잡을 수 있었다. 번시 박씨들이 한족에서 조선족으로, 그 뿌리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한민족에게만 있고 중국에는 없는, 박씨라는 성(姓) 때문이기도 했지만 박영강을 시조로 지금까지 16대를 이어오며 간직해온 자신들의 족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금도 이들은 '문(文)-명(明)-희(希)-승(勝)'으로 이어지는 항렬을 사용해 이름을 짓고 있으며 집집이 족보를 만들어 후대에 전하고 있다. 4년전부터는 대대적인 뿌리찾기운동에 나서 종친회 격인 '번시 박씨 협회(회장 박명겸)'를 조직, 번시 박씨의 족보를 체계화하는 등 본격적인 뿌리찾기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를 통해 7천여 명의 후손들을 찾아내 번시 박씨의 가계도를 완성했다.

 

이들은 번시 박씨의 후손이 최소한 2만여 명은 더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박씨의 후손이자 한민족의 후예라는 이들의 자부심은 온갖 부침 속에도 400년 동안 뿌리를 지켜온 노력만큼이나 대단하다. 종친회 사무실에는 시조인 박혁거세의 영정과 신라시대 유물 사진들을 걸어놓고 있다.

 

강홍립과 함께 중국 땅을 건너왔던 자신들의 시조(박영강의 부친)를 찾으려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청나라 문헌에서 박씨들에게 토지를 분배한 기록을 찾아냈던 박명범(朴明范) 전 번시현 역사지(誌) 판공실 주임은 "청나라와 공산당 문헌 등을 통해 우리 시조가 1619년 중국 땅에 온 것은 확인했지만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며 "한국 고고학계 등의 도움을 얻어 우리 선조의 뿌리를 꼭 찾아내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도 600여 명의 촌민 가운데 절반을 이루는 박보가촌의 박씨들은 한국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다.

박희충(朴希忠.62)씨는 "아들이 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워 한국의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다"며 "우리 세대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르지만 우리의 뿌리를 잇게 하려고 후손들에게는 한국말과 전통문화를 배우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성군 랴오닝성 조선족 문학가 협회장은 "1900년대 이주한 조선족조차 그 뿌리를 잃어가는 마당에 400년이나 족보를 이어오며 혈통을 간직한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출처 : http;//http://blog.yonhapnews.co.kr/haoha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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