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206

남연군의 묘(南延君 墓)

남연군 묘(南延君 墓)/충남 기념물 제80호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요. 조선의 26대왕 고종의 조부인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 1788~1836)의 묘이다. 이 묘는 대원군 이하응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라는 말을 듣고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곳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을 불태우고 탑을 부순 후 이장했으며, 이장한지 7년 후에 차남 명복이 태어났는데 그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그 후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으며, 이 일로 대원군이 서양에 대한 배척을 강화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묘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

남양 부부인 홍씨묘역(양절공 한확선생 배위)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에는 청주한씨 한확(韓確/1403~1456) 선생의 부인 묘가 있다. 한확선생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목단반개형(牧丹半開形) 명당에 있고, 부인은 멀리 떨어진 이곳에 있다. 이는 부부지간이라도 명당을 찾아 일인 일묘(一人一墓)로 쓰겠다는 당시 청주한씨 가풍에 연유한다. 홍씨부인은 조선 초기 양촌 권근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인 한확의 부인이며 세조와는 사돈지간으로 인수대비(성종 어머니)의 어머니다. 인수대비는 세조대왕의 장남 훗날 덕종으로 추존되는 의경세자의 배위이다 의경세자가 20살에 요절하자 아우 해양대군이 예종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예종도 19세로 요절하자 예종의 아들(인성대군, 제안대군)대신 자신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을 제9대 성종으로 등극하게 한다. 그리고 의경세..

허 난설헌 묘(許蘭雪軒墓)

■ 허난설헌 묘 경기 기념물 제90호 소재지 : 경기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書雲觀正公派) 광주선영지 묘역 및 허난설헌지묘 입구 표석이다 ↑이장하기 이전의 허 난설헌의 묘지 모습이다/(2002. 8. 29. 영환(문) 제공) 1985년 중부고속도로 건설로인하여 부득히 현위치에서 좌측으로 약 500m 지점인 안동김씨 선산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허난설헌 묘(許蘭雪軒 墓)의 측경(側景) ↑허난설헌 묘(許蘭雪軒 墓) ↑건너 중부고속도로가 보인다. 허난설헌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의 중부고속도로 옆 경수산 기슭에 있다. 처음 그녀의 묘는 지금의 위치에서 약 500m 우측에 있었으나 1985년 중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현 위치인 안동김씨 선산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그녀의 묘소 ..

오윤겸 선생 묘.

■ 추탄 오윤겸선생 묘(楸灘 吳允謙先生 墓) 오윤겸선생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오산리 산5번지 양촌 해주오씨(海州吳氏) 선영 서남향에 위치해 있다. 근래에 후손들이 묘역을 새로 단장하였다. 묘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경주이씨[慶州李氏/청호공 희(暿)의 현손인 26世 첨사공(僉使公) 응화(應華)의 장녀(長女)]와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봉분에 호석 (護石)을 둘렀다. 묘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져 있고, 상석 전방에는 동자석이 좌우에 갖추어져 있다. 동자석 전방에는 망주석, 문인석 등의 석물이 좌우에 비치되 있다. 묘비는 화강암으로서 풍우에 의하여 비문의 마모가 심하다. 비좌는 축면에 당초문이 조각되어 있고 상부 모서리에는 복련 (覆蓮)이 새겨져 있다. 비의 규모는 총높이 292cm, 비높이 226..

신숙주선생 묘(申叔舟 先生墓)

↑소재지>경기 의정부시 고산동 산53-7 ↑신숙주선생 영정 ●신숙주(申叔舟)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 덕린(德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포시(包翅)이고, 아버지는 공조참판 장(檣)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이다. 1438년(세종 20)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동시에 생원·진사가 되었다.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이 되고, 1441년에는 집현전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442년 국가에서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게 되자 서장관으로 뽑혔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참가하여 공적이 많았다. 중국음을 훈민정음인 한글로 표기하기 위하여 왕명으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유배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

김상용선생 묘(金尙容先生 墓)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선생 묘 경기도 기념물 제99호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좌측에 김상용(金尙容) 선생의 묘역이 있으나 잘 눈에 띄지 않아서 지나치기 쉽습니다. 좌측의 작은 언덕에 비각이 보입니다. 비각을 올라서 뒷편을 보면 10여기 정도의 묘가 있습니다. 묘역 우측 하단에는 신도비가 서 있으며, 신도비 머릿돌의 조각이 정교합니다. 김상용 선생의 묘는 묘역 중앙 상단에 있으며, 봉분에 호석은 최근에 보수하면서 두른것 같습니다. 묘역 앞에는 묘지와 상석이,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서 있습니다. 묘역에 별 다른 특징은 없습니다. ↑김상용선생 묘 ↑김상용선생 신도비 조선 선조·인조 때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순국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 선생의 묘소이다. 선조 23년(..

김상용과 김상헌 선생 형제 묘.

■ 문충공 김상용과 문정공 김상헌 석실서원(石室書院)은 문충공 김상용(1561∼1636)과 문정공 김상헌(1570∼1652)의 충절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1656(효종4) 지방유림의 뜻을 모아 창건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서원중의 하나이다. 형제 간인 두 사람은 모두 병자호란 때 충절을 지킨 인물들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ㅣ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라는 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상헌은 병자호란때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하다가 중국 심양까지 볼모로 잡혀갔는데 그곳에 서도 결코 절의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는 남양주시 수석동에 '석실서원지'라고 새긴 화강암 비석만 남아 있는 석실서원은 창건된 이후 양주를 비롯한 경기 일원 유림의 근거지이자 조선후기 ..

두사충(杜師忠) 선생 묘.

↑두사충선셍 묘 /소재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716 ↑두선생묘의 후경 ↑ 뒤쪽에 보이는 비가 두선생의 신도비이다. 두사충 묘 옆엔 낡은 신도비가 하나 서있다. 마지막 구절은 ‘삼도통제사 이인수찬'(三道統制使 李仁秀撰)이다. 이인수는 이순신의 7대손이 된다. 두사충은 이순신과도 친교가 깊었다. 이순신의 처음 묘터도 그가 잡았다 한다. 전쟁터에서 맺은 선조들의 인연, 그 아름다운 인연을 후손들이 이어간 셈이다. ↑모명재(慕明齋) ■ 두사충(杜師忠) 조선시대 명풍수로서 숱한 전설을 남긴이 가운데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21대손 두사충(杜師忠)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중국에서 온 섭정국(葉靖國), 시문용(施文用), 이문통(李文通) 등과 같은 풍수 가운데..

남극관 선생 묘.

●남극관선생 묘. ♣ 시대 : 조선 숙종37년(1711)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5호 ♣ 지정년월일 : 1990.11.22 ♣ 소재지 : 용인시 모현면 초부리 산1-5 ♣ 소유자 : 남표희(南杓熙) ♣ 규모 : 비높이 90㎝, 폭 67㎝, 두께 35㎝ 재료 : 토분 및 석물 -------------------------------------------------------------------------- 남학명(南鶴鳴)의 아들로 남구만의 손자이다. 座隅覺暑退 / 좌우각서퇴 자리 옆에 더위가 물러가더니 隙見陰移 / 첨극견음이 처마 틈의 그늘도 옮기어 간다. 竟日無語 / 경일묵무어 온 종일 묵묵히 아무 말 없이 陶情且小詩 / 도정차소시 정 빚어 한편의 시를 짓는다 더운 여름, 닫힌 방안이 푹푹 찐다. 한..

신수근(愼守勤, 1450~1506) 묘

■ 신수근 묘 신수근愼守勤)은 10대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으로서 본관 거창(居昌). 자는 근중(勤仲). 호는 소한당所閒堂). 시호는 신도(信度). 성종때 음보로 장령(掌令)이 되어 우부승지· 중추부첨지사 ·호조참의를 역임하고, 1495년 연산군비가 된 누이의 덕에 승지가 되었다. 같은 해 선위사(宣慰使)로서 평안도 지방을 순회하고 우승지 ·도승지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가 파직되었다. 1504년 다시 돈령부첨정(敦寧府僉正)에 기용, 이듬해 우의정으로 등극사(登極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1506년 좌의정에 올랐다. 이때 사위인 진성대군(晉城大君 : 中宗)을 옹립하고 함께 반정(反正)을 도모하자는 박원종(朴元宗)등의 제의를 거절했다가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3형제가 유자광(柳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