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점필재 김종직 묘갈명/신도비명。

야촌(1) 2010. 10. 9. 23:19

■ 점필재 김선생 묘갈명

    (佔畢齋 金先生墓碣銘)

    [생졸년] 金宗直, 1431년(세종 13) ~ 1492년(성종 23)

 

    권상하(權尙夏 : 1641~1721) 撰   

                                                 

아, 이 밀양부(密陽府)의 서쪽 대동(大洞) 경좌(庚坐)의 산에 바로 점필재 김 선생(佔畢齋金先生)의 묘소가 있다. 

선생의 학문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을 사숙한 것인데, 한 번 전수하여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이 되었고, 다시 전수하여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이 되었으며, 정암 뒤에는 진유(眞儒)들이 배출되어 도학이 크게 떨쳐져, 삼한(三韓)의 한 구역이 훌륭하게 문헌(文獻)의 큰 나라가 되었다.

 

그 공(功)을 살펴보면 이는 실로 선생에게서 연유하였으니,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여러 성조(聖朝)에서 선생을 존숭함과 사림들이 존모함이 당연하지 않은가.선생의 휘는 종직(宗直)이요, 자는 계온(季溫)이니, 천순(天順) 기묘년(1459, 세조 5)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경연에서 모시고 경전을 강하였는데, 문리가 명확하고 통창하였다. 성종께서는 가상히 여기고 칭찬하여 상경(上卿)으로 발탁하여 은혜가 매우 융숭하였으나, 선생은 피하여 거처하지 않고 물러가 고향에서 휴양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성상께서는 매우 애통해하시고 슬퍼하였으며 사후에 은전(恩典)을 구비하였다. 그후에 남쪽 지방의 선비들은 선생이 계시던 곳에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는바, 한두 곳이 아니었으나 조정에서는 모두 사액(賜額)을 내려 표장하였다. 

 

금상(今上) 기사년(1689, 숙종 15)에 우암(尤菴) 선생은 상신(相臣) 김공 수흥(金公壽興)에게 편지를 보내어 탑전에서 건의하게 하여, 특별히 선생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겸직을 준례와 같이 내리게 하였다.

 

선생에게 시호가 내려진 것은 맨 처음 성종 갑인년(1494, 성종 25)에 있었는데 문충(文忠)이라 하였으니, 도덕에 대한 문견이 넓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청렴하고 공정한 것을 충(忠)이라 한다.

 

이는 학사(學士) 이원(李黿)이 건의하여 올린 것이었다. 그 뒤에 문간(文簡)이라고 시호를 고쳤는데, 무슨 연고로 이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금상 무자년(1708, 숙종 34)에 예조에서는 선생의 후손인 생원 시락(是洛)의 상소에 따라 다시 문충이라고 시호할 것을 건의하자, 상은 윤허하였다.

 

숭정(崇禎) 을해년(1635, 인조 13)에 부사(府使) 이유달(李惟達)이 묘전에 있는 석물을 개설하였고, 지금 관찰사로 있는 홍공 우령(洪公禹寧)이 재력을 내어 다시 새롭게 만들었다.

 

또 옛 묘표가 너무 작고 망가진 것을 탄식하였으며 또 추증을 내린 사유를 자세히 기재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장차 큰 돌을 다시 세워 영원히 후세에 남기려는 계책을 세웠으니, 홍공은 어진 이를 높이고 도를 호위하려는 정성이 지극하다 이를 만하다.

 

시락의 아우 시연(是淵)은 홍공의 명에 따라 나에게 묘문을 청하였다. 나는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그 대략을 뽑아 위와 같이 기술하였다. 공의 전배(前配)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매계공(梅溪公) 조위(曺偉)의 누님이며, 후배(後配)는 남평 문씨(南平文氏)로 첨정(僉正) 문극정(文克正)의 따님이다.

 

한 아들 숭년(嵩年)을 두었는데, 재랑(齋郞)이 되었으나 벼슬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아 버리고 돌아왔다.

손자는 윤(綸)ㆍ유(維)ㆍ유(紐)인데, 유(紐)는 선대의 가업을 잘 계승하였으며, 호를 박재(璞齋)라 한다.

 

내외손으로 현재 생존해 있는 자가 모두 50여 명이나 된다.조정에서는 시락으로 하여금 선생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특별히 등용하여 벼슬이 봉사(奉事)에 이르니, 선생의 7대손이 되는바,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이 뛰어나다.

 

조 부인의 묘는 금산(金山)의 미곡(米谷)에 있으며, 문 부인의 묘는 합천(陜川)의 야로현(冶爐縣)에 있는데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선생의 세계와 사실은 홍공 귀달(洪公貴達)이 지은 큰 비에 상세히 보이며, 화를 입은 전말은 국사와 야사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

 

출전 : 한수재선생문집 제26권/묘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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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佔畢齋金先生墓碣

 

嗚呼。此密陽府西大洞庚坐之原。卽佔畢齋金先生之墓也。蓋先生之學。私淑於圃隱。而一傳而爲寒暄。再傳而爲靜菴。靜菴之後。眞儒輩出。道學大振。三韓一域。蔚然爲文獻大邦。夷考其功。實由於先生。有不可誣也。 列聖之崇報。士林之尊慕。不亦宜乎。先生諱宗直字季昷。擢 天順己卯第。嘗侍講 經筵。辭理明暢。被 成廟嘉奬。擢至上卿。 恩顧彌隆。而先生逡巡不居。退休桑梓。以終其世。訃聞 上痛悼忒甚。隱典備矣。其後南中章甫。於先生杖履之地。建祠俎豆。非止一二。而朝廷皆宣額表章。今 上己巳。尤菴先生貽書相臣金公壽興。建請于 榻前。特贈領議政。兼帶如例。其節惠之典。始在 成廟甲寅。道德博聞曰文。廉方公正曰忠。學士李黿所議上也。其後改諡文簡。未知何故而然也。今 上戊子。禮部因其後孫生員是洛之疏。請還諡文忠。 上允之。 崇禎乙亥。府使李侯惟達。改設墓前儀物。今按使洪公禹寧。出財力重新之。又歎舊表短刓。而且以 貤贈之由。不可不備載。將易樹穹石。爲垂永之圖。其尊賢衛道之誠。可謂至矣。是洛之弟是淵。以洪公命請文於尙夏。屢辭不獲。乃敢撮其略而書之如右。前配昌寧曹氏。梅溪公偉之姊。後配南平文氏。僉正克正之女。有一子嵩年。仕爲齋郞。不樂棄歸。孫綸,維,紐。紐克承先業。號璞齋。內外孫見存者幷五十餘人。朝廷以是洛奉先生祀。特爲錄用。官至奉事。於先生爲七代也。有孝友行。曹夫人墓在金山米谷。文夫人墓在陝川治縣。俱贈貞敬夫人。先生世系事實。詳於洪公貴達所撰大碑。被禍首末。俱載於國乘野史。故此不著。<끝>

 

출전 : 寒水齋先生文集卷之二十六 / 墓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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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道碑銘 幷序 - 洪貴達

 

德行文章政事。自孔門高弟。未有騈之者。况其外者乎。才優者行缺。性素者治拙。乃恒狀也。若吾文簡公。則不然。行爲人表。學爲人師。生而上眷遇。歿而衆哀慕。何公之一身。關輕重也乃爾。公諱宗直。字季昷。善山人也。號佔畢齋。公天分甚高。総角有能詩聲。日記數萬言。未弱冠。文名大振。中景泰癸酉榜進士。捷天順己卯科。選補承文正字。時魚公世謙有詩名。爲本院先進。見公詩。歎曰。使我執鞭爲奴隷。當甘受之。陞本院檢校。轉監察。適入對。忤旨罷。起爲嶺南兵馬評事。入拜校理。上卽位初。開經筵。特選文學之士。應選者凡十數人。公其尤也。未幾。出守咸陽郡。其治以興學育才。安民和衆爲務。政成爲第一。上曰。宗直治郡有聲。其優遷。遂拜承文院參校。是歲。適重試。咸勸曰。重試。文士驟進之階。竟不赴。物論高之。未幾。爲善山府使。母卒。廬墓三年。喪禮一遵朱文公。哀毀過禮。人服誠孝。服闋。築書堂于金山。池其傍。種之蓮。扁其堂曰景濂。盖慕無極翁也。日吟哦其中。無意世事。以弘文館應敎徵。辭以疾。不許。不得已而起。入侍經筵。辭約意暢。講讀最善。故眷注偏傾。超左副承旨。都承旨缺。特命授公。辭不敢當。敎曰。卿文章政事。足以堪之。勿辭。尋遷吏曹參判,同知經筵事。特賜金帶一腰。殊待類此。後觀察湖南。不動聲色。一路肅然。入拜漢城尹,工曹參判。超刑曹判書。兼弘文館提學。弘治己酉秋。以病辭。移授知中樞。欲謝病歸。一日。請浴東萊溫井。許之。因卧密陽田庄。上特許勿遆前職。或勸之受祿。不應。三辭。不允。至親製批答賜之。凡兩度。有端愨無僞。學問淵源等語。聞其貧。令本道賜米七十石。遣內醫賜藥。壬子八月十九日卒。享年六十二。訃聞。掇朝二日。太常議謚曰文簡。公考曰叔滋。成均司藝。贈戶曹判書。祖曰成均進士琯。曾祖。司宰令恩宥。皆贈封爵。公娶蔚珍縣令曺繼門女。生三男二女。長曰緄。娶海平人弘文修撰金孟性之女。早歿。次皆夭。女長適生員柳世湄。次適生員李翮。後娶南平人僉正文克貞女。生一男一女。男曰嵩年。女適直長申用啓。無後。公凡居家。鷄鳴盥櫛。正衣冠端坐。雖妻孥之間。不示懶容。少時。司藝病且瘦。公憂傷。作籲天賦。大夫人在堂。公未嘗安于朝。乞外三出奉養。伯氏病癰。醫云。蚯蚓汁良。公先嘗以進。果效。後伯氏客死京師。公奉柩返葬故里。撫其孤如己出。敎誨使之成立。其孝友天性至如此。凡守職莅民。居簡以御煩。主靜以制動。所在不露形跡。事理而民不忍欺。平時。待人接物。渾然和氣。非其義。不以一介取諸人。惟耽於經史。至老忘惓。所得浩博。四方學者。隨其器之大小。充然有得而歸。一徑品題。便成佳士。以文學鳴于世者太半。今戶曹參判曹公偉。公婦弟。議政府舍人康公伯珍,弘文修撰康公仲珍。公之甥。一何公之門之萃聞人耶。世以此益奇之。公所纂靑丘風雅,東文粹,輿地勝覽。行於世。公旣歿。所著詩文。尤見貴。門徒撰本集與彝尊錄。上命入內。朝夕命刊矣。以余平生與公最有義分。曹太虛請爲文刻石。不可以文拙辭。銘曰。

烏山崇崇。洛水溶溶。秀氣斯鍾。日月委明。奎 淪精。文人乃生。博洽丘墳。奇古詩文。陞立揚芬。登堂講疑。過門問奇。後學蓍龜。父焉孝乎。兄焉友于。家庭怡愉。臨民以慈。去後餘思。鄕有遺祠。論思經幄。面對日角。獨膺寵渥。崇班峻級。如階而躡。人望允協。天奪何速。民實無祿。九重含慼。公不可留。令名千秋。遺稿汗牛。公多名實。其令冺沒。我今載筆。

資憲大夫。知中樞府事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洪貴達。撰。

通訓大夫。昌原大都護府使,金海鎭管兵馬僉節制使吳汝撥。書。

通訓大夫。行司諫院司諫兼春秋館編修官,知製敎金世濂。篆。

 

後誌 - 張顯光

右銘具序。乃洪相公貴達撰也。先生事業文章。其大槩俱載其中。豈容後人文字凟贅之哉。本府人。慕其德業。鐫竪於故閭前矣。而不保於壬辰兵亂。亂定之後。鄕人咸思重建而不暇焉。今府伯李斯文惟達。依府儒之齊懇。取刻舊文。竪諸舊道。府人仍欲陳其首末。幷錄于銘下。故書此以遺之。嗟乎。先生歿後。不幸昏朝亂政。權奸煽禍。慘至禍及泉壤。尙忍言哉。雖然。先生之道。有何損哉。窃聞。當時名人俊士之輩出其門者。不止十數焉。寒暄,一蠧兩賢。皆其所奬發也。今者。府人慕尙不已。於經亂之後。適値賢府使之莅府。而獲遂其宿願。又擬移卜廟院于吉地。以爲師宗之所焉。盖亦斯文之亨運也。畢竟本府人才之產。亦不下於昔日及門之諸儒也必矣。

崇禎七年九月日。資憲大夫。工曹判書玉山後人張顯光。謹誌。

[주01] 璧  : 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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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 김종직 선생 묘/소재지 : 경남 밀양시 부북면 사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