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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선생 묘표/묘지문(尤菴先生墓表/墓誌文)

야촌(1) 2010. 10. 9. 23:32

■ 우암선생 묘표(尤菴先生墓表)

     [생졸년] 1607년(선조 40) ~ 1689년(숙종 15)/ 壽82歲

 

    권상하(權尙夏 : 1641~1721) 撰

 

공자(孔子)는 주(周) 나라 말기에 태어났는데 당시는 제후(諸侯)들이 방자하여 난신(亂臣)ㆍ적자(賊子)가 두려워할 줄을 몰랐으므로 《춘추(春秋)》를 써서 만세토록 신자(臣子)가 지켜야 할 바를 엄히 하였다. 

 

주자(朱子)는 송(宋) 나라 말기에 태어났는데 당시는 오랑캐들이 중국을 어지럽혀 두 황제(휘종(徽宗)과 흠종(欽宗))가 북으로 옮겨 감을 당했으므로 척화론(斥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여 불공대천(不共戴天)의 대의를 밝혔다.

 

그런데 선생의 생애는 또 대명(大明) 말기를 당하여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온 천지에 비린내가 가득한 상황을 눈으로 보고서 성모(聖謨)를 곁에서 도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 세우는 일을 자기가 해야 할 일로 여겼던 것이다.

 

대체로 하늘은 기수(氣數)의 영향을 받아 치(治)와 난(亂)이 한 번씩 뒤바뀌지 않을 수 없는데, 난세에는 반드시 성현(聖賢)을 내어 대강(大綱)ㆍ대법(大法)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여 왔었다.

 

아, 이는 하늘이 후세를 너무나도 염려하여 하신 일로서 그것이 어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선생의 휘(諱)는 시열(時烈)이요 자(字)는 영보(英甫)인데, 수옹공(睡翁公) 휘 갑조(甲祚)의 셋째 아들로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 연호) 정미년(1607, 선조40) 11월 12일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 수옹공의 꿈에 공자가 자기 집에 왔으므로 이를 이상히 여겨 어렸을 때 이름을 성뢰(聖賚)라고 하였다.

그리고 늘 격려하기를 “주자는 공자 후신이고 율곡(栗谷)은 주자 후신이다. 

 

주자를 배우려면 당연히 율곡부터 배워야 한다.” 하였다. 

유년 시절부터 이러한 교육을 받아 온 선생은 드디어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성현의 학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뒤 사계(沙溪)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율곡으로부터 전수된 학문을 모조리 다 배웠으며, 또 주자서(朱子書)를 전공하여 일가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의 공부를 보건대 치지(致知)ㆍ존양(存養)을 실천, 확충하는 일이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경(敬)으로 일관하였다.

 

그래서 지(知)와 행(行)이 일치하고 겉과 속이 따로 없었는데, 도(道)가 이루어지고 덕(德)이 높아지자 정밀하고 순일하며 휴결없이 원숙하고 티없이 밝았다. 선생은 또 일찍이 하늘과 땅이 만물을 생성하고 성인이 만사를 처리하는 방식은 직(直)일 뿐으로서 공자ㆍ맹자 이후로 서로 전수한 것은 오직 직(直)이라는 글자 하나뿐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일생 동안 실천해야 할 지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이나 말이 모두 청천백일처럼 정대하고 광명하여 사람이면 누구나 볼 수가 있었다. 

이상이 선생의 학문에 관한 대략적인 것이다.


인조(仁祖) 11년(1633)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여 경릉 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다가 뒤이어 대군(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는데, 대군은 바로 잠저(潛邸) 때의 효종(孝宗)으로서 서로의 제우(際遇)가 융숭했던 것은 사실 그때부터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병자호란 때는 왕을 호종하고 남한산성에 갔다가 화의(和議)가 이루어지자 통곡하고 성을 나와 곧바로 시골로 내려가 산골에 묻혀 일생을 마칠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두 번씩이나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효종이 즉위하여 대의(大義)를 온 세상에 펼 목적으로 장령(掌令)으로 제수하여 불렀고 또 그 고명(誥命)에 위호(僞號 청(淸)의 연호)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이 거기에 감격하여 들어와 사은하고 연이어 진선(進善), 집의(執義)에 올랐는데, 당시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ㆍ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ㆍ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등 여러 선생이 선생과 조정에 함께 있었으므로 사람들 모두가 지치(至治)가 실현되리라는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적신(賊臣)이 국가 기밀을 은밀히 누설하는 바람에 밖으로부터의 공갈이 날이 갈수록 심해진 결과 서로들 하나하나 물러가고 말았는데, 선생에게 승지ㆍ찬선(贊善)ㆍ이조 참의가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정유년(1657, 효종8)에 와서 상이 힘찬 용기를 발하여 밀찰(密札)로 선생을 부르자 이에 마침내 구치(驅馳)할 뜻을 굳히고 이듬해인 무술년에 예조 참판으로 입조하였다. 상은 선생을 총재(冢宰)로 특별 승진시키고 국정 전반에 관하여 논의하였는데, 그때야말로 왕과 선생의 사이가 마음과 경륜(經綸)이 빈틈없이 서로 맞았으므로 세상에서는 둘의 사이를 소열(昭烈 중국 삼국 시대의 유비(劉備))과 제갈공명(諸葛孔明)과 같다고 여겼다.

 

그러나 불행히도 하늘이 이 땅에 재해를 더 주려 했던지 효종이 승하함으로써 일이 모두 와해되면서 세상을 담당할 뜻도 다시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산릉(山陵)의 일이 끝나자마자 마침내 다시 처음의 길을 걷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30년 동안 양조(兩朝 현종조(顯宗朝)와 숙종조(肅宗朝))에 걸쳐 예우(禮遇)가 융숭하여 양전(兩銓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장(長)을 여러 번 지냈고 세 번이나 황각(黃閣 재상직)에 들어갔지만 선생의 뜻은 돌같이 굳어 있었다. 그리하여 전후로 국가에 일이 있을 때면 비록 애써 입조하였으나 오래 머물러 있은 적은 없었다.

 

현종(顯宗) 무신년(1668)이나 금상(今上 숙종(肅宗)) 계해년(1683) 같은 때는 임금도 선왕의 정치를 재현해 보려는 뜻을 가지고 있어 도를 행할 가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시속이 시기하고 소인배들이 훼방하여 수수방관하다가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니, 그 역시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신덕(神德 조선 태조의 계비 강(康)씨인 신덕왕후)의 복위(復位 현종(顯宗) 10년에 순원현경(順元顯敬)의 휘호가 가해졌음)와 태조의 휘호(徽號), 그리고 효종의 세실(世室) 문제가 모두 선생의 발론으로 실현을 보아 천상(天常)이 선생 덕택으로 어두워지지 않았으니, 이는 천고의 대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상은 선생의 출처(出處)에 관한 대략적인 것이다.


선생은 효종으로부터 세도(世道)를 밝힐 부탁을 받고는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고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정학(正學)을 바로 세우는 일을 자신의 책무로 삼았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도(道)가 나로 인하여 세상에 밝아지기만 한다면 비록 만번을 죽더라고 여한이 없겠다.” 하였다.

 

그러므로 윤휴(尹鑴)가 언젠가 주자를 무시하고 그의 장구(章句)를 고친 데 대하여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라고 극력 공격하였으며, 윤휴를 도와 좌지우지하는 자가 있을 때는 말하기를 “춘추(春秋)의 법에 따라 난신(亂臣)ㆍ적자(賊子)에 대해서는 먼저 그 패거리부터 다스려야 한다.” 하였다.

 

이 때문에 윤휴의 패거리들이 밤낮으로 눈을 부릅뜨고 보았는데, 갑인년(1674, 현종15)에 와서 예론(禮論)을 핑계 삼아 화를 꾸민 결과 드디어 북으로 남으로 귀양 가게 되었고 마침내는 섬 속에 갇히기까지 하는 등 화색(火色)이 갈수록 급박해졌으나 선생은 끄떡없이 구사미회(九死靡悔)의 뜻을 견지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6)에 귀양에서 풀려 나갔을 때는 세상이 또 크게 변하였다. 문인인 윤증(尹拯)이 자기 아버지가 윤휴와 제휴하다가 선생에게 배척을 당했다 하여 평소 감정을 품고는 제멋대로 틈을 만들다가 마침내 윤휴의 무리가 다시 일어나게 되자 해기(駭機)를 서로 부추겨 드디어 기사년(1689, 숙종15)의 참화가 있게 하였다. 아, 그 일을 어떻게 차마 말하겠는가.

 

선생이 목숨을 거두기는 정읍현(井邑縣)에서였는데 때는 6월 8일이었다. 선생은 죽음을 당하여 치상(治喪) 절차 및 입도(入道)의 방법에 대해서까지 문인을 불러 부탁하며 조용하고 여유롭기가 평일과 다름없었다. 그날 밤 동방에 큰 별이 떨어지고 백기(白氣)가 무지개처럼 가로질러 있었으므로 고을에 사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갑술년(1694, 숙종20)에 상이 특명으로 설원(雪寃)하여 복작(復爵)케 하고 사제(賜祭)ㆍ사시(賜諡)하는 한편 장지를 옮길 때는 또 예장(禮葬)을 명하는 등 마지막을 장식해 주는 예도에 빈틈이 없었다. 천도(天道)가 다시 돌아오면 공의(公義)도 반드시 펴질 것이므로 또한 유감될 것은 없다고 하겠으나, 당습(黨習)이 이미 고질화되고 괴이한 일들이 층층으로 생겨 사문(斯文)의 액(厄)이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이상이 선생이 화를 당한 대략적인 내용이다.


언젠가 선생이 말하기를 “주자가 나온 이후로 의리(義理)가 조금도 가리어짐 없이 크게 갖추어졌으므로 후학으로서는 다만 주자만을 존경하고 믿어 그의 학문을 밝히기에 진력해야 한다.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는 길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꼭 무엇을 서술하여 후세에 남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망녕 된 일로서 군더더기일 뿐이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이 한 공부는 모두가 정자와 주자의 뜻을 드러내 밝힌 일들이었는데, 비록 위태롭고 곤혹스러운 유배 생활 속에서도 밤낮으로 깊은 상념에 잠겨 확실히 깨닫기 전에는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말 한마디 글귀 하나라도 약여하지 않음이 없어 비록 초학자라도 그 귀취(歸趣)를 훤히 알 수 있게 하였다. 

 

예컨대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와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는 장기(長鬐)에 있을 때 저술한 것이고, 《어류소분(語類小分)》은 거제(巨濟) 시절에 편찬한 것이며, 《문의통고(問義通攷)》는 제주(濟州) 시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심경석의(心經釋疑)》는 퇴계(退溪)의 강록(講錄)을 왕명에 의하여 손질한 것이고, 이 밖에 문집 1백여 권이 있어 앞으로 세상에 행해질 것이다.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고려(高麗)의 판원사(判院事) 대원(大原)을 그 시조로 삼는다. 아조(我朝)에 와서는 쌍청당(雙淸堂) 유(愉)가 태종(太宗) 때 회덕(懷德)에 물러가 살았다. 선생의 증조는 휘가 귀수(龜壽)인데 봉사(奉事)로서 판서에 추증되었고 호는 서부(西阜)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상중에 있을 때 흰 제비와 관련된 이적이 있었다.

 

조부의 휘는 응기(應期)인데 벼슬은 도사(都事)로서 찬성에 추증되었다. 수옹공은 봉사로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큰 절의가 있어 효종으로부터 포전(褒典)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비(先妣) 곽씨(郭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는데 그 아버지는 충신인 자방(自防)이다. 

 

선생의 배위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로서 도사 덕사(德泗)의 딸인데, 수원 무봉산(舞鳳山)의 미향(未向)으로 된 선생의 묘소에 합부(合祔)되어 있다. 선생의 뒤를 이은 아들 기태(基泰)는 도정(都正)을 지냈고, 두 딸은 각각 현감 권유(權惟)와 선비 윤박(尹搏)에게 시집갔으며, 서출의 딸은 민주경(閔周鏡)의 처가 되었다.

 

손자 은석(殷錫)은 현감, 주석(疇錫)은 교리(校理), 무석(茂錫)은 군수, 순석(淳錫)은 현감이고, 회석(晦錫)은 일찍 죽었으며, 손녀는 현감 최성서(崔星瑞)에게 시집갔다. 외손인 이정(以鋌)ㆍ이개(以鍇)ㆍ부사(府使)인 이진(以鎭)은 권유의 소생이고, 은교(殷敎)ㆍ주교(周敎)는 윤박의 소생이다.

 

증손 현손도 많으나 다 쓰지 않았는데, 적증손(嫡曾孫)인 일원(一源)은 학행(學行)이 있어 왕자 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선생은 손자 주석이 가학(家學)을 잘 이었다 하여 항상 애지중지하면서 후사(後事)를 모두 그에게 맡겼다. 

 

또 묘 앞에 큰 비를 세우지 말고 다만 상하(尙夏)로 하여금 짧은 표석에다 몇 줄만 적어 후인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하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거창하게 하는 것이 싫어서였다. 아, 선생의 사적을 다 쓰자면 비록 1백 척(尺)이 되는 비(碑)라도 모두 기록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그리고 선생이 조정에서 행한 대사업은 역사책에 소상히 나타나 있고 집에 있을 때의 행실은 세상의 표준과 법도가 되어 사람들 모두가 외워 영원히 전해질 것이므로 여기서는 큰 줄거리만을 추려 이상과 같이 엮어 보았다.

 

아, 율곡 선생이 먼저 나시고 선생이 그 뒤를 이어 우리 해외(海外)에 도학(道學)의 전통을 심어 놓았는데, 어쩌면 하늘의 정기(正氣)가 동쪽으로 옮겨와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주자의 도학이 율곡에 와서 다시 밝아졌고 율곡의 업적은 선생에 와서 더욱 범위가 넓어졌으니, 율곡이 가령 천개일명(天開日明)이라면 선생은 지부해함(地負海涵)이었다.

 

세상에 덕(德)을 아는 이가 있다면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틀림없이 믿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대의는 춘추의 그것이요 / 義秉春秋
도학은 주자를 계승하였다 / 學傳武夷
뭇 유자를 집대성하여 / 集群儒成
백세의 스승이 되었다 / 爲百世師

 

출전 : 한수재문집 권지 三十一 / 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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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有明朝鮮國左議政 尤庵宋先生之墓表

 

孔子生於周末。時諸侯放恣。亂臣賊子無所懼。作春秋以嚴萬世臣子之防。朱子生於宋末。時戎狄亂華。二帝北狩。力主斥和之論。以明不共戴天之義。先生之生。又當 大明之季。目見天地飜覆。四海腥塵。協贊 聖謨。以傾否濟屯爲己任。蓋天迫於氣數。不得不一治一亂。而其亂也必生聖賢。使大綱大法不墜於地。嗚呼。天之憂患後世。可謂至深切矣。夫豈偶然而然哉。先生諱時烈字英甫。睡翁公諱甲祚之第三子也。以 萬曆丁未十一月十二日降。降時睡翁公夢。孔子至其家。異之以聖賚爲小字。嘗責勉曰朱子後孔子也。栗谷後朱子也。學朱子者。當自栗谷始。先生自兒時已受此敎。遂自任以聖賢之學。及師沙溪先生。盡得其所傳於栗谷者。又專讀朱子書。以成家計。其用工也致知存養實踐擴充。而敬則通貫始終。故知行幷進。表裏如一。至其道成德尊。則精密純熟。渾然粹然。又嘗以爲天地之所以生萬物。聖人之所以應萬事。直而已。孔孟以來相傳者唯是一直字。以此爲終身服行之符。是以其動靜言爲。正大光明。如靑天白日。人得以見之。此其爲學之大略也。 仁祖癸酉魁司馬。拜 敬陵參奉。尋爲大君師傅。則乃 孝廟初潛也。際遇之隆。實昉於此。丙子扈 駕南漢。媾成痛哭出城。卽歸鄕里。自分畢命於丘壑。再爲持平而不起。及 孝廟卽位。將伸大義於天下。以掌令召。又於 誥命不書僞號。先生感激入謝。連拜進善,執義。時淸陰,愼獨,同春諸先生與先生俱在朝。人皆想望至治。不意賊臣陰泄 國情。外喝日急。乃相率而退。除承旨,贊善,吏曹參議皆不就。丁酉 上赫然奮發。以密札招徠。於是遂有許以驅馳之意。戊戌以禮曹參判入朝。 上特陞冢宰。擧國而聽之。當是時契合昭融。經綸密勿。世方以昭烈孔明擬之。不幸天不悔禍。 仙馭上賓。事皆瓦解。更無當世之意。 山陵甫訖。遂返初服。自是三十年間。 兩朝之禮遇冞重。屢長兩銓。三入黃閣。而先生之志介如石也。前後 國家有事則雖黽勉入朝。未嘗久淹。至若 顯廟之戊申。今 上之癸亥。 上意欲修先王之舊政。不無行可之望。而流俗忌嫉。小人沮敗。不免袖手而歸。豈非天也。然 神德之復位。 太祖之徽號。 孝宗之世室。皆自先生發之。天常賴以不晦。可謂千古之大業。此其出處之大略也。先生受 孝廟世道之託。以明天理正人心。闢異端扶正學爲己責。嘗曰使此道由我而明於世。雖滅死萬萬無恨也。是以嘗於尹鑴之侮朱子改章句也。極力攻斥曰此斯文之亂賊也。如有助鑴而左右者則曰春秋之法。亂臣賊子。先治其黨與也。以此鑴黨日夜睢盱。逮甲寅之歲。假禮論構禍。遂至北謫南遷。卒乃幽囚於海島。則火色益急。而先生逌然不變。有九死靡悔之志。及庚申放還。世道又大變。門人尹拯以其父嘗以右鑴見斥於先生。蓄憾有素。肆意修郄。卒至鑴黨復起。駭機交煽。遂有己巳之慘禍。嗚呼尙忍言哉。先生受 命。在井邑縣。是六月八日也。臨終以治喪之節入道之要。託付於門人。從容靜暇。無異常日。是夜大星隕於東方。白氣如虹橫絶。縣居人異之。甲戌 上特命雪冤。復爵賜祭賜諡。及其遷窆也。又 命禮葬。其所以崇終隱卒者備矣。天道回還。公議必伸。亦可謂無憾。而黨習已痼。百怪層生。斯文之厄。至今未已。此其遘禍之大略也。先生嘗曰朱子之後義理大備。靡有餘蘊。後學只當尊信朱子。極意講明。爲聖爲賢。不外於是。必欲著書垂後者。妄也贅也。是故其所用工者。皆闡發程朱之旨。雖在流移危困之中。晝夜覃思。不明不措。使一言一句。無不躍如。雖初學之士。亦能曉然知其歸趣矣。若朱子大全箚疑,二程書分類。長鬐時所述也。語類小分。巨濟時所編也。問義通攷。濟州時所成也。心經釋疑則以退溪講錄。承 命而添删者也。又有文集百餘卷。將行於世。恩津之宋。以高麗判院事大原爲上祖。入我朝雙淸堂愉。當 太宗時退居懷德。曾祖諱龜壽。奉事 贈判書號西阜。有至孝居喪致白燕之異。祖諱應期。都事 贈贊成。睡翁公奉事 贈領議政。大節卓然。蒙 孝廟褒典。妣郭氏 贈貞敬夫人。其考忠臣自防也。先生之配。韓山李氏。都事德泗女。與先生合祔於水原舞鳳山向未之原。所後子基泰都正。二女適縣監權惟,士人尹摶。側出女爲閔周鏡妻。孫男殷錫縣監,疇錫校理,茂錫郡守,淳錫縣監,晦錫早歿。女適縣監崔星瑞。外孫以鋌,以鍇,以鎭府使。權出也。殷敎,周敎。尹出也。曾玄多不盡錄。而適曾孫一源。以學行爲 王子師傅。先生以疇錫克紹家學。常愛重之。悉以後事囑付。又敎以墓前勿建大石。只令尙夏記數行語於短表。使後人識之。蓋惡其張大也。噫。欲書先生之事實。雖百尺之碑。曷足以盡之。且其立朝大業。昭在國乘。居家至行。爲世準則。人皆誦法。可傳於無窮。故只撮其大略。論撰如右。嗚呼。栗谷作於前。先生繼於後。以啓我海外道學之傳。豈天之正氣東行。自不得不然耶。朱子之道至栗谷而復明。栗谷之業至先生而益廣。栗谷如天開日明。先生如地負海涵。世有知德者。必信斯言之非誣也。銘曰。

義秉春秋。學傳武夷。集群儒成。爲百世師。 <끝>

 

寒水齋先生文集 卷之三十一 / 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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尤庵先生墓誌文 - 後學 尹鳳九 撰

 

昔鳳九聞之寒水權先生。曰。己巳禍作。先師尤菴老先生臨命。敎小子曰。學問當主朱子。事業以孝廟所欲爲者主之。夫孝廟所欲爲者。卽春秋之義也。朱子之學。春秋之義。實我老先生所以殉身而不貳也。有欲知先生者。觀於此二者。庶矣。鳳九竊念朱子之學。卽孔子之學也。春秋之義。亦孔子之義也。先生自少委身於朱子法門。自治之嚴。施措之宜。靡不是述是憲。且所値之時。一如朱子之隆興。拳拳於尊攘復雪之義者。前後一揆。而皆上泝乎洙泗淵源。則是知先生學問事業。自孔子而朱子。自朱子而先生。源派相承。不可誣也。孟子謂孔子集群聖而大成。陳北溪謂朱子集群賢而大成。至我寒水先生。亦以先生爲集群儒而大成。曰聖曰賢曰儒。雖有名言之別。其集厥大成則同。蓋孔子之道。至朱子而大著。朱子之道。至先生而益明。此可謂朱子後孔子。先生後朱子也歟。先生諱時烈。字英甫。宋氏。籍恩津。高麗判院事大原。始見譜書。有愉號雙淸堂。我太宗時。隱德以沒世。曾祖諱龜壽。奉事贈吏曹判書。號西阜。性至孝。居喪有白燕巢廬之異。弟圭菴先生麟壽。妹壻成東洲悌元。同居講學。人稱其居三賢閭。祖諱應期。都事贈左贊成。考諱甲祚。奉事贈領議政。號睡翁。當光海錮聖母。以新進士。獨拜恩西宮。癸亥初。始筮仕。孝廟褒贈執義。今上丙午。特贈諡景獻。妣贈貞敬夫人郭氏。其考忠臣自防。先生以萬曆丁未十一月十二日。生于沃川九龍村。景獻公夢。孔子率諸子至家。命小字以聖賚。在髫齡。沃有女巫。稱靈異。而先生往則曰。此哥來。神不降。其正氣之鍾。已可知也。景獻公。以先生生有嘉徵。材器卓異。嘗勉以遠大業。戊辰。丁景獻公憂。制除。就學於沙溪金先生。金先生期許最重。先生益奮發。以聖賢之學自勵。癸酉。中司馬試第一名。冬。拜敬陵參奉。乍就旋遞。乙亥。除大君師傅。孝廟時在潛邸。數講學。至問易數及書期三百璿璣律呂等說。先生反復曉告。大君心悅服焉。異日魚水之契。蓋兆於此。丙子冬。虜寇猝至。扈駕南漢。平成。先生痛哭出城。歸見大夫人于俗離山中。仍有謝世意。入黃澗之冷泉。遠近學子來從者多。連除數官。皆不赴。甲申。始除司憲府持平。或侍講院翊善。上疏辭。時淸陰金文正公身任大義。爲世所宗。先生書贄往拜。講學而歸。己丑。孝宗大王新卽位。下別諭召之。蓋自初潛睿志卓然。至是慨然有修攘大計。收召金文正及愼齋金文敬,同春宋文正諸賢。而於先生尤致意焉。密令誥命。勿書僞號。先生感激知遇。遂赴召。除進善掌令。先生以爲不可虛辱恩禮。欲一罄所懷。以決去就。乃卽詣闕請對。適上有激惱事。稱有疾不見。先生遂決意退歸。留疏出城。上聞之。大自悔責。問筵臣誰與宋某善。承旨金益煕曰。臣素相好。上喜曰。爾其亟往。爲言予流涕自悼之意。善辭留行。復使禮郞齎旨往諭。先生已夙駕矣。以爲旣出還入。進退無據。暫留城外。陳疏自劾。略陳所欲言者而歸。蓋言勉學修身。遠佞親賢。抑私恢公。節財用以固邦本。正貢案以紓民力。修軍政以攘夷狄也。上幷嘉納。連下諭促召。先生因仁廟因山。赴朝入對。上爲說甘盤之舊。諭共天職之意。先生極論堯舜心法。且以爲聖上方在哀疚。聲色貨利。無一掛念。祇有純一之心。此正爲善之幾。上甚善之。時同春與松崖金公慶餘。務主激揚之論。請竄自點。幷論其附麗者。一番人側目造怨。朝論不靖。先生疏陳邪正之辨。請上亟正是非。毋使紛紜。上特命先生侍講經筵。先生上封事。推演前疏。極論君德時務。遂及復讎之策。而語益痛切。上命留中。後因乞暇歸省。引對諭曰。封事之無答。故欲面諭也。蓋聖意以語多忌諱。不欲煩諸文字也。庚寅正月。承召還朝。時金文貞公堉。議行大同法。愼齋金先生。議不合去國。先生引君子。同其退之義。陳疏乞歸。上不許。自點已竄。其徒行讒于虜。謀盡逐群賢。虜以兵壓境。六使來喝。事將不測。賴上善處卒無事。而先生與諸士類。先已逬退。無復有供世之念。自此屢除進善執義。皆不赴。先生雖退處鄕廬。若聞聖德有失。必眷眷憂歎。因疏勉戒。會趙獄起。二稚皆配絶島。先生引漢文淮南事。請曲加全保。因論處變之道。上諭以時惠德音以補闕失。與在左右何殊。癸巳。除忠州牧使。上謂大臣曰。宋某拘於彼虜。欲用而不能用。今特授雄府。非偶然也。先生三疏必遞。蓋向者赴召。實有所爲而來。徒仕非素志也。甲午。擢拜承旨。乙未。除吏曹參議。皆力辭。未幾。丁母夫人憂。上引金公益煕。問先生喪中安否。憂其柴毀。後金公來弔。同寢廬次。講論當世之務曰。今宜汲汲內修。以待彼釁。上每以此意。菀菀傾注子者不淺。願子自愛。蓋金公受上密諭之旨也。服闋。除贊善。時聖志日銳。恩禮日隆。而先生病不能進。因辭疏。以小冊子。條例十九事。手寫囊封以進。皆格君之要法。修攘之宏規也。上批曰。正大之言。與古聖訓相表裏。所以日夜思欲致之也。先生又因冬雷。以關聖德者四十餘條。上疏陳戒。未及上。上遣掖隷。下密諭。論修攘之計。又敎許衡事。蓋前日封事。請黜衡文廟。以正其失身胡元之罪。而朝議難之故也。先生附奏以爲其議至小。而所關甚大。臣欲以此密扶世敎之萬一。以爲異日陽復之基。今朽骨且畏之。況生者乎。戊戌春。除吏曹參議。時同春乞暇南歸。上以企待之意。使傳于先生。尋陞拜禮曹參判。先生以非常格固辭。上勉許。而眷注益懇。諭召洊下。先生實知上意卓絶。將大有爲。六月。遂西行。卽武侯許以驅馳之義也。上聞先生在途病。命道臣。備安車上來。先生辭不敢當。及至城外。上喜甚。亟遣都承旨勞問。又命繼粟繼肉。居數日。上強疾引見敎曰。日望卿來。實欲朝夕承誨。病今如此。幸煩先敎世子。又令陳所懷。先生爲言聖學居敬之方。且曰。今日疾厄。恐聖學必有疏闊也。受先王付託之重。雖跬步之間。不宜自輕。時上有銜橜之虞。先生以此及之。上疾已。連賜對。先生極陳修攘之策。上輒傾心開納。且敎曰。必得同志之士。可與共國。卿宜引進善類。先生曾於封事。言市南兪公棨賢才不可棄。至是。又力言之。上以兪公論仁廟廟號。怒未已。重先生言。許之。特拜先生吏曹判書。屢辭不獲。乃就職。恢公道。擇人才。確然不撓。仕路肅淸焉。其論爲政之道。必以持敬愼獨爲要。請上洗濯心神。粹然一出於正。而引文王日昃不遑之意。請上先自惕勵。貴三公以董率百僚焉。上賜先生貂裘一襲。先生上箚辭。後入對。又固辭。上密諭曰。卿未曉予意耶。遼薊風霜。將與同驅馳也。先生起再拜曰。殿下之志。豈敢不知。然不世之大功易立。而至微之本心難保。中原之戎虜易逐。而一己之私意難除。此朱子告時君之至論也。惟聖明極留意焉。上曰。先生前後所陳。無非此義。雖不敏。敢不蚤夜體念。蓋上於先生。多稱先生。其誠心禮敬可見。上又敎曰。明天理正人心。予責也。與予共此者。舍卿其誰。卿其以世道自任焉。先生亦有鞠躬盡瘁死而後已之意。己亥三月十一日引對煕政堂。將罷。上獨令先生留身。屛宦侍。洞開諸門。自以席賜先生坐曰。今欲依宋孝宗幄對南軒事。與論修攘大事。語祕人不得知。後以史官言。先生手錄筵話。載之國乘云。自是人心益疑忌。上知不可更爲。時以密札。授東宮。每於講罷。親傳。又因先生直摠府。夜使東宮。來傳密札。其際遇之隆。恩禮之篤。古未有也。用先生言。分遣御史。徧考諸主家屯莊漁箭鹽盆願堂。並從令式。改正貢案。草本已成。而凡所施設。一一罷行。傾濟之勢。十八九成。而天不祚。宋大運中否。上遽棄群臣。嗚呼天乎。時先生在摠府。方修對密札。忽聞上大漸。蒼黃至閤門外。中官走出傳命。促領相吏判入。先生與之趨入。已不聞玉音矣。遂環立哭擗。卒襲。先生親結握手。及小斂。先生語諸大臣。請如禮待大斂結絞。世子令大臣與儒臣講定。領相鄭公太和與同春議。祇不結近上一二絞以存禮意。先生出視梓宮。比斂體大小似不稱。使內官更審之果然。諸臣相顧錯愕。鄭公達于世子。遂定用連板。先生以此慟恨。遺戒子孫。身後勿用全板。先生以後世君臣之服滅裂失倫。請依朱子服議。製斬衰。以復古禮。大臣李景奭等。沮排之不得行。王大妃服制。以先生言。定爲期年。尹鑴謂當服三年。先生說不但主註疏。實合時王之制。鑴說不售。先是。洪汝河因先王時求言。稱應旨疏誣先生。留政院。先生至是。乞解。顯廟不許。特旨擢拜。兼判義禁府事。以大臣言。遞本兼兩職。旣而。還授吏判。先生出郊固辭。遞拜判中樞府事。朝議欲定山陵於水原府。上意亦傾向。先生以爲本府。是七千兵馬之地。不但爲先王所重。萬世之後。又有程子所謂五患之慮。筵對箚陳。屢言不已。終定於健元陵局內。先生承命製進大行王誌文。李景奭先已撰行狀。而專事畏忌。無一言及於志事。至是挾虜恐嚇。時議亦慮其或致觸忌。迭請鐫改。先生因史官回啓。謂先王志業。不敢埋沒於斯文。苟如景奭之言。不若全棄而別製之爲愈也。先生自遭天崩之變。居常痛泣。如不欲生。而平日所仗之義。無地可言。已決歸意。及山陵復土。連疏乞骸。上終不許。群不逞乘時。蜚語罔測。先生遂留疏出城。上連下手札。遣承史挽行。至有卿若不來。予寧欲往見之敎。而終不敢留。連拜三宰貳相與兵判而宣召絡繹。及練制。以許穆尹善道疏誣。不敢進。詣文義縣庭。望哭易服。至辛丑大祥。承召入城。又因趙絅疏。出城待罪。上慰諭甚懇。必欲相見。先生自念身到輦下。終不得一瞻天顏而退。誠有所不忍。遂入對。上涕泣。先生亦涕泣仍詳陳善道誣說本末。投疏南歸。上下諭留之。三司及館學生。上疏請留。皆不得。孝廟將祔太廟。先生因獻議。爲言仁明兩廟。合爲一世。實違古禮。遷奉永寧之時。宜二其昭穆。各專其尊。又言四祖別祠之非。請依程朱論宋朝廟制之說。以穆祖爲始祖如宋之僖祖。而太祖以下世室如舊。又於太廟。爲東西夾室。奉翼祖以下祧主。議下。竟不行。丁未。有虜中査事。右相許積移罪上躬。勘以罰金。反自爲功。先生因辭疏。極論其罪。及李䎘等七諫臣。合辭劾積。幷及時相。上怒甚。皆竄之。先生先已言此事。上疏待罪。戊申春。特拜右議政。秋。上幸溫宮。遣承宣促召。先生遂入朝。力辭新除。乞遞職隨駕。時入講筵。上遂勉許。及至京。特命兼帶領經筵世子傅。疏辭不許。冬。復拜右相。先生卽留疏告行。上連遣承史諭召。又特遣戶曹判書閔鼎重。宣諭勉留。閔公歸奏言。某向來一出。祇以先王有志重恢。必欲與共國事。故某亦感激圖報爾。本無徒恃寵榮。從仕三公之意。若處以閒局。則亦當出入經筵。有懷必達矣。後因辭疏。許遞本職。宣召不止。先生上疏陳謝。極陳去私循理之意。後因入對。更申前說曰。臣每進去私意循天理之語。自上若能體行。則是臣之說行也。否則留臣無爲也。時以慈殿誕辰。將設宴樂。先生上箚曰。孝子悅親之道。不必以娛耳目爲事。惟修德勤政。畏天恤民。以繼述先王之業。乃所以上慰慈旨也。又進箚。極言君德闕失。又言賤倡妖巫夤緣出入。無復防限。或爲侵蝕本原之地。除夕。又上箚言年來聖候不寧。謁廟之禮久廢。而溫泉之行。年年不止。又有不得已則時出西郊。獨於此久未能行。豈非未安者耶。明日是元朝。宜殿下留念也。後因召對。爲言神德王后尙未復號。神理人情。誠大不安。請陞廟復陵。上令禮官亟行之。連入對。多有建白。而胥吏與士夫嗜利之輩。大惡裁省貢案。怨謗朋興。積使徐必遠上疏劾己。以爲知其有害於國而不直言諫止爲不忠。暗售蜮弩之計。必欲先生之不安而去國也。先生益知時事之終無可爲。遂上箚還山。上諭止不得。庚戌。有妖賊世直告變。誣及先生及同春。旋伏法。先生卽詣畿邑。上章待罪而歸。辛亥夏。復拜右相。特兼世子傅。先生屢疏辭。因歲大饑。疏陳救荒恤民之策。仍繳納前歲擬上冊子。疏末。論臺臣之言大臣事者。不能明言是非。大臣。積也。時尹敬敎又疏。論積不饒。上嚴斥敬敎。謂符合佗意。先生上疏待罪。同春及打愚李公翔。又上疏盛言積姦狀。上震怒。削黜李公。又以此事根於敬敎。特命安置極邊。朝廷震駭。積亦遞相。先生序陞左揆。卽陳疏以爲殿下以敬敎爲近事之根本。則臣又根本之根本。殿下乃反寵以新除。是何殿下惡惡之道顚倒若此。又因積疏同受命於聖考之說。極言積詆節義壞倫紀。將有以害國家而禍士類。以傷聖考知人之哲。上方寵用積。故先生前後疏。皆三朔而後下批。至壬子冬。始遞。癸丑夏。賤宗翼秀受鑴,柟嗾。以寧陵石儀有隙。譸張恐動。疏請遷奉。凶徒蓋以己亥連板。歸罪於先生。謂其必生罅痕。欲因此構禍。上不知其出於凶計。遂定遷陵之議。先生與右相金公壽興書。以爲聖候長在違豫。久廢展陵之禮。若更親審。則豈有今日之事也。時先生以凶言嫌。不敢進言。金公新當鼎軸。欲其牖之於都兪之際也。實亦戊申箚陳之意。而終爲後日誣捏之資。上命先生撰遷陵誌文。又令書進。荐召不已。先生亦不忍不效於聖考終事。遂西行。及至畿甸。又受左相新命。不敢入城。轉進驪州。奉審新占神穴。再疏辭。得遞。先生遂入對。又獻議請改葬時。君臣依古禮服緦。別製布團領,烏帽帶。爲視事服。廷議不一。終不行。先生旣寫誌。卽出郊外。詣舊陵奉審梓宮。遡江赴哭新陵。禮訖卽南歸。疏請先王享祀勿書僞號曰。願殿下追思聖考志事。勿復以汚穢腥臭之可醜者。冒薦於淸廟朱絃之閒也。又言啓陵時事。以爲當初啓土尺許。已審隧內之無故。而任事諸臣。恐懼於罔極之人言。仍封之議。終不敢出焉。新陵之吉。雖自昔所稱。而亦豈若仍安於已安之地哉。臣今蹤迹之危。不翅集木。而又獲罪於國舅。不敢出片辭於其閒。臣孤負先王之罪。萬死難贖。疏入。越月下答。大示未安之意。甲寅春。先生更申前疏之意。上終不答。先時。淸風府院君金公佑明。葬其親。用隧道。閔公維重啓請改正。先生直其言。金家怨先生甚至。是先生請建新陵表石。淸風大斥其議。謂前代所無。不可刱開。而言出於某。故群下不敢非是。又有閔世益者狂易喪性。不能執其父喪。其家用玄石朴公世采言。以其子愼。代父服喪。稟於先生。先生謂此實朱子定論。而亦宜呈禮曹。以聽朝廷處分。鑴攻斥先生以爲亂人大倫。淸風又以爲此世益及愼。俱無其父也。請上罪之。先生陳疏引咎以爲列聖三陵。北路諸陵。皆有碑表。非今作俑。然人各有見。無害於各陳。而乃曰。賤臣所言。人不敢議。閔家事。本依朱子說而言之者臣。故其紛紜如此。佑明意有不可。則直請臣罪可也。何爲此藏頭之說。使閔家替受重究也。豈亦於臣證成人莫敢矯其非之意耶。前疏中獲罪國舅者。蓋指此也。三月。王大妃昇遐。先生行至畿甸。聞慈懿殿服製。初定期年。改以大功。致上詰責。而其事實關先生己亥議禮。先生不敢。入。遂陳疏。退歸華陽。及葬。至楊根迎哭廞衛。待下玄宮。望哭於陵外。卽還。嶺人都愼徵疏論服制。必欲構誣先生。上命大臣六曹三司會議。議啓入。敎以附託佗論。配領議政金公壽興。仍改定邦禮。朝著大變。佗論。指先生也。先生進詣萬義待罪。八月。忽聞上候大漸。馳至江外。遺敎已頒。先生進哭闕外。卽出城受服。歸萬義。有陵誌製進之命。先生引罪。不得承當。上連遣史官宣諭促召。先生進詣江上。蓋欲治一疏論服制首末。以俟處分。凶人郭世楗希鑴旨。託以議禮。誣先生。又以先生爲翺翔近畿。先生蒼黃南歸。積於引對。陽斥世楗。陰實庇護。上以世楗疏爲忠言。而士林之爲先生疏辨者。皆被譴配。於是。群憾蝟起。構先生益急。上一皆褒寵。先生進至鎭川待罪。時兩司合啓。以壞禮亂統論先生。連請罷職削黜。皆一啓而允。乙卯正月。遠竄之啓繼發。上以爲宋某雖有乖禮之罪。邦禮今已釐正。則削黜之典。亦足懲矣。後數日。兩司請對。游辭固請。上遂從之。竄于德源。時有星隕淫虹之變。儒生鄭祥龍等。上疏以爲此與慶元乙卯請罪朱子時變異相符。極言伸理。上大怒。特命投北。鑴又使其徒。請移先生遠惡地。栫棘于長鬐。南北千餘里。觸冒潦赩。困厄百端。而先生處之怡然。時論漸急。務爲深刻。又請先生栫棘絶島。又以釐正邦禮。請告宗廟。亦有疑貳者。其論止焉。鑴,積等。陰結楨,柟。久蓄不臣之心。而兇計終不售。又謀以禮論先除先生。遂使鄭之虎。更發告廟之論。積與權大運,李元禎等。或緩或峻。抑揚操切。而皆主其論。上終不聽。門人宋尙敏嘗備述禮論始末。作一冊子。又悉陳鑴,穆等姦邪誣悖之狀。欲進而未果。己未夏。竟上之。兇黨視爲奇貨。杖殺尙敏。謂先生與之交通。移巨濟。加棘焉。時有李有湞投書。李煥掛書之變。皆鑴陰嗾。而與積,煕,大運等。反歸之於先生之釀成。恐動上聽。交請按律。又使嶺人蔡範夏上變。告先生越海招寇。指日犯闕。語益兇駭。上皆不從。蓋甲寅之禍。實本於賊鑴。而鑴之構禍。假託己亥議禮。鑴以姦臣孝全之子。戾氣所鍾。狡黠文辯。自許以知道。始能欺瞞當世。先生亦愛其才。後鑴作理氣說。斥退,栗,牛諸先正。至於經書註說。任自去取。中庸則掃去章句。全以己說易之。先生謂此實詖淫邪遁。爲斯文亂賊。極力排之。鑴以是嫉怨先生。甘心嫁禍。至己亥服制。先生與同春。言喪服疏有雖承重不得三年之文。大行大王。雖已承統。言其倫序。自是次適。王大妃之爲之也。不得過期年。鑴聞之。欲傾陷先生。乃錄出註疏中第一子死。取適妻所生第二長者立之。亦名長子之語。謂王大妃當服齊衰三年。送于一大臣。領相鄭公以示先生。先生曰。禮有是說。然其下方有適妻所生第二子。同名庶子。及雖承重。不得三年。有四種之語。此所謂第一子死者。恐是未成人也。仍歷誦四種說中體而不正。立庶子爲後之說。鄭公亟止之曰。帝王家事。始微而終大。萬一姦人。因此構禍。柰何。四種說不可援。更有可據之禮否。先生曰。大明律及國制。無論長衆子。皆服期年。不爲無據也。鄭公喜曰。今得此無憂。與諸大臣皆主時王之制。稟定爲期年。鑴又引斬衰章外宗猶內宗之說。謂大王大妃。亦當服斬。先生辨之曰。內宗婦女皆是臣子。故不敢以私戚戚君而服斬矣。大妃則我先大王所臣事也。何可不服本服。反同於臣子乎。鑴又引武王臣文母之說。先生曰。朱子旣引劉侍讀之言。以爲子無臣母之義。後人何敢爲此言乎。庚子許穆之疏。亦鑴所嗾。而傅會儀禮註疏。請改定三年之制。至謂立庶子爲後不得爲三年。妾子故也。先生承命獻議。以爲此固疏說。而妾子故三字。穆自下之。非疏說也。夫所謂庶子。固謂妾子。然自次適以下。雖人君母弟。亦謂之庶子。故疏曰。庶子。妾子之號。而適子之第二者。同名庶子。然則孝宗大王。不害爲仁祖大王之庶子也。庶非賤稱。乃衆字之義也。考之禮經。此類甚多。穆又申前說。以適子庶子三年期年。條列爲圖。投疏以進。上更令先生議。先生逐段剖擊。引朱子下正猶爲庶之說。辨析痛切。鑴之論禮。計本嫁禍。末乃託於著說。以先生爲卑主貳宗。至於善道疏。則專攻先生。以爲宗統不明。群志未定。又以梓宮之附板。山陵之不用水原。罪狀先生。又以先王銜橜之虞。爲先生不能輔導。又以比年天災時變。皆歸之於先生。兇言悖說。一襲,鑴,穆而轉益危譎。上謂善道疏心術陰險。取示廟堂而焚之。先生至文義。上疏待罪。因史官傳諭之啓。以爲漢文帝自稱高皇帝側室子。而固無害於大漢四百年正統。況先大王之爲次適乎。臺議謂善道構先生以逆。當反坐。請按律。竟命投北。權諰疏救善道。以善道爲敢言之士。而又謂之讒諂媢嫉。以先生爲罪言殺士。而又謂之祈天永命。怳惚閃弄。不成事理。趙絅疏以善道爲孝廟左袒。勉殿下追孝於先王。指斥先生。語意危險。皆出於賊鑴煽動傾陷之計。而終至有甲乙之禍。凶徒之構先生者。節次層加。至於告廟按律之請而極矣。然其不及於慘禍者。蓋以明聖王后親承孝廟德音。終始扶護之力云。庚申春。堅,柟,挺,昌等。謀逆伏誅。鑴,積。亦坐死。朝著更化。上於禮論。猶未祛惑。夏。因草廬李公惟泰疏。始命撤棘。當議禮初。李公之議與先生同。及被謫。李公謗言喧藉。至謂新著禮說。頓變前見。畢竟始壽輩謂之改過。筵白放釋。至是上特命敍李公。李公疏又援先生。謂與同見。上以爲宋某之罪。專在誤禮。今與李惟泰無異。有是命。先生恥與舊要同利。作詩遣意。上漸覺禮禍之本出假託。旋命全釋。仍拜領中樞府事。遣史官。宣召。辭意懇惻。深悔沖年眩於群枉之譖。而必欲一接顏面。先生依程子西監之義。遂入京。上卽賜對慰諭。先生仍勉勤學持敬之道。上命留宣醞曰。有戒飭寡躬者。願卒聞之。先生以一念善惡。災祥類應之說。申申告之。又曰。聖上聰明無比。誠聖人之姿。若自有聰明。謂人莫如我。則聰明反有害矣。因以年過七十。固請歸死。上懇辭勉留。先生連入對。講太極圖說,西銘二書。歸萬義。坤殿昇遐。卽還哭臨。承命製進王妃誌文。留箚出郊。上遣知申懇諭留輔。慈聖又遣寺正金錫衍賜諺札。先生以爲此女中堯舜。手札勉留司馬光者也。感激異恩。承命人城。先生自以蒙慈聖非常之恩。又主上英明。義不忍決歸。黽勉遲留。翌年新元。袖箚爲言尊攘之義。蓋謂先王志事。不可不一誦於更化之初也。至以杜私意恢公道。恤民隱定兵制等事。連箚屢對。極言竭論。此自孝顯以來。先生之入朝。每拳拳於修內之意者也。其請罷內司四宮各衙門屯田。諸宮家折受。公主第宅之踰制者。一依制令毀去之。遵職田之法。抑橫奪兼幷之習。收編戶之布。紓良役偏苦之患。凡收布之法。以五升三十五尺爲一疋。升尺之漸加者。一切覈罪。裁損貢價之濫增。推之而除厚斂之弊。大同剩餘之樁留各邑者。依朱子破分之訓。以其所餘。量減所收。遇災荒則以蠲民賦。爲賑飢之先。簽軍額則以從母役。爲搜丁之先。申戶籍之令。以明邱民之所屬。行保伍之法。以遵同井之古意。修五衛之制。以復舊典。給束伍之復。以資糧費。訓局軍兵驕悍耗食。則依御營之規。給保番上。外方兵器修改無財。則割奴婢之貢。分屬諸閫。禁娶同姓。以嚴禮防。禁民爲僧。限年漸刷者。皆平日論軍國之政謨也。雖以列朝倚毗之重。多爲流俗沮敗。施用者絶少。道之難行如此夫。又如特立三學士傳。以至姜孝元之類。皆以文字褒美。請官鄭圃隱後孫。以及嚴興道,李士龍之後。金應河之孫。勿責虜供。丁丑立慬諸人。並加旌表。皆所以鼓動培植。爲扶世道人心之一分也。時姦邪伺釁。朝論多岐。先生決意退歸。祇送王妃廞衛。遂留疏以歸。上遣重臣。宣諭留之。先生對以致仕大防。禮不可違。時宋朝楊,羅,李三賢。本朝李文成,成文簡二賢從享文廟。因下詢。請釐正前所享諸賢中濫與者。而周程,張邵朱六賢。陞配殿內。勉齋黃氏。追享聖廡。又言金文元公禮學純備。而不得從享。爲士林恨。又請依皇朝例。作啓聖廟。上優批之。閔公鼎重平日自任經濟。及拜相。必欲更起先生爲領袖。收召諸賢。更張振作。共圖至治。屢從士友。致意於先生。先生雖知時勢之不能攸爲。自念君相之意如此。則誠不可孤。而本欲表章孝廟大烈。以爲觀德之典。自附孔子反魯修春秋之義。兼陳休致之請。而且以玄石方負士望。幷被召命。欲勉其出膺。俾成閔公之志。壬戌冬。遂入朝。因李玄錫疏。卽出至萬義。轉向驪州。上屢遣承宣宗伯。諭召不止。癸亥正月。復入城箚請休致。上命除肅拜引見。先生更伸前懇。上不許。因何蕃陳東歐陽澈立祠之詢。先生以爲此實聖人衰世之意也。獻議請建。乃疏言孝宗大王聖志卓越。謨猷宏遠。蓋不欲僅守邦域。使聖壽靈長。其必不但已也。至今東土之人。知君臣父子之倫者。伊誰之功。論其德。旣無閒然。言其功則使仁義立而五典惇。是宜追崇尊尙。加隆廟儀。以爲百代不遷之廟也。上命廷議而行之。時少輩以金益勳使金煥發告許璽逆謀。謂之誣告。論之甚急。先生知非其實。而以臺論之方張。不敢伸救。祇引趙月川穆事自列。時論轉激。至謂先生私於益勳。先生上箚引咎。仍屢乞休致。上懇辭不許。先生因疾沈綿。四日而連上三箚。諸大臣皆言某病中情懇。誠可念也。上始許之。運遣承宣冢宰。特諭勉留城裏。與聞國政。出入筵席。先生上箋謝。又進箚。請以昭義正倫等字。追上太祖大王徽號。上議諸大臣施之。蓋先生之意以爲太祖回軍一事。實扶尊周之義。永有辭於天下後世。而況此大義寢晦之日。尤不可不表章之。以存天下之大防。實與孝廟世室同一義也。玄石以爲太祖回軍。終至化家爲國。則今日臣子。不必以此表章。群議靡然。末有朴泰維之疏。至曰。上下皆知其未當。猶難相違覆。卒之宗廟重典未愜群情。先生聞之驚駭。以短疏請罪。又與玄石論此曰。漢祖之爲義帝發喪。惟其所仗者大義。故朱子於綱目。特筆書之。況我聖祖之事。實春秋大義。成承旨三問,退溪淸陰諸賢。亦嘗贊美此事於詩箋章疏。至於梅月堂。我東之伯夷。猶以此事贊歎於吟詠之中。在今日之道。安得不闡明發揮。時朝論日益乖亂。閔公初計亦大謬。先生歸意日急。而上意眷向不怠。先生亦嘗以不敢遠去爲對。故不忍決歸。或往遊近畿巖泉。仍有楓岳之行。上聞之。遣史官問行。又命太醫往護。將還。聞諸臺以先生私語之發於筵席者。引避紛紜。先生心不自安。改向驪江。爲瞻依寧陵之計。上連遣承旨及冢宰。申諭速還。先生上疏乞許。優游自在。會副提學趙持謙。因玄石疏語。請收還先生致仕之命。先生聞之。以爲此將益實徘徊圖入之謗。卽上疏告行。泣辭陵外。遡江而東。遂南歸。右相金公錫胄白上。近來一種言者。類多陽尊大老而陰加排笮。朴泰維之疏。侵及儒賢。若是狼藉。至於趙持謙,韓泰東,吳道一等。褒揚泰維。最爲乖激。不可無警責。上命或罷或補。玄石以擧枉錯直。疏論金公。金公又以加大淩長。對斥少輩。由是少輩益加憤怒。而舊憾於先生者。相與和附。遂有老少論之稱焉。冬。聞上痘候忒重。先生驚遑步出。家人賃馬追之。時風雪甚惡。先生單騎疾行。及至。上候已向安。留箚南還。聞王大妃昇遐。旋赴殯殿。入對嚴廬。甲子春。製進陵誌。先生聞名入枚卜。卽陳疏歸。時尹拯與史局書。自伸其父江都事。言栗谷眞有入山之失。而先人本無可死之義。又謂金公益兼,權公順長。無必死之義。京外儒生。合疏攻之。掌令洪受疇欲實拯書意。疏誣栗谷之落髮。而引沙溪爲證。先生大駭以爲幷誣兩先生。不可不明白剖破。且權金諸人。同樹節義。扶植世敎。今以傷勇之意。欲使之掩翳。節義之明晦。實關國家之興喪。陳疏痛辨之。丁卯正月。上臨筵歎息。語及神皇盛德。先生喜聞曰。此亂極思治之一幾也。遂上疏陳頌先皇德意。以及列聖尊周志業。以彰大義。末言今玆德音之煥發。豈非天理明人心正之大關棙也。惟願殿下誦宣廟必東之奏。歆仁廟拱北之誠。益勵聖志。益懋聖學。益修仁政。益飭武備。以繼我孝廟志事焉。戊辰冬。莊烈王后因山。先生至陵下。哭廞衛。擬入慰嚴廬。因以一疏辨拯黨誣景獻公事。又依裵晉公玉帶事。還進孝廟手札而歸。時輩機謀日深。遠邇合勢。將交章構禍。先生不敢冒進。直自陵下。退歸興農。先生曾愛華陽水石之勝。築書齋講道其中。末又移居于此。蓋擬晦翁之婺源也。時景廟誕生。門人多請入對獻賀。先生曰。昔今上誕降。以情勢不安不能申賀爲群憾所構誣今日情迹之不安。又甚於前。何可苟且計較。爲前日之所不爲耶。己巳正月。上特定元子位號。廷臣皆以正后有慶有不可知。且王子生纔數月。定號太早。南公龍翼。以力爭被譴。兇徒嗾人投疏。直以時異則事異之語。恐動聖聽。上雖因喉司之言。島竄其人。朝著震惕。大禍朝夕且至。先生以爲今日臣民之所屬望。捨王子何歸。如是汲汲。殊欠從容。且諸臣所達。亦先事周詳之慮。不可不爲上言之。遂進短疏以爲昔宋神宗生哲宗。其母後宮朱氏。橫渠,張子聞而喜甚。程子美其公忠。朱子,呂東萊表章於寒泉之編。程張朱呂之前後一揆者爲宗祀。純乎天理也。今日諸臣之心。亦豈有異同哉。諸臣有位號太早之說。蓋哲宗十歲而至神宗有疾。始封太子。以帝王大擧措。貴於于于也。昔年許穆進國本未定之言。故相臣鄭太和進曰。元子誕生之辰。卽國本已定之日也。其言不售。今者聖明雖已痛斥。讒人種子。安知不起於千萬世之後乎。子弟門生交謁更諫。先生終不聽。疏入。上震怒。夜召承旨玉堂。以疏中有疾始封之語。反覆下敎以爲宋某山林領袖。敢生異議。無將之徒。將接迹而起。李玄紀等。左右構捏。以激上怒。又贊揚拯前事。以攻先生。上特命削黜。是二月朔日也。太白晝見。於是。舊臣竄逐殆盡。鑴,積餘孼。充滿朝廷。起拯爲大司憲。遂引拯父子。追復鑴爵。始鑴之伏法。先生謂佗日伸鑴。尹家必爲之張本。至是果驗。因兩司合啓。始令遠竄。已特命栫棘濟州。先生行過連山。路出沙溪先生墓下。使門人操文往告。爲言斥鑴之侮毀朱子。曾有巨濟之行。而尹宣擧黨鑴。以厄斯文。幷與宣擧而攻之。其子拯不思蓋愆之道。反讎視小子。使其勢潛熾。宗國將亡。又敢詆侮栗谷。小子不勝驚愕。攻擊之言。或過其中。又曰。小子雖有此行。而拯乃騫騰。苟使吾道由吾而不至盡亡。則雖滅死萬萬無恨矣。此出於血氣之私。而或非義理之正耶。苟如是則不但南海之神罰而殛之。其得罪於先生甚矣。蓋拯蓄怨圖禍。自前冬兆朕已露。先生之言如此。先生於是行也。一以後事屬門人權尙夏。以溪上所傳栗谷先生手筆付之。又以誠直之訓戒子孫。候風于康津。與諸生講論經籍。留六日。先生以久在平陸。爲不安。請禁郞亟發。及出海。風猛浪涌。舟幾沈。篙人束手。先生晏然端坐。朗詠朱子飛下祝融之詩。旣入棘中。日與孫疇錫。看朱子書。兇徒相繼陳疏。請黜兩先生於文廟。以掇拾兩賢餘論。力排尹拯。爲先生之罪。金邦杰。論以極律。謂乖亂宗統。動搖國本。又以太祖徽號。孝廟世室及癸丑所與金相書。爲先生極罪。臺啓改請拿鞫。三司又合啓力請。上遂允之。中外儒生及門生屢百人。方爲先生陳疏伸救。及命下。皆守闕痛哭。前後伸辨者竄配相續。五月。拿命至。先生始意其宣藥。沐浴更衣。又作書寄訣權尙夏。託以朱門緖業。又令依南軒虞帝祠。楚人祭昭王之事。建一閒屋於華陽磨崖之下。以祭神毅兩皇帝。禁郞迫出先生讀傳旨。拘先生于村舍。先生爲告先考妣文。歷敍平生學問出處及姦兇構禍之事。以付疇錫。使之歸告墓前。又以一書告訣于玄石。回泊海南。始聞坤殿廢黜。吳公斗寅,朴公泰輔諫而死。失聲痛哭曰。爲臣子者。尙可生乎。乃草遺疏。言聖祖德烈及姦兇之實惡。世室假託預定矯誣陷害之狀。時文谷金公壽恒。受後命於珍島。諸孤走人乞銘。先生已絶粒食。又驅迫作行。氣息㱡㱡。子弟請略成數行。先生曰。此將爲後世大議論。不可草草。盡書無闕遺。大運輩聞先生疾勢已劇。恐徑殞於道。以爲某罪惡彰著。無待鞫問。請速賜死。上卽許之。至井邑。聞有後命。先生又草一疏。言其前後出處大義。幷初進御札疏及海南時遺疏。聖祖聖母手札。授疇錫。待可進之日進之。執權尙夏手。語曰。吾常以朝聞夕死爲期。今年踰八十。終無聞而死。是吾恨也。此後惟恃致道。尙夏問後事當用何禮。曰。以家禮爲主。而參用備要。襲斂則先用深衣。次用朱子所服上衣下裳之制。襴衫是皇朝時所崇服。亦可用也。又曰。墓道勿建豐碑。祇可立小石。致道略記數行以表之。因以上所謂朱子學問。孝廟志事。申申告敎。又曰。我國國小力弱。雖不能有爲。常以含冤忍痛迫不得已之心。吾黨之士。存諸胸中勿失。可也。又曰。天地之生萬物。聖人之應萬事。直而已。孔孟以來相傳。惟是一直字。而朱子臨終。告門人。亦不外此。君其識之。雖臨命蒼黃之際。其授受之丁寧如此。仍曰。吾命將絶。趁今一息猶存。受命可矣。藥來何遲。命取上衣加身。斂膝瞑目。俯聽傳旨。遂進藥。就枕而逝。是六月八日癸酉也。前一日夜。白氣經天。是夜奎星隕地。赤光亘屋上。人皆嗟異焉。治喪一遵遺命。門人持服者百餘人。靷歸興農。用士禮。七月辛巳。權厝于水原萬義舞鳳山西麓。遠近觀葬者。殆千餘人。蓋先生之禍。始由於鑴,穆之構誣。終成於拯之潛煽。拯是先生四十年服事之門人也。其見識迷暗。心迹謬密。一襲其父宣擧黨鑴之習。自少連袂兇徒。表裏相關。又閱歷世故。惟利害甚熟。至是見少輩之攻先生者。可以黨與而爲對手也。始敢挾其勢。而自立門戶。以先生所撰其父墓文。要爲分貳之計。與時輩乘釁密合。搖惑一世。先生念拯父子。律身制行。不無可稱。擧世靡然。而其用心處。全在於計較趨避。故爲害尤甚。又黨助賊鑴。以釀斯文之禍。其弊不止於今日之紛紛。必將爲世道無窮之憂。吾敢自愛其身。不肯攻彼之邪淫。以負聖祖付託之意耶。遂於丁卯疏末。極言宣擧失身黨惡。拯悖理傷化之由。自此拯之仇疾怨毒。日以益甚。以至其徒羅良佐等投疏。誣捏極矣。始丙子夏。孼虜僭號。宣擧倡多士上疏。請斬虜使。虜使遁去。及江都之變。與權,金二公。守堞約死。又令其妻先死。而終乃爲奴。受虜標出圍。自謂慙憤悔責。從愼齋學。讀書求志。其章疏稱死罪臣。備述臨亂苟免之事。終身不娶不仕。先生與其新而不念其舊。又惜其初年氣節。謂其以不死自廢。則與以死自厲者。事雖不同。同歸於崇節義也。至附見於三學士傳末。及鑴侮蔑諸先生。敢毀朱子註說。宣擧以牛溪宅相。反助鑴甚力。先生辨責不已。至曰。春秋之法。治亂賊。先治其黨與。有王者作。公當先鑴而伏法。乙巳東鶴之會。先生又歷數鑴罪而曰。今亦復爲扶護乎。宣擧始乃以鑴爲黑爲陰。又曰。豈可以爲黑爲陰。而不絶其人乎。先生喜曰。公從此灑然矣。宣擧歿。拯以玄石所撰狀文。謁銘於先生。而示以宣擧年譜及己酉擬與先生書。其譜則以其父之終始扶鑴。爲公心正見。以先生之斥鑴。爲過激不中。推尊鑴學。隣於生知。以爲希仲立心制行。不泥古人。讀書講義。不拘註說。其書則曰。禮訟之禁解。則吾道自歸於公。聚精會神。庶績煕矣。如尹,許二人。縱有詿誤之失。安得終斷以譖賊。不之容乎。今果能滌禮訟猜嫌之迹。先從此兩人始。則可以服人之心。先生見此大駭。而又聞鑴祭宣擧文曰。子謂我妄攖世禍。我謂子不能自樹。密地情話。反以先生謂世禍。先生始知其前日之自謂絶鑴。全歸假飾。因此而其所謂悔責云者。亦不能無疑也。不欲泚筆於其碣。而終有所難辭者。又以玄石之屢書相勸。黽勉應副。而稱道之語。一循狀文。拯謂不滿意。屢請改之。先生終不許。蓋當癸甲之際。鑴積勢熾。世道將傾。拯之以其父擬書。始出於謁文之行者。其意果何爲也。先生之見而駭之。拯豈不知。碣文之出於先生者。不稱其意。亦豈不自知耶。及庚申。先生歸自海上。以勳戚諸公。謂有扶社稷之功。治獄大臣。謂能平反凶徒以此禍心。益耽耽。佗日翻復。先生之爲士禍孤注。拯已先覰。而恐爲畢門之寒暄。遂以碣文之不改。謂之讎怨。而平生一事之地。忽謂本原學術之可疑。乃以義利雙行。王霸並用。機關術數等語。貽書玄石。私自譏切。乃傅會無根之說。連書屢牘。恣意迫蹙。誠師生之變怪。斯文之不幸也。文谷金公,老峯閔公。白于上以爲拯之誣詆其師。非語言薄過。不當復以儒賢待之。蓋先生之處宣擧者。祇二事也。始焉宣擧自謂悔過自廢。則先生信而與之。爲之稱道。始焉宣擧自謂絶鑴。則先生信而嘉之。喜其灑然。及拯有史局書。則江都事無所悔。而依然失節而已。宣擧譜書出。則鑴賊無所絶。而依然黨惡而已。不悔而謂之悔。不絶而謂之絶。先生每謂一生見賣於宣擧。心切痛之。爲宣擧者。生前死後之相反若是。則先生之處宣擧者。前後不同。亦義理之當然。眞如姸媸俯仰隨物遷形。而不害爲鑑衡之空平矣。拯不徒不蓋其父愆。實自發其愆。以致先生之不得不辨斥。而反謂父師有輕重。敢於背師者。多見其悖倫而已矣。先生固知其義理不勝利害。則終必無所不至。拯辛酉擬書。先生雖未及見之。其一轉而爲己巳慘禍。先生已先言之矣。後六年甲戌。肅廟大悔悟。逬出群兇。克復坤位。而首復先生官爵。特遣承旨致祭于廟。時疇錫已歿。胤子基泰疏進兩聖手札及先生前後遺疏。批略曰。先卿畢義效忠。至死冞篤。執書衋傷。益切悔恨。先卿不負予。而予獨負先卿。悠悠九地。孰知我心。特命不待諡狀。賜諡文正。丙子冬。改葬於舊穴稍上數武。夫人先葬旁穴。至是合祔。始賜禮葬。隱卒崇終。殆若無憾。而一番人執命。世道益淪陷。斯文益壞喪。先生之道日消矣。自玆以來。士論之尊先生者。屢起屢跲。蓋肅廟曾入拯黨父師輕重之說。以爲拯之背師。爲父也。每恕之。至乙未丙申閒。以市南兪公源流事。權先生疏論拯前後背師之罪。因此甲乙爭論。源頭事實。始大彰著。上翻然覺悟。命入拯辛酉擬與先生書。先生所撰宣擧墓文。覽之。答右拯疏曰。昔年下敎在墓文。擬書未見之前。今日下敎。是擬書墓文已見之後。予心一悟。是非自明。雖謂之有辭後世。可也。父師輕重之說。今不當更提。至答景廟辭代理疏。以斯文事幷與精一心法而託之曰。近日事。處分正而是非明。顧不重耶。故特言之。予志汝遵。又親書華陽院額。遣承旨揭之。特命追削拯父子官爵。又撤去先正之稱建院之命。勿復以儒賢待之。及聖考薨。內頒御製。有以書示予意爲題。別爲文字。大意與景廟疏批同。而以爲予深究義理。是非大定。爲予子孫者。須遵此意。堅持勿撓。聖考於此義。大書而不一書之。其憂世道衛斯文之意至矣。而末乃爲貽燕之謨者如此。蓋謂墓文初無訾辱語。而擬書則構捏酷矣。可見拯之背師本不專由於墓文也。且深知先生之爲大賢君子。則背悖先生者皆小人也。明淑慝之別。嚴是非之辨。畢竟處分。光明磊落。可質鬼神而俟百世。先生之道於是乎如日中天。爲世增重矣。自是尼徒之廢斥者。蓄憾伺釁。至辛丑。與己巳餘孼。合勢鴟張。謀危儲宮。士禍大作。先生所謂讒人復起。宗國將亡者。眞如燭照而符契。先生於是被黜道峯。今上乙巳更化。卽復院享。館學及八路儒生。疏請腏享文廟者四十年。至丙子。始準許。又宣旨擧華陽皇祠。特褒先生尊周之義。更加贈上相。此先生百餘年閒與世屈伸之大略也。蓋先生稟剛方正大之姿。有宏偉恢廓之量。靜而凝默。則如喬岳大峙。動而作用。則如洪河赴海。儼然人望而畏之。卽之。和煦之氣薰然襲人。先生眞可謂我東數千年閒氣所鍾也。雖非從事聖學。自是豪傑之人。又就賢師。聞道旣早。門路甚正。以大聰明用困蒙百千之力。如行百里者半九十里。而彌老彌篤。心力果毅。己私之萌。一克便了。故天理常勝。實踐之至。終成大賢地位。自言欲學孔子。當先從朱子學。旣淹通六經四子。則究竟於朱子書。循環熟複。如誦己言。是以。其學一遵朱子程式。以致知爲始。躬行爲終。而敬貫終始。自吾身心性命之奧。人倫日用之常。以及天地鬼神之變。古今治亂之道。莫不精粗俱到。表裏洞然。戒懼愈嚴於不覩聞之時。省察益密於人不知之地。一心謹畏。無貳無雜。隨時隨處。無少閒斷。酬酢萬變。炯然不亂。嘗謂朱子之學不明。故世或誣侮朱子。而亦多黨助之者。世道之害。甚於洪水。若使人人讀朱子書。知朱子義理。邪說自無所售。遂取大全書。隨手箚錄。名曰朱子大全箚疑。大義躍如。微言盡析。粗解文理者。皆可以曉然。誠後學之指南也。又有語類小分,二程全書分類,論孟問義通考。皆切於學者之考覽也。近思釋疑。鄭守夢因沙溪箚錄一冊。裒粹而稍大之。先生修潤成書。心經釋疑。以退溪講錄。承命添删者也。先生言後朱子而著書者。非妄則贅也。是以無意於立言示後。而其續集二十四卷。皆與學者答問經禮者。心性理氣之論。經傳訓詁之說。開發微奧。多前人所未言。而禮則究先後本末之辨。公私常變之節。必主宗榦。大體旣正。無繳繞於支葉之繁。故其說勢順理得。沛然無所窒礙焉。爲文章。雖不屑屑於作者軌轍。多積博發。汪洋浩大。頃刻數千言。如風驟雨集。變化百出。而皆自所學中出來。是蓋韓歐文詞。程朱義理。經緯而成章也。其片言隻字。人皆寶重。翰簡碑版。遍滿國中。羅麗以來。亦莫盛於先生也。居家。事父母極其孝。與兄弟盡其愛。喪則戚易備。祭則誠敬至。夫婦相對如賓。婦人禮髻。童子雙紒。以從華制。朔望。坐正寢。受子孫男女拜。用溫公家儀。諸孫始生。接見如古禮。閨闥之閒。斬斬如治朝。而親愛之意。亦必怡怡如也。處於師友。恩義且篤。沙溪先生之歿。慟之若喪。依勉齋服朱子喪。至朞年。忌日齊素。終身不廢。後以事沙溪者事愼齋。而事淸陰。亦以師道。及其喪。皆伸三月之制。同春則少小同塾。至白首道契。特摯講學論事。大體無殊。生竄死奪。患難相關。每謂父母不同兄弟。至歿。服以加麻。視其子孫。無異骨肉。松厓,滄洲,市南,石湖。亦嘗心與而慟惜其亡。不止爲私好也。權炭翁之疏。歸之赤子心。恒加原恕。李草廬患難時行語。每處之不必疑。俱不替舊誼。其訓誨後進。隨才高下。開導有淺深。誠心誘掖。諄諄不倦。必使知行兩塗無或偏廢。以居處恭執事敬。爲操心之初程。至於讀書次第。必遵程朱遺規。而一以爲己務實爲成法。若見其言論措爲稍涉便宜。則曰此正一種時議自私之說。爲害聖論。甚於異端。必嚴辭斥責。處小人如刀兩斷。不復假饒。而人之有過。或能改遷。則歡然相好。若初不知有過也。事君忠以懇懇。義以方方。弼違補闕。自附於格非責難之義。無閒進退。皆出於憂愛惻怛之心。而尤致意於天理人欲之辨。祛私秉公之道。時可以仕。則雖處以賓師之位。任以明淑之責。不爲泰也。事可以言。則雖姦兇堵立。擬以誅殛之禍。若無覩也。前後出處。惟義與比。城下歸來。永矢邱壑。中閒一出。祇爲見可之義。而大業未半。遽哭遺弓。則遂返初服。雖或有入朝之時。亦欲扶植其一脈大義而已。更無當世之意矣。若其措諸事業。則以尊攘爲第一義。而必以修內爲本。經邦國以節用愛民爲先。淑世道。以距詖息邪爲務。嘗誦董子正誼不謀利。明道不計功之語。而以孟子枉尺直尋。程子第一等讓與別人之訓爲戒。事無小大。義所當爲。不問死生利鈍。如水臨萬仞。無少屈曲。築底洞快。其見嫉於姦邪。不免慘禍固以此。而身後數十年。終使君父覺悟。道以之大享者。其亦以此也夫。夫人韓山李氏。受貞敬眞誥。牧隱先生之後。都事贈參判德泗之女。先先生十三年歿。生一男二女。男四歲而夭。基泰從兄師傅公時瑩之出。先生取而爲子。女長適縣監權惟。次適士人尹搏。側出女爲閔周鏡妻。基泰蔭仕至寺正。卒官同知。孫男殷錫縣監。疇錫校理。茂錫郡守。淳錫縣監。晦錫早歿。一壻。縣監崔星瑞。以鋋司評。以鍇判書。以鎭。女適李寧錫。權出。殷敎,周敎。女適愼命殷,縣監李泰鎭。尹出。閔周鏡有一男三女。男。殷錫生一源。克紹家學。官師傅。漢源,混源,浩源,監役會源。疇錫生有源敎官,久源。茂錫生和源,文源,明源。淳錫生正源,廣源,端源。晦錫生婺源敎官。玄孫以下至五六代孫。總五十餘人。多不盡錄。其仕者。玄孫府使文相,侍直正相,監役後相,司評述相,縣令學相,縣監徵相,能相。皆以學行薦。曾經執義。五世孫煥星。生員壯元副率。主先生祀者。文相子煥世也。校理公文學名世。先生嘗愛重之。先生旣葬。校理公與權先生。裒集遺文。編次年譜。而肅廟戊戌。命刊進文集。婺源又以私刊續集。合爲一百九十一卷。幷年譜五卷。行于世。校理公以行狀託農巖金公昌協。誌文託睡村李公畬。家狀則手自編。半稿而歿。權先生使一源及晦谷申君愈。共足成之。狀誌亦未就。而二公後先皆歿。士林恨惜焉。諸後孫以爲丙子改葬。猶有不利。卽議更遷宅兆。久不食吉。懼體魄靡寧。乃者定厝於淸州東靑川鷹山下壬坐之麓。將以今丁丑十月二十四日移窆焉。上因大臣言。命賜擔夫及葬祭具。又遣官致祭。執義君與煥世。以鳳九爲寒水舊門徒。與聞先生故事。俾成誌文。以及於掩壙之日。噫。先生之德之道。地負海涵。而五十年斯文世道。大義理大是非所係。雖以農睡二公邃學鴻匠。猶且逡巡。顧小子蒙陋。何敢議到。然平日願學之意。私淑於函丈之地者。實在我先生。常以文中子所以稱於夫子者。自誦於心。今於文字之役。亦不敢終辭。謹摭年譜家狀。參以舊聞於師席者。撰次如右。嗚呼。朱子沒。洙泗之道無傳。胡元穢之。王陳豗之。其道旣東。鄭文忠公倡之於麗季。我朝休明。諸賢蔚興。靜菴先生學本明誠。治慕三代。退溪先生沈潛性理。講明經義。至於栗谷先生。本源純粹。言行愷悌。通透乎心性理氣之源。綜錯乎安民濟世之術。沙溪先生篤於踐履。而朱子之遺恨於三禮者。究其常變。靡有餘蘊。皆彰明斯道。得不傳之緖。而惟我先生全體大用之學。憲章朱子。又於諸先生之說。推窮源委。會而通之。此所以集大成而爲百世師也。又竊念天之迫於氣數。將不得不有一亂。則又必生一治之人以擬之。孔朱皆値世衰亂。垂空言而明義理。以當一治。丁丑夷虜之變。亦一亂也。我先生躬逢聖主。咸有一德。繼朱子而明尼父一統之義。使吾東方數千里。不至淪沒於夷狄禽獸之域。亦所謂當一治者也。嗚呼。義理通天下一也。此義也何但止於我東而已。顧今天下腥羶。中州陸沈。若使天下之人。皆能知此義而存諸心。則是亦天下一治也。然而力弱勢局。終不能使此義行之天下。則豈非先生當日之遺憾也耶。敢幷書此。以俟百世之知者焉。

 

송자대전 > 宋子大全續拾遺附錄卷之二 / [墓誌]

                                         

 

 

 

 

 

 

 

<내용>

1779년 정조(正祖) 임금이 직접 碑題[유명조선국좌의정 우암송선생지묘(有明朝鮮國左議政 尤庵宋先生之墓)]를 쓰고 비문을 지어 당나라의 명필인 안진경(安眞卿)의 글자를 집자하여 세운 [우암선생묘표(尤菴先生墓表)] 탁본 單帖으로 첩두에 崔庸齋門下族人孟浩衣 歲在辛亥十一月日의 '今此募集' 이 있다.   <크기> 26×21.8cm


<참고>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묘소, 신도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엔 조선 중기의 학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 선생의 묘소 입구에 있는 신도비 [유명조선국좌의정 우암송선생지묘(有明朝鮮國左議政 尤庵宋先生之墓)]는 1779년 당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직접 비문을 지었고, 글씨는 당나라의 명필인 안진경(安眞卿)의 글자를 집자하였다. 


 송시열 선생은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평생 주자학 연구에 몰두해 율곡 이이의 학통을 잇는 기호학파의 주류였다.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했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에서 사사(賜死)됐다.

 

1694년 갑술옥사 뒤에 신원(伸寃)됐다. 송시열의 위상은 사후에 커져 18세기 정조에 의해 宋子(송자)로 존칭되고 그의 문집이 ‘송자대전’으로 발간되었다. 송시열의 묘는 본래 수원 무봉산에 있다가 1697년(숙종 23)에 이곳(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으로 이장해 안치한 것이다. 묘소 상석 옆에 두 개의 묘비가 서 있고, 앞쪽으로 망주석과 문인석상이 양쪽에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