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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묘갈명(李薰墓碣銘) - 효령대군의 손자[청호공 외손자]

야촌(1) 2010. 8. 27. 05:24

■ 이훈 묘갈명(李薰墓碣銘) - 효령대군의 손자[청호공의 외손자]

     [생졸년] 이훈『李薰, 1447년(세종 30) ~ 1462년(세조 8)』/향년 15歲

 

선조(先祖)의 휘(諱)는 훈(薰)이고, 자(字)는 형지(馨之)이니,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증손(曾孫)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손자이고, 서원군(瑞原君)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인 친의 다섯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의령군부인(宜寧郡夫人) 경주이씨(慶州李氏)로 감사(監司) 희(嘻)의 따님이다.

세종 정묘년(1447 세종 30)에 태어나 세조 임오년(1462 세조 8) 9월 2일에 돌아가니, 시흥 금불암리(始興金佛菴里)의 동북방 언덕 서원군(瑞原君) 묘소 밑에 장례하였다.

 

처음에는 고림정(高林正)을 제수 받았으나, 증손인 직언(直彥)으로 인하여 군(君)으로 추증되니, 계(階)는 정의(正義)이다. 배(配)는 오천현부인 연일정씨(烏川縣夫人延日鄭氏)로 경오년에 태어나 기축년 6월 26일에 돌아갔는데, 부친은 자숙(自淑)이고,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아들은 공산군(㓒山君) 선(璿)이고, 손자로는 장제부정(長堤副正) 원(源)과 흥안부정(興安副正) 팽(彭)과 춘성정(春城正) 담(聃)과 손녀 등 5명이 있다. 손자대로부터 지금까지 14,15세를 내려오는 동안 대대로 큰 벼슬이 끊이질 않았다. 

 

이를 기록한 옛 비석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부러져 마침내 건립 문제를 논의하지 못하다가 원식(元植), 호연(瑚淵), 장춘각(長春珏) 등이 돈영(敦榮)에게 와 상의하니, ‘좋다.’하였고, 일행들이 말하기를, “묘소의 비석에 지를 새겨 좋은 향기를 담아 능곡에 두는 것이 옳다.”하였다. 

 

이에 여러 후손이 마침내 돈을 모아서 새로 돌을 세우며, 돈영((敦榮)에게 그 음기를 부탁하였다.

오호라! 우리 선조들은 역대로 네 임금을 모시었고, 나이가 칠순이 넘도록 국가의 병한이 된 업적이 있고, 가문은 겸손한 관리로서 의로운 행실을 발휘하였다. 

 

옛 비석은 이제 볼 수 없으니, 잠시 선조의 계보를 적어 더하여 알리노니, 옛 비석이 매장된 구덩이 동쪽의 세 조각에 쓰여 있기를, "명선대부(明善大夫) 행(行) 고림정모지묘(高林正某之墓), 신부인(愼夫人) 오천정씨지묘(烏川鄭氏之墓)"라 되어 있는데, 이는 불가한 것으로 사용하지 않음을 후인들은 알라.

 

원식(元植), 호연(瑚淵)은 춘성방(春城房)이고, 장춘각(長春珏)은 공산방(㓒山房)이며, 돈영(敦榮)은 장제방(長堤房)이다. 조선개국 454년 을사년(1846 헌종 12) 2월 일 다시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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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李薰墓碣」

 

先祖諱薰字馨之 太宗大王之曾孫諱補孫兵曹判書諱친五子妣宜寧郡夫人慶州李氏監司諱女 世宗丁卯生世祖壬午九月二日卒葬艮原從瑞原君兆初授高林正以曾孫直彥恩贈君階正義配烏川縣夫人延日鄭氏生於庚午己丑六月二十六日卒父諱自淑郡守子㓒山君璿孫長堤副正源孫興安副正彭孫春城正聃孫女凡五人自孫以降今十四五世世有簮組不盡錄舊有碑歲久劈折迄未議建元植瑚淵長春珏乃謀於敦榮曰穆員曰刻石識墓所以藏馨香俟陵谷是可以已諸遂鳩金鍥新石屬敦榮志其陰嗚呼我先祖歷事四朝壽躋七旬國而屏翰之績家而謙牧之行宜有以發揮而舊碑不槪見姑記先系貤誥表此堂斧舊碑埋于壙東凡三片其刻曰明善大夫行高林正某之墓愼夫人烏川鄭氏之墓是不可不使後人知瑚淵春城房長春珏㓒山房敦榮長堤房也.

 

朝鮮開國四百五十四年(1846년) 乙巳二月 日改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