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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국무총리 자찬 묘비명.

야촌(1) 2018. 7. 15. 00:11

운정 김종필 전 국무총리 묘비명

   (雲庭 金鍾泌 前 國務總理 墓碑銘)
   121 자(字)


「사무사(思無邪)」를 인생(人生)의 도리(道理)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무항산이무항심(無恒産而無恒心)」을 치국(治國)의 근본(根本)으로 삼아 국리민복(國利民福)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구현(具現)하기 위하여 헌신진력(獻身盡力) 하였거늘 만년(晩年)에 이르러 「년구십인지 팔십구비(年九十而知 八十九非)」라고 탄(嘆)하며 수다(數多)한 물음에는 「소이부답(笑而不答)」하던 자(者) - 내조(內助)의 덕(德)을 베풀어준 영세반려(永世伴侶)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명 운정 자찬(銘 雲庭 自撰)
서 청암 고강(書 靑菴 高崗)

 

◇묘비명 풀이
“한 점 허물없는 생각을 평생 삶의 지표로 삼았으며, 나라 다스림 그 마음의 뿌리를 ‘무항산이며 무항심’에 박고 몸 바쳤거늘, 나이 90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제대로 이룬것 없음에 절로 한 숨 짓는데, 숱한 질문에 그저 웃음으로 대답하던 사람, 한 평생 반려자인 고마운 아내와 이곳에 누웠노라”

 

[각주]
◇묘비명 풀이
“한 점 허물없는 생각을 평생 삶의 지표로 삼았으며, 나라 다스림 그 마음의 뿌리를 ‘무항산이며 무항심’에 박고 몸 바쳤거늘, 나이 90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제대로 이룬 것 없음에 절로 한 숨 짓는데, 숱한 질문에 그저 웃음으로 대답하던 사람, 한 평생 반려자인 고마운 아내와 이곳에 누웠노라”

 

◇사무사(思無邪) : 한 점 허물없는 생각
◇무항산이무항심(無恒産而無恒心) :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려움
◇「년구십인지 팔십구비(年九十而知 八十九非)」라고 탄(嘆)하며 : 나이 90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제대로 이

      것없음에 절로 한숨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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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洋)의 동서(東西)와 시대(時代)의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선인(先人)들은 죽음에 이르러 스스로의 일생(一生)을 정리하는 차원(次元)에서 자신의 행적(行跡)을 압축하여 묘비명(墓碑銘)으로 무덤 앞에 적시(摘示)하였다. 한데 해방 후 우리나라 정치인은 물론 유명 인사 중에 자찬 묘비명(自撰 墓碑銘)을 남긴 사람은 운정 김종필 전 총리가 처음이다. 그래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거산 김영삼, 후광 김대중 전 대통령과 운정 김종필 전총리가 타계하여 소위 3김 시대의 인물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3김 중에 가장 고전(古典)에 밝고 문학과 예술에도 식견이 높아 정치적인 격랑 속에서도 고전의 명구를 인용하여 낭만적인 여운을 주신분이다. 그가 자찬으로 묘비명 121자를 남겨 많은 화제가 되고 있다.


언론인 박정호 님과 대학교수 서의호 님의 칼럼을 운정의 자서전에 대한 평으로 첨부한다.
[서소문 포럼] JP의 121자 묘비명
[중앙일보]입력 2018.06.29 01:55]


자기 묘비명 미리 써놓는 건 동양의 오랜 전통‘자기 허물을 돌아보라’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해

박정호 문화·스포츠 담당

흔히 공자(孔子)님 말씀이라고 한다. 너무 당연해 듣기에 거북하지만 시공을 뛰어넘는 보편성이 있다. 그런 공자가 이상형으로 꼽은 이가 있다. 거백옥(蘧伯玉)이다. 중국 춘추시대 공자보다 20~30년 앞서 살다가 갔다.

 

군자(君者)의 뜻을 이룬 선생님이라는 뜻에서 후세 사람들이 ‘성자(成子)’라는 별칭도 붙였다.

중국 고전 중 하나인 『회남자(淮南子)』에 거백옥을 언급한 대목이 있다. ‘(거백옥은) 나이 50을 살았지만, 지난 49년이 헛된 것 같았다’(年五十, 而有四十九年非)고 썼다.

 

요즘 나이 쉰은 팔팔한 청춘이지만 2500여 년 전에는 파파 할아버지였을 것이다.

갑자기 거백옥을 꺼내 든 건 그제 영면에 든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때문이다. JP는 알려진 대로 미리 죽음에 대비했다.

 

아내 박영옥(朴榮玉) 여사가 세상을 떠난 3년 전에 자신의 묘비명 121자를 써두었다.
그 중 ‘아흔 살을 살았지만 지난 89년이 헛됨을 알았다’(年九十, 而知八十九非)라는 구절이 눈에 띈다.

 

거백옥을 패러디한 말이다. 동서양 고전(東西洋 古典)에 해박한 JP의 면모를 보여준다.

평생을 2인자로 살아간 거물 정치인의 회한(悔恨)일 수도 있겠다. JP의 묘비명은 동양고전 모음집 같다.

 

첫머리 ‘사무사’(思無邪·: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는 공자가 『詩經』 300편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이고, 이어지는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은 『맹자(孟子)』의 핵심 가르침이요,

 

마지막 ‘소이부답’(笑而不答·: 웃으며 답하지 않는다)은 술과 달의 시인 이태백(李太白)의 시구(詩句)에 나온다. 한문학자 심경호 고려대 교수는 “공자나 맹자는 기본 중 기본이지만 JP가 거백옥까지 인용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고 했다.

 

자기 묘비명을 준비하는 건 사실 새로운 게 아니다. 옛 선비들은 죽음에 대처하는 한 방식으로 지난 행적을 돌아보는 글을 심심찮게 남겼다. 이른바 자찬 묘비명(自撰 墓碑銘)이다.

 

서양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처럼 생(生)과 사(死)를 동전의 앞뒷면으로 여겼고, 후학들에게 경계의 대상으로 삼게 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균열도 자연스럽게 내비쳤다.

 

일례로 다산(茶山) 정약용은 두 가지 버전의 자찬 묘비명을 남겼다. 묘 안에 넣으려고 쓴 ‘광중본’(壙中本)과 문집에 실을 요량으로 보다 길게 적은 ‘집중본’(集中本)이다.


18년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 마현(馬峴 :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돌아온 다산은 1822년 회갑을 맞아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반추했다.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기세를 폈지만 하늘은 그로써 너를 곱게 다듬었다’라고 적었다.

 

주변 정상배(政商輩)의 공격마저 스스로를 가다듬는 채찍으로 삼은 다산의 품격이 드러난다. 다

산도 젊어서 거백옥을 흠모한 모양이다. ‘거백옥은 49세에 잘못을 알았지만 나는 10년 더 젊으니 더욱 바랄 수가 있네. 이제부터 힘써 큰 허물을 없게 하리’라는 시를 남겼다.

 

자기반성을 목숨처럼 여기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을 실천하는 유학자의 진면목(眞面目)이다.

자찬묘비명에서도 ‘죄를 짓고 후회하면서 보낸 세월이다. 모든 잘못을 거두어 매듭 짓겠다’고 했다.

 

다산은 묘비명을 써놓고도 14년을 더 살았으니 그간의 얼마나 많은 자성(自省)을 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심경호 교수가 올봄에 낸 『내면기행』에는 고려시대(高麗時代)부터 구 한말(舊韓末) 까지 옛사람들의 자찬 묘비명 58편이 소개된다.

 

결국 남는 것은 흙일뿐이라도 자신의 본모습, 조화로운 세상에 다가서려는 선인의 뜻이 담겨 있다.

JP의 묘비명도 그런 오랜 전통(傳統)에서 나왔을 것이다. 문자향(文字香)이 사라진 이 시대 정치와 대비된다.


그렇다고 이를 슬퍼할 생각은 없다. ‘공자 왈 맹자 왈’ 고전 취향이 그리운 건 더욱 아니다.

단 하나, 자기 과오(過誤)를 늘 헤아리는 마음가짐은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건 요즘 나락에 빠진 보수도, 기세 등등 한 진보만의 문제가 아닐 터다.

산업화·민주화 시대의 공과(功過)를 두루 남긴 JP를 넘어서는 길도 그곳에 있을 게 분명하다.

 

운정 김종필의 묘비명을 읽고
서의호 포스택 교수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자서전을 써달라고 부탁했었다.

아버님 어머님의 생애를 대강 알기는 하지만 책으로 적힌 것을 가지고 있고 싶었다.

몸이 불편하셨던 아버님은 열심히 쓰셨지만, 불과 서너 페이지를 쓰시다가 돌아가셨다.

 

결국 아버님 어머님의 생애를 사진과 기억에만 의존하게 되었고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필자는 자서전을 꼭 써야겠다고 늘 벼르고 있다. 그런데 일생을 남기는 묘비명이라는 것도 있다.

자서전을 압축한 한마디나 문장이 묘비명이 아닐까?

3김(金) 시대의 한 축이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별세했다. 결국 모든 사람은 떠난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김 전 총리의 묘비명이 한참 화제가 되고 있다. “한 점 허물없는 생각을 평생 삶의 지표로 삼았으며, 나라 다스림 그 마음의 뿌리를 ‘무항산이면 무항심’에 박고 몸 바쳤거늘, 나이 90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제대로 이룬 것 없음에 절로 한 숨 짓는데, 숱한 질문에 그저 웃음으로 대답하던 사람, 한평생 반려자인 고마운 아내와 이곳에 누웠노라”김 전 총리의 아내사랑은 유별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을 극진히 간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아내사랑이 절절이 배어있는 묘비명이 눈길을 끈다. 그는 국립 현 충원을 거부하고 아내와 함께 고향의 묘지에 묻히고 싶다고 늘 이야기했다고 하고 그의 소원대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5·16 주역으로 권력을 잡아 오랫동안 정권의 제2인자의 자리에 있었고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에는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3김 시대를 이끌며 이 나라 정치계에 오랫동안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그가 떠나면서 보여준 아내 사랑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오랜 기간 권력과 정치의 중심에서 역사의 격변기를 지내온 그가 마지막에 스스로 남긴 자신의 묘비명이기에 더욱 화재를 일으킨다.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어떤 말과 함께 나를 추억하면 좋을까, 또는 어떤 문장으로 자신의 생애를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모두들 묘비명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거장들이 남겼던 묘비명을 한번 둘러본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로 20세기 최고의 작가로 꼽히는 미국 출신의 헤밍웨이는 “일어나지 못해 미안 하오”라고 적었다고 한다.

 

허무주의,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문체로 유명한 그이기에 그다운 묘비명인 듯하다.

그는 문체와 더불어 실제 성격까지 강인하고 거친 부분이 많았다 한다.

그의 묘비 문에서 강인한 헤밍웨이의 성격이 느껴진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지휘자 겸 작곡가 말러의 묘비명은 “내 무덤을 찾아오는 사람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것이고, 모르는 사람은 알 필요가 없다”는 독특한 내용이다.

 

말러는 활동하는 내내 지휘자로 이름을 떨치며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작곡가로는 주목받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그는 늘 자신만만했다고 한다. 말러의 묘비명에서도 그의 자신감을 느낄 수 있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말러 리안’이라는 이름의 마니아층들이 있어서 말러가 보여준 자신감을 증명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필자도 묘비명을 한번 생각해 보기로 했다.

 

가훈으로 늘 읍 조리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다” 또는 “승리자보다는 앞장서는 사람이 되라” 이런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늘 제자들에게, 아이들에게 강조했던 구절이다.

 

그러나 너무 교훈적인 그런 묘비명보다 역시 김 전 총리처럼 아내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을 넣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어떤 구절이 좋을까 좀더 생각해 봐야겠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