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洪翼漢墓碣銘/墓表/墓誌/行狀。

야촌(1) 2018. 5. 6. 19:50

■홍익한 묘갈명(洪翼漢墓碣銘)

    [생졸년] 1586년(선조 19) ~ 1637년(인조 15)』

 

송시열 찬(宋時烈 撰)

 

명(明)나라 숭정(崇禎) 9년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금(金)나라 오랑캐가 (‘청(淸)’이라) 참호(僭號)하고는 몽고(蒙古)를 끼고 와서 우리나라에게 함께 황제로 받들기를 요구하였다.

 

이때 자(字)가 백승(伯升)인 화포(花浦) 홍익한(洪翼漢)공이 장령(掌令)으로 있으면서 상소하기를, “금한(金汗, 청 태종(淸太宗)이 황제를 일컫자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준(李浚)이 ‘하늘에는 두 해가 없다’면서 물리쳤으니, 신은 모르는 사이에 수없이 뛰면서 기뻐하였습니다.

 

신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대명 천자(大明天子)가 있다는 말만 들어왔으니, 오랑캐가 칭제(稱帝)한 후에야 어찌 노중련(魯仲連)처럼 죽어야하겠습니까? 내 귀로는 차마 그런 말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바다 모퉁이에 있으나, 평소 천하에 예의(禮義)의 나라라 알려졌고 열성조(列聖朝)에서 대대로 번신(藩臣)의 직분을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닦아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오랑캐를 받들어 섬기어 혹 잠시 명(命)을 늘리더라도 조종(祖宗)에게 어떻겠으며 천하에는 어떻겠습니까?

 

묘당(廟堂)에서 높은 베개를 베고 깊은 잠을 자면서 군부(君父)가 모욕 당하는 것을 오(吳)ㆍ월(越) 사람처럼 예사로 본다면, 이는 오랑캐가 스스로 황제가 되는 게 아니라 바로 묘당에서 그들로 하여금 황제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그들 사신을 죽이고 그 글을 빼앗아 명나라 조정에 주문(奏聞)해서 오랑캐가 약속을 어기고 참호(僭號)한 죄를 꾸짖게 하면 우리는 할 말을 다하고 형세도 더욱 떨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그대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가상하다. 사신을 죽이는 일은 너무 이른 듯하니, 천천히 보아가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공은 또 화의(和議)를 주장하는 재상을 보면 얼굴을 마주하고 매우 엄히 꾸짖었다.

 

그해 12월에 금나라 오랑캐가 대거 침략하였다. 그때 평양 서윤(平壤庶尹)이 결원이었는데 화의를 주장하는 여러 재상들이 공이 일찍이 ‘오랑캐는 평정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해서 이번에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마침내 차하(差下)하여 떠밀어 보냈다.

 

공은 집으로 달려가 양가(養家) 모부인(母夫人) 이씨(李氏)를 모시고 가족을 이끌고 강도(江都, 강화(江華))로 가서 안돈(安頓)시킨 후 바닷길을 통해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마침내 평양에 이르렀다.

 

이때 적군이 날뛰고 있어 마침내 보산 소성(寶山小城)을 지키려고 민병(民兵)을 모집하면서 의기(義氣)로 격려하였다. 공은 주야로 장벽(障壁)에 올라가 죽음으로써 보답하겠다고 맹세했는데 그 충분(忠憤)의 뜻은 당시 음영(吟詠)한 시(詩)에서 볼 수 있다.

 

그때 행재소(行在所)의 일이 급해 척화인(斥和人)을 오랑캐의 요구에 응해 찾아내는데 공이 맨 먼저였다.

조정에서 오랑캐에게 말하기를, “홍모(洪某)가 평양에 있으니, 마땅히 잡아서 보내겠다.” 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 2월 12일에 도신(道臣, 관찰사)이 유지(諭旨)로 공을 묶어 오랑캐 영(營)으로 보냈는데, 그때 공은 아직 밥을 먹지 않고 있었다.

 

감압관(監押官) 변대중(邊大中)이 기꺼이 포박을 풀어 밥을 먹게 하지 않았는데, 마침 은산 현감(殷山縣監) 이순민(李舜民)이 위로하기 위해 와서 보고는 변대중에게 포박 풀어주기를 청하고, 공 역시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두려워해 도망칠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밥을 먹자마자 즉시 출발하였다.

 

의주(義州)에 이르자, 부윤(府尹) 임경업(林慶業)이 맞이하며 말하기를, “살아서 대의(大義)를 부호(扶護)하고 죽어서 사책(史冊)에 빛나는 것이 참으로 남아의 일이다.” 하고는, 많은 물품을 마련해 주었다.

 

통원보(通遠堡)에 이르자, 호인(胡人) 네 명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한(汗, 청나라 임금의 칭호)의 가인(家人)이다.” 하고는, 공이 굶주린 것을 보고 음식을 주면서 말하기를, “공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끝내 반드시 죽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심양(瀋陽)에 이르기 전에 구경하는 자들이 길을 메우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의사(義士)이니 대명(大明) 천자(天子)가 알면 어찌 가상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하면서 위로해 보냈다.

 

심양에 이르자, 한(汗)이 별관(別館)에 두고는 예관(禮官)을 시켜 연회를 베풀어주고, 조석의 공봉(供奉) 역시 매우 풍성하였다. 예관이 말하기를, “이는 감히 먹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니, 공은 물리치며 말하기를, “이는 예식(禮食)이 아니다.” 하였다.

 

한이 사람을 시켜 묻기를, “너는 무엇 때문에 들어왔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척화(斥和)한 대간(臺諫)으로 붙잡혀 들어왔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척화한 자가 어찌 그대 한 사람에 그치랴?”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망령되이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겠는가?” 하니, 갖은 말로 꾀었다. 공이 용골대(龍骨大)에게 말하기를, “작년 네가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 네 목을 치라고 청한 사람이 바로 나다.” 하니, 용골대 역시 웃으며 갔다.

 

하루는 공이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한이 호위병을 성대히 거느리고 와서 친히 신문(訊問)한다는 말이 들렸다. 공은 식사를 마치고 따라간 창두(蒼頭, 하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후 공의 두 손을 묶고 데려갔다.

 

늘어선 졸개들이 연신 걸음을 재촉해 발이 땅에 닿을 틈도 주지 않았으나 공은 조용히 걸어갔다.

창두가 오랑캐가 노할까 두려워 옆에서 빨리 걸으라고 재촉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 지경에 이르러 어찌 더 무엇을 두려워하랴?” 하였다.

 

공이 뜰에 우뚝 선 것을 본 한이 포박을 풀어주라고 명하고는 말하기를, “왜 꿇어앉지 않느냐?” 하였는데, 이때 여러 호인(胡人)들이 모두 나와 구경하고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이 무릎을 어찌 당신에게 꿇겠소?” 하였다.

 

한이 말하기를, “너는 어찌 약속을 어기고 척화를 했느냐?” 하니, 공이 말하기를, “너희가 이미 우리나라와 형제국(兄弟國)이 되기로 약속해 놓고 도리어 황제를 일컬으며 우리를 신하로 삼으니, 약속을 어긴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가,

 

그대에게 있는가?” 하니, 한이 말이 막혀 한참 후 말하기를, “네가 이미 맨 먼저 척화를 주장했는데 우리군사가 나갔을 때 왜 맞아서 싸우지 않다가 도리어 우리에게 붙잡혀 왔는가?”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주장한 것은 대의(大義)일 뿐, 성패(成敗)와 존망(存亡)은 논할 바가 아니다.

또 우리나라 백성들이 모두 내 뜻을 알게 되면 그대 나라를 섬멸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즉시 옷을 벗고 알몸으로 말하기를, “어서 내 가죽을 벗기라!” 하니, 이는 오랑캐의 형벌이 그랬다.

인하여 붓을 달라고 하여 쓰기를, “대명 조선국(大明朝鮮國)의 붙잡혀 온 신하 홍모(洪某)는 척화한 일에 대해 낱낱이 진술하고자 하나,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감히 글로 써서 알리겠다.

 

대저 사해(四海) 안은 모두 형제가 될 수 있으나 천하에는 두 아비를 둔 아들이 있을 수 없다.

조선은 본래 예의를 숭상하며 간신(諫臣)은 직절(直節)의 풍도가 있어야 한다.

 

작년 봄 마침 언책(言責)의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너희 나라가 장차 맹약을 저버리고 황제를 일컫는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참으로 맹약을 저버리면 이는 패만(悖慢)한 형제요 참으로 황제를 일컫는다면 이는 두 천자(天子)가 있게 된다.

 

집안에 어찌 패만한 형제를 두며 천지 사이에 어찌 두 천자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당신 나라와 조선 사이에는 새로 맺은 교린(交隣)의 약속이 있는데 먼저 저버리고, 대명과 조선 사이에는 전에 보호해준 은혜가 있어 깊게 맺어졌다.

 

깊이 맺어진 큰 은혜를 저버리고 먼저 저버린 공약(空約)을 지키는 일은 이치에 가깝지 않고 사리에도 부당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맨 먼저 척화의 의논을 내어 예의를 지키고자 했으니, 이는 신하의 직분이었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신자(臣子)의 분의(分義)는 마땅히 충효(忠孝)를 다해야 할뿐이다.

 

위에 임금과 어버이가 계시는데 모두 부호(扶護)해서 안전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왕세자(王世子)와 대군이 모두 포로가 되어 있고 노모(老母)의 생사 여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상소 하나를 잘못 올려 나라의 화패(禍敗)를 부르게 했으니, 헤아려 보건대, 충효의 도리가 쓸어버린 듯 없게 되어 스스로 죄를 따져보아도 죽어야지 용서 받아서는 안 된다.

 

비록 만 번 주륙당하더라도 달게 받겠다. 내 피를 북[鼓]에 바르고 혼(魂)이 하늘을 훨훨 날아서 고국으로 돌아가면 상쾌하고 상쾌하겠다. 이밖에는 더 할 말이 없고 오직 속히 죽기만 바랄 뿐이다.” 하였다.

 

한이 화인(華人) 역관(譯官)을 시켜 응답하기를, “어렵도다, 이 사람이여!” 하고는, 인하여 공의 척화소(斥和疏)를 꺼내들고는 말하기를, “내가 황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인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당신은 천조(天朝)의 반적(叛賊)인데 어떻게 황제가 되겠는가?” 하였다.

 

한이 크게 노해 빨리 형살(刑殺)하도록 하니 두 호인이 공을 끌고 나갔는데, 이때가 그해 3월 5일이었다. 공은 총명함이 빼어나고 과감 정직하였다. 효우(孝友)하는 성품이 하늘에서 타고났으며 평소 사기(辭氣)가 격앙(激昻)하여 굴복하는 바가 없었고 매양 고인(古人)이 의(義)를 위해 성인(成仁)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개연히 사모하였다.

 

공은 남양인(南陽人)으로, 시조 홍선행(洪先幸)은 고려 금오위 위별장(金吾衛尉別將)이다.

본조(本朝) 좌찬성(左贊成) 홍숙(洪淑), 감사(監司) 홍서주(洪敍疇), 현감(縣監) 홍애(洪磑), 진사(進士) 홍이성(洪以成)은 각각 공의 고조, 증조, 할아버지와 아버지이다.

 

진사가 안동(安東) 김임(金琳)의 딸에게 장가들어 만력(萬曆) 병술년(丙戌年, 1586년 선조 19년) 11월 22일에 공을 출생하였는데, 백부(伯父) 교위(校尉) 홍대성(洪大成)이 아들로 삼았다.

 

후에 김씨가 전염병에 걸려 졸(卒)하자 공이 천리 길을 달려갔는데, 집안사람들이 모두 막차(幕次)로 나와 붙잡고는 들어가 곡(哭)을 하지 못하게 했다. 공이 그 말을 듣지 않으며 말하기를, “어찌 차마 내가 살고 죽는 것을 따지겠는가?” 하고는, 들어가 곡을 하다 여러 번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했는데, 피눈물이 나와 거의 시력을 잃을 뻔하였다. 양가(養家) 부모를 극진히 정성스럽게 하여 참으로 마음에 기뻐하는 일이 있으면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일찍이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공에게 수업했는데, 월사가 칭찬하기를, “후일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을묘년(乙卯年, 1615년 광해군 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신유년(辛酉年, 1621년 광해군 13년)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했는데 여러 권행(權倖)들이 명단에서 삭제해 버렸다.

 

인조(仁祖)께서 공주(公州)에 거둥하여 정시(庭試)를 시행했는데, 공이 장원하였다.

전적(典籍)ㆍ감찰(監察)ㆍ사서(司書)ㆍ정언(正言)을 걸쳐 병조 정랑과 좌랑을 지냈다.

외임(外任)은 고산 찰방(高山察訪), 고령(高靈)과 부안(扶安) 현감을 지냈다.

 

이보다 앞서 원수(元帥) 강홍립(姜弘立)이 오랑캐에게 투항하여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오랑캐를 이끌고 침입해 와 화의(和議)를 성립하고는 강홍립을 귀국시켰다.

 

공이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그 죄를 극론(極論)하여 죽이기를 청했으니, 집에 있을 때와 조정에서의 행의(行義)와 논의(論議)가 대개 이와 같았다.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 강도(江都)가 함락될 때 공의 후부인(後夫人) 허씨(許氏) 및 아들 홍수원(洪晬元)과 그 아내 이씨(李氏)가 모두 죽고 홍수인(洪晬寅)은 생사를 알지 못했다.

 

이는 허씨가 적을 만나 굽히지 않으니 홍수원이 몸으로 가려 보호하자 적이 어지럽게 칼로 찔러 홍수원이 먼저 죽고 허씨는 물로 뛰어들고 이씨는 자결한 것이었다.

 

공은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쪽으로 갈 때 쓴 가서(家書)에서 효친(孝親) 봉선(奉先)의 도리를 다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심양(瀋陽)에 있을 때 문산(文山, 송(宋)나라 말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의 호)을 이어서 읊은 여러 시작(詩作)을 사림들이 전해가며 외면서 모두 눈물을 흘렸다.

 

임금이 유사(有司)에게 명해 그 집에 월름(月廩)을 주게 하고, 효종(孝宗) 때 공에게 도승지(都承旨)를 추증했으나 허씨 및 홍수원 부부는 정려(旌閭)의 은전을 입지 못해 애석하다. 장보(章甫)들이 평택(平澤)에 사당을 세워 공을 제사 지내고 있다.

 

우리 현종 대왕(顯宗大王)께서 일찍이 공과 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면서 ‘세 사람은 명분이 있는 바여서 스스로 억제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말이 있자, 임금이 “그렇지 않다.

 

그 세 사람은 모두 자신이 한 말을 실천하고 죽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아! 성상의 학문이 고명함은 천고(千古)에 뛰어나다고 하겠다. 공의 계후자(繼後子) 홍응원(洪應元)은 은혜를 입어 벼슬이 직장(直長)에 이르렀다. 공의 전취(前娶)는 정랑(正郞) 구곤원(具坤源)의 딸인데, 홍수원 및 고양 군수(高陽郡守) 정창징(鄭昌徵)의 처는 그 소생이다.

 

허씨(許氏)는 군수(郡守) 허식(許寔)의 딸인데 홍수인 및 사인(士人) 윤세명(尹世鳴), 재령 군수(載寧郡守) 심익선(沈益善)의 처는 그 소생이다. 홍응원이 공과 허씨의 옷과 신발을 평택현(平澤縣) 서쪽 경정리(鯨井里) 손좌 건향(巽坐乾向) 자리에 장례했으며, 구씨의 묘는 양주(楊州) 풍양(豐壤) 건천리(乾川里) 오좌 자향(午坐子向) 자리에 있다.

 

홍응원의 아들은 홍우석(洪禹錫)이요, 세 딸은 허윤(許玧)ㆍ김홍재(金弘載)ㆍ정상문(鄭相文)에게 각각 출가하고, 나머지는 어리다. 고양 군수는 1남 4녀인데 아들 정제현(鄭齊賢)은 숙휘 공주(淑徽公主)에게 장가들어 인평위(寅平尉)에 봉해졌다. 윤세명은 7남 3녀인데, 아들은 윤이형(尹以衡)ㆍ윤이임(尹以任)ㆍ윤이도(尹以道)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재령 군수는 3남 4녀인데, 아들은 심정기(沈廷耆)ㆍ심정로(沈廷老)ㆍ심정구(沈廷耈)이며, 내외(內外) 증손과 현손이 모두 50여 명이다. 아! 우리 동방은 은사(殷師) (기자(箕子)) 이래 예의(禮義)가 밝았으며, 고려 말에 이르러 포은 선생(圃隱先生, 정몽주(鄭夢周))께서 도학(道學)을 창도(唱導)하였다. 본조에 이르러서는 또 점차 낙건(洛建,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말함)의 풍도가 있었기 때문에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법이 집집마다 전해져 사람들이 외고 있다.

 

그러나 대절(大節)에 임하여 빼앗을 수 없는 절조로 능히 한 몸으로 수백 년의 강상(綱常)을 버틴 자는 공처럼 분명하고 뚜렷하게 드러난 자가 있지 않다. 더군다나 허부인 및 이씨 며느리는 지아비를 위해 죽고, 홍수원은 아버지를 위해 죽어 공과 함께 삼강의 중함을 아울러 세웠다.

 

여기에서 또 공의 가범(家範)이 훌륭했음을 볼 수 있어 완악하고 나약한 자를 깨우칠 그 풍도는 천백 세(千百世) 후까지 쇠퇴하지 않을 것이니, 아! 위대하다 하겠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해와 달처럼 밝고 산악(山岳)처럼 높았네. 그 무엇이 그처럼 고명(高明)했나? 화포(花蒲)공의 절의(節義)이네.

 

[각주]

1) 노중련(魯仲連) : 전국 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 사람으로, 진(秦)나라가 칭제(稱帝)하자 적극 반대하다 바다

    로 들어가 숨어살다가 죽었음.

-------------------------------------------------------------------------------------------------------------------------------------

 

[原文]

 

掌令洪公墓碣銘 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兼領經筵宋時烈撰。

 

大明崇禎九年丙子。金奴僭號。挾蒙古以來。要我共尊之爲帝。時花浦洪公諱翼漢。字伯升。以掌令上疏曰。金汗僭帝。義州府尹李浚。能以天無二日。攘而却之。臣不覺曲踊距踊者三百。臣自墮地之初。只聞大明天子而已。自虜稱帝之後。寧有魯連之死。不忍使斯言汚我耳孔也。我國雖僻在海隅。素以禮義聞天下。列聖世修藩職。恪且勤矣。今若奉虜服事。縱延晷刻之命。其於祖宗何。天下何。廟堂高枕熟睡。視君父之受侮。若吳越人之尋常。然則非虜人之自帝。乃廟堂之使之帝也。伏願戮其使而取其書。奏聞天朝。因以責虜背約僭號之罪。則我之說益伸而勢益張矣。上答曰。嘉爾爲國之誠。斬使事似爲太早。徐觀所爲而處之。公又見主和宰相。面叱之甚嚴。其十二月。金虜大擧入寇。時平壤缺庶尹。主和諸宰以公嘗言虜不足平。今可試矣。遂差下迫遣之。公走就家。奉所後母李夫人及家累。安頓于江都。由海道艱關萬死。卒至平壤。時賊兵充斥。遂保寶山小城。召集兵民。激以義氣。公晝夜乘鄣。矢以效死。其忠憤之意。時見於吟詠之間。時行在事急。以斥和人應虜索。公爲首。朝廷謂虜曰。洪某在平壤。當自任所執送。丁丑二月十二日。道臣以諭旨繫公送虜營。時公猶未食。監押官邊大中不肯解縛令食。適殷山縣監李舜民來見慰諭。且請於大中。公亦曰。我非畏死逃命者。公纔食卽發。至義州。則府尹林慶業迎謂曰。生扶大義。死光竹帛。眞男子事也。資送甚備。至通遠堡。有四胡至曰。我汗之家人也。見公飢。饋以物曰。公有何罪。終必不殺矣。未至瀋陽。觀者挾路。或曰此義士也。大明天子知之。寧不聳動嘉尙。迭相慰勉之。旣至。汗置之別館。使其禮官設宴。朝夕供奉亦甚設。禮官曰。此不敢不食。公却之曰。此非禮之食也。汗使問曰。汝何故入來。曰吾以斥和臺諫。被執而來耳。又曰。斥和者豈止汝一人乎。公笑曰。吾豈畏死而妄引他人耶。訹嚇不已。公謂龍骨大曰。去年汝使我國也。請斬汝頭者是我也。龍胡亦笑而去。一日公方食。忽聞汗盛陳兵衛。將親訊之。公食訖。謂從行蒼頭曰。我今日死矣。俄而縛公兩手而去。列卒傳呼不令履地。公步履益從容自如。蒼頭恐虜益怒。亦從傍促之。公曰。到此地頭。寧復懾怯。汗見公庭立屹然。命解縛曰。何不跪。時群胡皆起以觀。公曰。此膝豈可屈於汝乎。汗曰。汝何背約而斥和乎。公曰。爾旣與我國約爲兄弟。而反欲稱帝臣我。背約之責。在我乎。在爾乎。汗辭塞良久曰。汝旣首議斥和。則我軍之出。何不迎擊。反爲我禽乎。公曰。我之所執。大義而已。成敗存亡。非所論也。且使我國臣民皆如我志。則爾之殲滅不難矣。卽解衣裸體曰。速剮我。剮蓋虜刑也。因索筆書之曰。大明朝鮮國縲臣洪某斥和事意。歷歷可陳。而語音不相慣曉。敢以文墨控白。夫四海之內。皆可爲兄弟。而天下無兩父之子矣。朝鮮本以禮義相尙。諫臣惟以直節爲風。故上年春。適受言責之任。聞爾國將渝盟稱帝。心以爲若果渝盟。則是悖兄弟也。若果稱帝。則是二天子也。門庭之內。寧有悖兄弟哉。覆載之間。寧有二天子哉。況爾國之於朝鮮。新有交隣之約而先背之。大明之於朝鮮。舊有字小之恩而深結之。則忘深結之大恩。守先背之空約。於理甚不近。於事甚不當。故首建此議。欲守禮義者。是臣職耳。豈有他哉。但臣子分義。當盡忠孝而已。上有君親。俱不得扶護而全安之。今王世子大君皆爲俘。老母存沒。亦不知。良由一疏之浪陳。以致家國之禍敗。揆諸忠孝之道。掃地蔑蔑矣。自究乃罪。可殺罔赦。雖萬被誅戮。實所甘心。血一釁鼓。魂去飛天。歸遊故國。快哉快哉。此外更無所言。惟願速死速死。汗使華人譯而聽之曰。難矣哉此人也。仍出公斥和疏曰。吾不可爲皇帝耶。公曰。汝乃天朝叛賊。何得爲帝耶。汗大怒。亟使刑殺。二胡取公而去。實是年三月初五日也。公聰明秀發。剛果正直。孝友之性。根於天得。平居辭氣激昂。無所撓屈。每見古人取義成仁。必慨然企慕焉。公南陽人。始祖先幸。高麗金吾衛尉別將。本朝左贊成淑。監司敍疇。縣監磑。進士以成。公之高曾祖及考也。進士娶安東金琳女。以萬曆丙戌十一月廿二日生公。伯父校尉諱大成。取以子之。後金氏卒於染癘。公千里奔往。則家人皆已出次。抱持不欲入哭。公不聽曰。豈忍計我死生。遂入而哭擗。絶而復甦者數。至於淚成血而目幾喪。事其所後。克盡誠心。苟有悅其意者。無不爲也。嘗受業於月沙李公廷龜。月沙稱之曰。異日必爲偉人也。乙卯。捷司馬。辛酉。中謁聖及第。諸權倖拔去。仁祖幸公州設庭試。公爲之魁。歷典籍,監察,司書,正言,兵曹正佐郞。外任則高山察訪,高靈扶安縣監也。先是元帥姜弘立投虜。丁卯。導虜入寇媾成。虜以弘立歸。公正言時。極論其罪請誅之。其居家立朝。行義論議類如此。丁丑江都之陷。公後夫人許氏及子晬元與其妻李氏皆死焉。晬寅未詳存沒。蓋許氏遇賊不屈。晬元以身翼蔽。鋒刃亂下。晬元先死。許氏投水。李氏自刎。公不及知。故北行時有家書。眷眷於孝親奉先之道。在瀋陽繼文山。有吟嘯諸作。士林傳誦。莫不流涕。上命有司月廩其家。孝廟朝贈公都承旨。而惟許氏及晬元夫婦未蒙旌典。惜哉。章甫立祠于平澤以祀公。我顯宗大王嘗語及公及吳達濟,尹集之死。有言三人於名之所在。不能自抑而然矣。上曰。不然。彼三人者。皆踐其言而死。不可謂爲名也。嗚呼。聖學之高明。可謂度越千古矣。公繼後子應元。蒙恩官至直長。公前娶正郞具坤源女。晬元及高陽郡守鄭昌徵妻。其出也。許氏郡守寔女。晬寅及士人尹世鳴,載寧郡守沈益善妻。其出也。應元以公及許氏衣履。葬于平澤縣西鯨井里巽坐乾向之原。具氏墓在楊州豐壤乾川里午坐子向之原。應元男禹錫。三女適許玧,金弘載,鄭相文。餘幼。高陽一男四女。男齊賢尙淑徽公主。封寅平尉。尹世鳴七男三女。男以衡,以任,以道。餘幼。載寧三男四女。男廷耆,廷老,廷耇。內外曾玄摠五十餘人。嗚呼。我東自殷師以來。禮義素明。至于麗季。圃隱先生倡以道學。至于本朝則又駸駸乎洛建之風矣。以故三綱五常之典。家傳而人誦。然至于臨大節而不可奪。能以一身撑拄乎數百年綱常。則未有若公之彰明較著者也。況許夫人及李婦死於夫。晬元死於親。與公並立爲三綱之重。此又可見公化範之懿也。其廉頑立懦之風。固將千百世而不衰也。嗚呼偉哉。銘曰。

日月之昭乎。山岳之崒乎。其孰與之高明乎。夫惟花浦公之節乎。<끝>

 

화포유고 > 花浦先生遺稿卷之五 / 附錄

-------------------------------------------------------------------------------------------------------------------------------------

 

花浦先生墓表 - 李宜顯

 

嗚呼。此惟有明朝鮮國花浦洪先生之墓。先生諱翼漢。字伯升。南陽人。初諱霫。字澤遠。以初諱擢仁祖甲子魁科。後有所避。改以今諱。歷郞署臺閣春坊。贊价朝京師。出宰高靈扶安二縣。丙子。金虜僭號。以使來告。時議將善視之。先生以掌令。抗疏請戮其使。以奏天子。疏報聞。亡何。虜大擧入寇。時奸臣主和議。忌先生在朝。出補平壤庶尹。迫遣之。先生星夜赴官。方諭集民衆爲死守計。會上下城。主是議者。畏淸議害己。欲因是除之。謂先生首先斥和。遂執送虜陣。先生至虜庭。虜主盛設兵衛而見之。先生奮筆書供。辭意凜烈。虜脅使跪。責以背約。先生屹立如山岳。罵之曰。汝與我國約爲兄弟。而反欲臣我。背約之責。在我乎。且汝乃天朝叛賊。何得爲帝。仍解衣投地曰。速剮我。剮虜刑也。虜怒甚。亟使刑人引出。實丁丑三月五日也。得年五十有二。以遺衣冠葬于平澤鯨井里。是時江都亦陷。先生夫人許氏與子晬元夫妻遇賊不屈而死。先生居家。誠孝絶出於人。大本旣立矣。而性又慷慨激昂。每見古人取義成仁之事。輒擊節欣慕。其所樹立。亦可見有素定矣。我國涵囿箕化。倫常之重。夫人能言之。然其臨難抗節。不愧平素者。亦頗鮮覯。至於以下國一陪臣。爲天王立慬。刀鋸在前。視若茶飯。如先生之爲者。求之前古。絶未有焉。斯豈非天篤降生。表正大義。以扶樹民彝於無窮也耶。嗚呼盛哉。始朝廷贈先生都承旨。後加贈吏曹判書。用臨患不忘國以正服之二法。諡以忠正。立祠南漢。錫號顯節。平澤亦立祠。號褒義。又以儒疏。超贈領議政。先生遺宅在漢師崇禮門外。爲立四牓於其門。朱而書之。先生以忠。晬元以孝。許夫人晬元妻以烈。一門之內。三綱並列。道路爲之瞻聳。肅廟幸溫泉。特遣官祭先生墓。又製三學士詩。以示崇節奬忠之意。三學士者。指先生與尹學士集,吳學士達濟而言。二學士亦同先生死義故也。先生有文集五卷行于世。尤菴宋文正公爲先生立傳。又撰集序與墓碣。碣久未竪。士林惋歎。先生孫僉正禹錫慨然鳩財。刻而竪之。前有先生外孫沈廷耆所記小表。今已漫滅。不可見。僉正又謀改竪。使宜顯略識事行以眎後。宜顯卽先生女壻郡守鄭公之外孫。追念自出。不敢辭。亦以托名是石爲榮。謹記之如右。若其族出子姓。已具於碣。此不復著云。

 

 

도곡집 > 陶谷集卷之十九 / 墓表

-------------------------------------------------------------------------------------------------------------------------------------

 

花浦洪忠正公墓誌 - 李縡(이재)

 

嗚呼。此大明忠臣花浦洪忠正公諱翼漢字伯升衣冠所藏之地也。夫棺槨所以掩形也。墓所以藏棺槨也。無其形而爲之墓。不亦虛乎。然氣魄固不可得以埋。而亦無所不之。衣冠者。形之所親而氣之所依。則又不可以無葬。葬而誌禮也。旣有葬則惡得無誌。此公嗣孫禹錫之嘗屬縡爲文者也。誌曰。公南陽人。初諱霫。高麗金吾衛尉先幸其鼻祖。而有左贊成諡莊僖淑。顯於我中宗朝。是生觀察使叙疇。於公爲曾祖。祖諱磑縣監。考諱以成進士。有文行。妣金氏承旨彥沈之孫。公生於萬曆丙戌十一月二十二日。其伯父秉節校尉大成取以爲後。乙卯生員。甲子仁祖南狩至公州。庭試多士。公爲壯元。歷成均館典籍,司憲府監察,世子司書,司諫院正言,兵曹佐郞正郞。於外爲高靈,扶安縣監,高山察訪。以書狀官航海朝天。其爲正言時。極論叛賊姜弘立導虜犯順之罪請誅之。不報。丙子爲司憲府掌令。時虜僭號。遣使來。要我共蒙古尊之爲帝。公痛哭上疏曰。臣自墮地之初。只聞有大明天子耳。寧有魯連之死。不忍使斯言汙耳孔也。我東素稱禮義之國。天下謂之小中華。而列聖世修藩職。事大一心。恪且勤矣。今奉虜而臣之。縱延晷刻之命。其於祖宗何。天下後世何。臣未知處廟堂者何人。而高枕熟睡。君父受侮。視若尋常。然則虜人之稱帝。非虜人自帝。實廟堂使之也。臣謂宜戮其使而取其書。聞于皇朝。速下哀痛之敎。檄召八方之士。諭以大義。則滅虜之期。可指日也。不納。崔鳴吉乞送小譯於瀋陽。以探賊情。意欲潛通和好也。公引義面責之。鳴吉大慚恨。先是公之兄翼亨隱于小白山下。公有書云欲挈家爲老年相依計。蓋已有蹈海之志矣。是冬虜復入寇。上幸南漢。鳴吉言首斥和議者洪某也。可使禦敵。遂除平壤庶尹。趣之官。時寇迫路阻。公奉母置江都。從海路西下。及到平壤。賊已充斥。入保寶山城。招諭兵民。流散還集。莫不以死守爲心。旣而鳴吉等執送斥和人於虜。以公爲首。令道臣執公于任所送虜營。時丁丑二月十二日也。公聞命疾行。至義州。林慶業爲府尹。迎謂曰明公此行。眞男子事也。身扶大義。名光竹帛。死亦何恨。及渡江。路上羣胡見公械繫以去。莫不嘖嘖稱歎曰此義士也。至或有勞慰之者。至瀋陽。汗置于別舘。供饋甚盛。公却而不食曰。此非禮之食也。其將龍骨大使問曰。汝何故入來。公曰吾以斥和臺諫。被執而來耳。曰斥和者豈獨汝一人乎。公笑曰吾有一死而已。豈誣引他人耶。又謂龍胡曰去年汝之來我邦也。上疏請斬汝頭者我也。龍胡亦笑而去。公自在亂中。遠念家國存亡。忠憤激烈。往往見於吟咏之間。至是又有一律。辭意悲壯。聞者爲之下淚。三月五日。汗盛其兵衛將訊公。公方食聞之。顔色自若。食訖卽縛。公兩手以前。促迫甚急。而公步履益安徐。屹然立庭下。汗命解其縛。謂曰胡不跪。公曰此膝豈屈於汝耶。羣胡起立聳觀。汗曰汝之先背盟而斥和。使二國成釁何也。公曰先背盟之失。在汝乎在我乎。汗無以對。良久曰汝旣首先斥和則大軍之來。何不迎擊。反爲我禽乎。公曰我之所執。大義而已。成敗非可論也。且使我國臣民一如我志則爾亡無日矣。卽解衣投地曰。聞爾國刑人必剮。何不速剮我。仍索筆書之曰。大明朝鮮國縲臣洪翼漢。斥和事意。歷歷可陳。而語音不相慣曉。當以文墨控白焉。夫四海之內。皆可爲兄弟。而天下無兩父之子矣。朝鮮本以禮義相尙。諫臣惟以直截爲風。故上年春適受言責之任。聞爾國將渝盟稱帝。心以爲若果渝盟則是悖兄弟也。若果稱帝則是二天子也。門庭之內。寧有悖兄弟哉。覆載之間。寧有二天子哉。况爾國之於朝鮮。新有交隣之約而先背之。大明之於朝鮮。舊有字小之恩而深結之。忘深結之大恩。守先背之空約。於理甚不近。於事甚不當。故首建此議。欲守禮義者。是臣職耳。豈有他哉。但臣子分義。當盡忠孝而已。上有君親。俱不得扶護而全安之。今王世子大君皆爲俘。老母存歿亦不知。良由一疏之浪陳。以致家國之禍敗。揆諸忠孝之道。埽地蔑蔑矣。自究乃罪。可殺罔赦。雖萬被誅戮。實所甘心。血一釁鼓。魂去飛天。歸遊故國。快哉快哉。此外更無所言。惟願速死速死。汗使華人譯而聽之。歎曰難矣哉。此人也。仍出示公斥和疏曰。吾不可爲皇帝耶。公曰汝乃天朝叛賊。何爲得帝也。汗大怒。令二胡扶而出。蓋其刑人者也。拘公蒼頭於別舘。使不知其處。後以鞍馬衣衾幷還之。公死時年五十二。昭顯世子方在瀋。命以衣帛招魂而送焉。時公闔門遇禍。而獨母夫人無恙。而公不能知矣。嗚呼。人皆有一死。而死或輕於鴻毛重於泰山者。惟所遇不同耳。若公者以海外偏邦之一陪臣。爲天子守節而死。不獨使吾邦禮義之風永有辭於天下後世。抑亦孔朱以來春秋大一統之旨。賴公而益明。韓愈氏所謂崒乎泰山不足爲高者。非斯之謂歟。孝廟嘗除翼亨敎官而不就。足不出山門。酒後每痛哭。仍晦迹以終身。天地間正氣。可謂萃於公門矣。公之配許氏。遇賊於江都。子晬元以身翼蔽。死於賊鋒。晬元元配具氏出也。許氏自投水。晬元妻李氏亦自刎於晬元之傍。朝廷幷旌其門閭。嗚呼烈哉。公累贈至議政府領議政。肅廟爲作哀三學士詩。其幸溫泉也。特遣官祭公之墓。墓在平澤縣西鯨井里先兆。許氏祔。章甫建祠於其下而祀焉。今上乙卯特賜春秋祭需于家。公以翼亨子應元爲子。直長禹錫其男。敦寧府都正。都正之子澍又無嗣。繼子曰侃。侃翼亨之玄孫。方爲參奉。內外子孫不能記。銘曰。

天高日昭亘萬世也。有踐斯墳無人心者。

 

도암집 > 陶菴先生集卷四十 / 墓誌[一]

-------------------------------------------------------------------------------------------------------------------------------------

 

行狀 - 未詳

 

公諱翼漢字伯升。號花浦姓洪氏。系出南陽。始祖諱先幸。金吾衛尉別將同正。是生檢校將軍諱叔。是生衛尉主簿同正諱光呂。是生尙衣院直長同正諱淳。是生大官署令諱儒。是生禮賓寺丞同正諱之瑞。是生工曹典書諱德義。是生知善州事諱子儆。是生同知中樞院事諱益生。是生大護軍諱貴演。是生左贊成諱淑。是生監司諱叙疇。是公曾祖也。祖諱磑縣監。考諱以成成均進士。妣安東金氏。生員諱琳之女。公以萬曆丙戌十一月二十二日壬子生。及十五歲。公伯父秉節校尉諱大成。娶星州李氏諱宣之女。無后。取以子之。公自幼聦明秀發。逈異凡兒。孝友忠信。根於天性。平居甞以讀書爲業。經史子集。過目輒記。剛果正直。辭氣卓犖激昂慷慨。無所撓避。每覽古史。有以節義死者。必儀形而景仰。頗有擔當底意思。容貌端肅。望之儼然。自一家內書籍几案。以至庭除卉木。方列整齊。一切浮華之習不喜也。平生不妄交遊。及出而仕。絶無要路迹。見人有非義。卽斬然無少假借。而至其待人接物。一以誠信。人無不敬憚而心服之。內行純備。尤謹於追遠。丙午正月。遭秉節校尉公喪。戊申三月。又遭進士公喪。廬居執禮。前後俱至。己未三月。金氏大夫人以癘患卒于榮川地。聞訃奔往。則一家兄弟已出他所。相與抱持痛哭。仍欲入哭殯側。諸兄弟以爲千里奔馳之餘。若遘疾必死。涕泣挽止。使不得入。公曰吾以出繼故。不得侍在膝下。疾而不親甞藥。歿而不親襲斂。吾卽天地間一罪人也。豈忍顧念死生。不卽入哭。少伸至痛乎。仍奔入殯前。哭擗無數。絶而復甦者數。至於淚成血而染衣襟。左眼幾乎失明。視物不如前。喪制將畢。以其聞訃日。從通典盡其月日之文。追服其服。別搆告辭設奠。除服而歸。其顔色之慼。血泣之哀。人到今稱之。進士公臨終。欲甞白魚而終不得進。故平生不忍食。至於大忌。哀毁亦過。血淚斑衣。誠孝之超倫。一家人莫不感歎。奉慈母以孝。惟以承顔順志爲之本。居窮守約。甘旨無闕。苟其悅親之心者。雖鄙事亦能之。晨昏定省。未甞一日或曠也。酒戶甚大。最所嗜好。而其在膝下。未敢㘅杯。盖以大夫人惡旨故也。甞受業於月沙李相公之門。相公亟稱之曰。異日爲偉器者。未必非此人也。其見重於先輩如此。昏朝政亂。科取不公。公於辛酉。中謁聖。見拔於主試者。人皆爲公惜之。公則夷然不少介。乙卯公年三十。捷司馬第二。仁廟改玉之元年甲子夏。擢公州庭試文科壯元。例授成均館典籍。移司憲府監察。七月。以請誥命冕服事。充書狀官。偕李德泂,吳䎘。航海朝京師。時禮部尙書林堯兪等立異毛帥。移怒本國。不許准封。事機遅滯。幾且不諧。公再三呈文。竭力竣事。事之終始。皆公之力也。翌年夏四月還朝。冬至使權晵先。已搆誣一行。至是獻納權濤等啓以員役留置。罪當削奪。上卽允之。未幾敎曰。奏請使臣等。竭力完事之誠。將命越海之勞。不可不酬。盡還其告身。叙爲世子侍講院司書,司諫院正言,兵曹佐郞,正郞。旋補高靈縣。丁卯。聞姜弘立投降虜庭。引誘犯境。遂發兵倍日幷行。未及都城。朝廷已議和矣。乃痛哭而還。戊辰春遆歸。秋除高山察訪。以親病不赴。尋拜兵曹正郞,司諫院正言。陳䟽請治弘立附賊之罪。以快神人之憤。朝野多之。歷成均館直講司藝兵曹正郞。庚午。爲養出爲扶安縣監。翌年罷歸。又拜兵曹正郞。以病遆歸江華別舍。養閑數年。丙子春。拜司憲府掌令。兼春秋館編修官。時金虜以僭號事來。公首議斥絶。抗䟽極言請斬胡差。奏聞天朝。辭意激烈。上優批以答。崔鳴吉力主和議。請送小譯于瀋陽。以探賊情。實欲更通和好也。公以大義面斥鳴吉。鳴吉由是深忌之。是年十二月十三日。虜警猝急。大駕定出幸之策。鳴吉言于體察使金瑬曰。洪某首匪和議。以致賊騎之充斥。若非此人。孰肯置身於賊路乎。仍首擬平壤庶尹。除授促行。人多吊公。而公則以徇國死敵爲心。略無幾微色。聞者嗟異之。十四日。肅謝出城。賊兵已迫弘濟橋矣。奉母夫人。寄寓于江華之磨尼山。仍告行分司由喬桐走海西。單騎虎穴。萬死一生。二十有餘日。始達平壤寶山城。城中自金自點之敗。人心洶洶。一時潰亂。凡百械具。無不罅漏。公至之日。遂馳檄喩之曰。日於寇深之初。本府以空官。衆無所統。失其依歸。哀我蒼生。偏被兵禍。至如府屬各項僕隷將官衙兵之類。同時星離。竄身迷方。實非背公。情勢固然。孑遺殘命。顚沛何處。撫念至此。愍惻曷極。目今庶尹來莅職事。則衆可謂不爲無長矣。其各將父母挈妻子。劃卽來赴務相完聚。俾無後悔。且聞帥府逃散軍兵。幾盡還家云。身旣犯律。决難自便。唯當改心易慮。舍舊圖新。覘賊形勢。或躡後追擊。夜硏營壘。或折䤋執俘。期樹將來之績。永掩已往之眚。我言不誣。咸聽勉旃。於是人心稍定。士氣思奮。爭相來集。恃公爲安。公悉心籌度。夜以繼日。守備之方。各有條理。一城之中。賴以得全。公西來之後。寄在孤城。家國存亡。渺無憑聞。思君戀親之懷。一於詩發之。以宣其不平。語多悲惋。朝廷用主和者計。執送斥和臣三人。公首與焉。平安都事田闢因諭旨。令甑山縣令邊大中。械繫公于平壤豆里島。送諸金汗營聽命。實崇禎丁丑二月十二日也。是日公猶不食。申告乞解縛。大中不聽。俄有殷山縣監李舜民從外來。慰藉甚至。公曰。國事至此。螻蟻殘命。不足論也。但我雖無狀。豈畏一死。况有君命。逃將焉往。乞緩我縛。使食登途。舜民仍勉諭釋縛。食訖。夜將二更。渡江而西。窮晨疾行。五日而到義州。府尹林慶業迎公入座曰。國事至此。夫復何言。明公此行。眞男子事也。生旣能扶大義。死可以光竹帛。雖死有何所恨。公答曰。由我一䟽。國事大誤。奚暇論其餘。死固不足惜。仍請亟往。毋使君命稽滯。慶業問公行資。無不辦治。以彌串僉使張超押送之。行至通遠堡。有四胡人來問繫頸遠來之由。具道所以然。胡人曰。我是汗之家人也。公今遠來。想必飢乏。仍解槖出食物饋之曰。公有何罪。到瀋陽。汗應卽釋而還。雖以蠢然之性。猶知感公之節義如此云。二十五日。始到瀋陽。道路所經。俘獲人畜。繦屬不絶。見一槖駞背上。置尙瑞院寶匣。不勝悲慘。垂涕不已。傍人莫曉其意。惟慰諭而已。華人爲假㺚者看公係累。問其所以。輒嗟惜曰。公眞忠臣也。若使大明天子知之。寧不聳動激勵。男兒至此。死亦有光。在公何恨。公眞忠臣也。迭相慰勉之。汗囚公于別館。使禮部博士官來設宴。朝夕所供。必盛具以進。謂曰。皇帝所送。不可不食。公曰。吾只有一死而已。豈可食無禮之食乎。終不受。龍胡又使譯人傳言曰。汝何故人來。公曰。吾以斥和首唱㙜諫。被執而來。龍胡曰。汝國朝官最多斥和者。豈獨汝一人乎。公笑曰。吾雖至此。豈畏死而諉他人者哉。龍胡再三詰之曰。汝外必有他人。勿諱直告。公曰。上年春。汝之往我國也。陳䟽請斬汝首者。獨吾一人。龍胡亦笑而去。三月初五日。汗盛其兵衛。招公以入。公方食。顔色自若。進食如常。顧謂從行蒼頭曰。汗必戮辱我。我志旣定。今日我死矣。俄而列卒傳呼催入甚急。遂繫公兩手而迫促之。公步履雍容。無少動其心。蒼頭恐其益怒。亦從傍促之。公笑曰。男子到此。當從容就死。何必聞其命而有汲汲者乎。及至庭前。屹然特立。左右羣胡皆起立。汗卽命解其縛。謂曰何不跪而倨傲若是。公曰。此膝豈可屈於汝乎。汗曰汝何先背盟而抗䟽斥和。使二國成釁乎。公曰。爾國與我國。旣約爲兄弟。而反欲稱帝。先背之失。在於汝乎。在於我乎。汗辭屈。良久曰汝旣首議斥和。則其志必欲殲滅我類。而大軍之來。何不迎擊。反爲我所擒。窮蹙若此乎。公曰。我之所爭者。只大義而已。成敗存亡。不須論也。若使我國臣民。一如我志。則爾國之亡無日矣。卽解衣投地曰。聞爾國刑殺。必臠咼云。何不速臠我。仍索筆書示曰。大明朝鮮國縲臣洪翼漢斥和事意。歷歷可陳。而語音不相慣曉。當以文墨控白焉。夫四海之內。皆可爲兄弟。而天下無兩父之子矣。朝鮮本以禮義相尙。諫臣惟以直截爲風。故上年春。適受言責之任。聞爾國將渝盟稱帝。心以爲若果渝盟。則是悖兄弟也。若果稱帝。則是二天子也。門庭之內。寧有悖兄弟哉。覆載之間。寧有二天子哉。况爾國之於朝鮮。新有交隣之約而先背之。大明之於朝鮮。舊有字小之恩而深結之。則忘深結之大恩。守先背之空約。於理甚不近。於事甚不當。故首建此議。欲守禮義者。是臣職耳。豈有他哉。但臣子分義。當盡忠孝而已。上有君親。俱不得扶護而全安之。今王世子大君皆爲俘。老母存歿亦不知。良由一䟽之浪陳。以致家國之禍敗。揆諸忠孝之道。掃地蔑蔑矣。自究乃罪。可殺罔赦。雖萬被誅戮。實所甘心。血一釁鼓。魂去飛天。歸遊故國。快哉快哉。此外更無所言。惟願速死速死。汗使解字漢人翻釋而聽之。顧謂左右曰難矣哉此人也。仍出示公斥和䟽曰吾豈不可爲皇帝耶。公曰。汝乃天朝叛賊。豈可爲皇帝也。汗大怒。令二胡扶公兩腋而出。二胡乃其國刑人者云。斥逐其蒼頭。拘之別舘。使不得審其所處。後以鞍馬衣衾等物。付譯人金汝亮。並與蒼頭而還之。盖公抗賊之書。卽張超所傳。亦公之蒼頭終始不離。收得公日記。且自目擊而悉傳其梗槪。故詳聞顚末。而至於假㺚輩。又多服公之義。爲我人道其事大抵皆如此云爾。江都之敗。公之長子晬元奉公大夫人李氏及繼室許氏。自磨尼山。將轉入喬桐。達夜扶携。纔到浦口。天未曙而虜已迫矣。晬元見許氏終始不屈。鋒刃將及。輒以身翼而代之。如是者再三。衆鏑攢體。竟至命殞。其妻韓山,李氏亦自刎死其傍。許氏又自投於水。隨潮遠沒。終不得收其體。乃正月二十五日也。次子晬寅前一日。已遇害於磨尼山矣。惟大夫人及幼稚末女。俱以老弱獲免矣。公皆未及聞知。而北行到宣川日。寄書二子。眷眷於一家之存沒。重以後事戒之曰。汝等勿以我爲念。惟侍老親與汝母。終始保全。無使我絶嗣。盖於此時公始聞江都之敗。而未知一家已被賊害。有此書耳。噫。公之所樹立。旣如彼卓卓。一門死者凡幾人。而又如是烈烈。而適會其時強近之親。落在遐鄕。未卽聞知朝廷。而竟使泯沒無傳焉。此尤痛哭處也。朝家特用恩典。月給大夫人廩料終其身。並及其女。大夫人李氏痛公之無嗣。取公之長兄翼亨子應元。以爲後。先是以一衣招復。許氏於江都。又以昭顯世子在瀋中。匹帛嘷復。並藏於篋笥。時復摩挲。痛哭不懈。惟望公之生還。不忍以是葬之。年至九十而終。日復待之猶未已。故在大夫人時。不敢虛窆矣。孝廟特命錄用其子孫。又仍筵臣金始振陳白。命贈公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兼帶具焉。崇禎丁丑後十七年癸巳。嗣子應元乃以嘷復衣冠。合葬公及許氏于平澤縣西鯨井里公之先府君墓左巽坐乾向之原。以三月初五日爲諱辰焉。傍邑士子又建祠于墓下。公爲文。淸健警敏。專以志氣爲尙。雖連篇累牘。得意放筆。若已經意者然。平生所著述。不知其幾千篇。而兵燹之餘。散軼殆盡。惟詩賦表散文若干篇。及航海錄,斥和䟽,西征北行日記存焉耳。其一句一字。罔非忠義之發。而至如瀋陽踏靑日一律。人到今傳誦而至有墮淚者云。皆別錄而藏于家。公享年五十有二。公前娶綾城具氏。正郞坤源女。以萬曆丁亥十一月初二日生。甲寅十一月初九日卒。享年二十八。卜葬于楊州豐壤縣乾川里花踰谷午坐子向之原。有一男一女。後娶陽川許氏。郡守寔女。以萬曆丁酉三月二十四日生。丁丑正月二十五日。卒于江華。享年四十一。懿行淑德。貞順孝慈。出於天性。而愛育前室子。猶己所出。及遭賊變。竟至自决。其貞烈之操。早已著矣。有一男二女。男長晬元娶縣監李穫女。無后而俱歿於江都。次晬寅遇害而夭。嗣子應元直長。郡守鄭昌徵,士人尹世鳴,郡守沈益善其婿也。應元娶士人沈光濂女。有一男四女。男禹錫娶縣監尹以宣女。女長適進士許玧。生一男一女。次適金弘載。生一女。次適鄭相吉。生一女。次幼。鄭昌徵有一男四女。男齊賢尙淑徽公主。封寅平尉。蚤夭。有一男台一娶都事李光夏女。女長適佐郞李世白。有一男四女。女長適權尙明。生一男。次適洪德普。餘幼。次適任鎭元。早歿無后。次適李文佐。生一男。次適李秀實。生一女。尹世鳴有七男三女。男長以衡娶士人尹相甲女。生二女。次以任娶士人申羽宣女。生二男。次以道娶士人任㫜之女。生一女。女長適沈昌老。生一男。次適李叙道。餘幼。沈益善有三男四女。男長廷耆娶宗室海原君健女。生一男。次廷老娶判官黃震耉女。生一女。次廷耉娶弼善韓縝女。女長適參奉李泳。生一男二女。次適黃夏民。次適趙泰采。餘幼。內外曾玄孫並五十餘人。<끝>

 

화포유고 > 花浦先生遺稿卷之五 / 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