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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창 묘갈명(李慶昌墓碣銘) - 文義李氏

야촌(1) 2018. 5. 4. 23:23

이경창(李慶昌)

 

◇문의이씨(文義李氏)는 충청북도 청원군(淸原郡) 문의면(文義面)이 관향이다.

◇생졸년 : 1554년(명종 9) ~ 1627년(인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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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창(李慶昌)의 묘갈명(墓碣銘)

 

엄집(嚴緝) 찬(撰)

 

송도(松都)에 고(故) 처사(處士) 이씨(李氏)로 휘(諱) 경창(慶昌)이란 분이 있었는데, 자(字)는 언급(彦及)이고, 호(號)는 서촌(西村)이니, 그 선대는 문의현(文義縣) 사람이다. 증조 휘 세남(世柟)이 억울한 죄를 입고 개성부로 귀양을 와서 자손들이 그대로 눌러 살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휘는 현동(顯東)이고, 아버지의 휘는 양(揚)인데 대대로 유술(儒術=儒道)을 업(業)으로 삼아 행의(行誼)가 독후(篤厚)하여 선비의 가풍(家風)이 있다고 일컬어졌다. 어머니 비인 한씨(庇仁韓氏)는 한흠종(韓欽從)의 딸인데, 가정(嘉靖) 갑인년(甲寅年, 1554년 명종 9년) 4월 초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민(聰敏)함이 절륜하였고, 조금 말을 알아듣게 되자 아버지가 매일 밤이면 안고 누워서 문자(文字)를 구술(口述)해 주었다가 이튿날 아침 시험 삼아 물어보면 하나도 틀리지 않고 암기해 외웠다.

 

8세에 비로소 공의 아버지가 《소학(小學)》을 가르치면서 경계하기를, “이는 어린아이들의 학문이니, 배워서 장차 행하여야 한다.” 하니, 공은 공경히 배워서 그 가르침을 따라 행하여 응대(應對)와 진퇴(進退)를 조금도 방만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았다.

 

9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슬피 곡읍(哭泣)하여 이웃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백형(伯兄)을 따라 무덤 옆에서 시묘를 살면서 몸소 궤전(饋奠)을 받드는 것이 어른 같았다. 12세에 외조부 한공(韓公)에게 가서 공부하였는데, 문사(文詞)를 일삼지 않고 이미 구도(求道)하는 뜻을 두었다.

 

17세에 어머니 상(喪)을 당해 여묘(廬墓) 3년을 살면서 몸을 상해 거의 죽을 뻔하였다. 공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선생보다 60여년 늦게 태어났는데, 일찍이 개탄하기를, “내가 늦게 태어나서 선생에게 친히 배우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참으로 선생의 학문을 배우고 선생의 도(道)를 행한다면 선생은 바로 내 스승이 되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개성부 서쪽 십천교(十川橋) 남쪽에다 정사(精舍) 몇 간을 짓고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경전(經傳)과 성리학(性理學)의 여러 책들이 집에 가득하여 그 책들을 관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만년에 《주역(周易)》을 좋아하여 더욱 공부하며 자득(自得)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 반복 침잠(沈潛)하기를 몇 년 동안 하자, 하루아침에 묵연(默然)히 일원만수(一原萬殊)의 이치를 깨닫게 되어 그 설(說)을 책으로 지었으니, 원리기설(原理氣說)ㆍ천인설(天人說)ㆍ주천도설(周天圖說)로 대개 《주역》에 근본하고 선유(先儒)의 논설을 참고해서 참으로 정묘함을 천명(闡明)한 것이다.

 

또 괘효통례(卦爻通例) 역시 역학(易學)의 요결(要訣)이며, 선기옥형(璇璣玉衡)의 제도는 세상에서 그 뜻을 이해한 자가 드물었는데, 공은 옛 법을 미루어 연구하여 기기(器機)를 창조해서 천체(天體)의 운행을 시험하니, 해와 달의 지속(遲速)과 별자리 등이 모두 합치하지 않음이 없었다.

 

만력(萬曆) 중년에 중국 사신(使臣)이 개성부를 지나갈 때 부에 사는 유생이 공의 글 몇 편을 사신에게 보이자, 고 상사(高上使)가 보고는 기이하게 여기어 주 부사(朱副使)에게 이르기를, “이는 속된 선비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치에 통한 사람이다.” 하면서 서로 탄복해 마지않았다.

 

포저(浦渚) 조익(趙翼)과 잠곡(潛谷) 김육(金堉) 두 상공(相公)이 일찍이 개성 윤(開城尹)을 지내면서 그의 문집을 가져다 보고는, 매양 선비들을 만나면 번번이 공의 경술(經術)과 행의(行誼)를 칭찬하고 마땅히 향(鄕)에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하였다.

 

공은 시정(市井)의 고을에서 출생하여 사우(師友)의 도움이 없었는데도 능히 스스로 분발해 힘써 배워 크게 성취하여 성경(誠敬)으로써 마음을 보존하고 예법(禮法)으로 몸을 단속하였다.

 

평소 생활하면서 종일 정좌(正坐)하고 앉아있어 엄연(儼然)하기가 마치 소상(塑像) 같다가도 사람을 접대할 때에는 화기애애하였다. 공은 일찍 부모를 여의었는데, 거상(居喪)에 슬픔을 다하고 제사에는 정성을 다하면서 모든 의절(儀節)은 한결 같이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따라 정리와 의식을 두 가지 다 지극히 하였으므로, 향리에서 그 덕에 감화되어 성심으로 존경하여 믿고, 혹시 의심나는 예나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번번이 공에게 와서 질정(質正)하였다.

 

공은 만년에 병이 나서 오랫동안 낫지 않자 홀연히 베개를 어루만지며 탄식하기를, “생사에 순응하여 편안히 여겨야지 어찌 한탄하랴? 안회(顔回)는 단명하였고, 백이(伯夷)는 굶어죽었다. 나는 이제 얻은 바가 이미 많다.” 하고는 인하여 자신을 경계하는 글을 지어 평생의 일을 서술하였다.

 

또 훈계서(訓誡書)를 지어 자손을 면려하였는데, 글자마다 경계하는 뜻이 볼만하였다.

그 후 10여 년 동안 오래 병상에 누워서 지내다가 천계(天啓)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 8월 23일에 공은 장차 명이 다할 것을 알고는 따뜻한 물을 가져다가 목욕한 다음 자리를 바로하고 편안히 누워 세상을 떠나니, 향년(享年) 74세였다. 개성부 서쪽 아버지 묘아래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配) 의창 현씨(宜昌玄氏)는 현억령(玄億齡)의 딸로 가정(嘉靖) 병진년(丙辰年, 1556년 명종 11년) 5월 초6일에 출생하여 공보다 6년 뒤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맏아들 이의남(李義男)은 효행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차남은 이몽남(李夢男)이다. 이의남은 이덕일(李德一)ㆍ이성일(李誠一)ㆍ이수일(李壽一)ㆍ이유일(李惟一)ㆍ이순일(李純一)을 낳았고, 이몽남은 이회일(李會一)ㆍ이준일(李俊一)ㆍ이선일(李善一)을 낳았다.

 

증손(曾孫)은 유학(幼學) 이익지(李益之)ㆍ생원 이익겸(李益謙)ㆍ유학 이익정(李益禎)ㆍ이익화(李益華)ㆍ이익항(李益恒)ㆍ생원 이익성(李益聖)ㆍ이익수(李益受)ㆍ이익장(李益章)이다. 현손(玄孫)은 유학(幼學) 이취만(李就萬)ㆍ이해만(李垓萬)ㆍ이하만(李夏萬)ㆍ진사 이정만(李程萬)이며, 그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내가 앞뒤로 세 차례나 개성부에 부임하여 공의 덕망과 풍도를 익숙히 들어 우러러 사모한 지 오래인데, 이제 그 후손 이취만이 와서 공의 묘갈명을 나에게 요청하였다. 나는 본디 비문(碑文)을 잘 짓지 못한다고 사양했으나 청함을 더욱 근면히 하고 말을 더욱 간곡히 하였으며, 나 역시 공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 끝내 그 바람을 저버리지 못하였다.

 

이에 삼가 가장(家狀)에서 뽑아 이상과 같이 순서에 따라 짓고, 이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화담(花潭)의 학문을 직접 전수 받지 못했으나,

들어서 알고 나란히 어질기를 생각하였네.

 

돌아가 구하니 도(道)는 먼 곳에 있지 않은지라,

독실하게 배우고 힘껏 행하여 세상 피해 번민함이 없었네.

 

조예(造詣)가 고명하여 진실로 군자(君子)로다.

고요히 《주역(周易)》의 이치 연구하여 묘한 뜻 음미하였네.

 

손으로 더듬고 발로 밟으면서

소옹(邵雍, 송(宋)나라 강절선생(康節先生))을 계승했는데,

한가로운 가운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맑은 바람 늠연(凜然)하였네.

 

현달해서 영화누린 사람 욕되지 않은 자 드물고,

부호(富豪)한 사람치고 망하지 않은 자 드무네.

 

공은 선비로서 덕(德)으로 유종(儒宗)이 되었고,

가난했어도 즐거움 그 가운데 있었네.

 

세대는 멀고 사람은 죽었지만 아직도 향기(香氣) 남았음이여,

백세(百歲) 뒤에 (행적 드러낼) 자손 있기를 머물러 기다렸음일세.

 

저 산언덕 바라보니 울창하게 푸른데,

명을 지어 비석 세워도 붓이 부끄럽지 않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