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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은 이상보 묘갈명(晩隱 李尙輔 墓碣銘 ) - 陜川人

야촌(1) 2019. 1. 18. 00:44

晩隱 李公 墓碣銘 癸丑(1913) -합천이씨

     [생졸년] 1827년(순조 27) ~ 1903년(광무 7)』

 

공의 휘는 상보(尙輔), 자는 승언(承彦)이다. 이씨(李氏)는 옛날 월성(月城)의 대족(大族)이었다. 상조(上祖) 알평(謁平)은 신라의 원훈(元勳)이다. 그 뒤 휘 개(開)는 강양군(江陽君)에 봉해져서 자손들은 그로 인해 따로 강양(江陽=陜川)을 본관으로 하였다.

 

고려 때 경분(景芬)은 상서좌복야(尙書左伏射)이고, 운호(云皓)는 판도 판서(版圖判書)이다. 이조에 들어와서 휘 양근(壤根)은 군수(郡守)이고, 휘 동재(棟材)는 관찰사(觀察使)이니, 모두 문과(文科)를 거쳤다.

 

휘 광우(光友)에 와서 산해(山海)의 문하에서 배워 학행(學行)으로 드러나서 세상에서 죽각(竹閣) 선생이라고 일컬으니, 공에게는 10세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석춘(錫春)이며, 조부의 휘는 진무(震茂)이며, 부친의 휘는 희진(禧鎭)이고 호는 경암(敬菴)이다. 모친은 안동 권씨(安東權氏)와 김해 김씨(金海金氏)이니, 공은 김씨 소생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학업을 익히는데 수고스럽게 과정을 재촉 받지 않았고, 더욱이 글씨에는 선천적으로 타고나서 겨우 10세 때 쓴 글씨가 이미 종종 남의 집 벽에 걸리게 되었다. 얼마 뒤 사천(泗川)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사천에는 최공(崔公) 아무가 대성(大姓)이었는데 자기 사위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 집안사람들이 공이 가난한 것에 난색을 표하였다. 최공이 “이 사람은 재주가 있는데 가난한 것이 무슨 상관이냐.”라고 하고는 마침내 혼인을 시켰다.

 

얼마 뒤에 세 번 이사해서 강성(江城)의 옛날 살던 집으로 돌아왔는데, 가세는 더욱 영락했지만 이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 부모를 섬기는데 몸과 마음을 모두 봉양하고, 어린 아우들을 돌보는데 춥거나 굶주리지 않게 해서 부모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렸다.

 

상을 치를 때는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제전(祭田)을 다시 사는 조건으로 팔아 시신과 관곽을 구입하는 비용을 충당하기도 했지만, 제전은 또한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하였다.

 

일찍이 성재(性齋) 허 문헌(許文憲) 선생을 사사(師事)하였고, 또 강우(江右)의 여러 명석(名碩)들과는 문변(問辨)하고 유종(遊從)하는 즐거움을 나누었다. 잠깐 선조(先祖) 산소의 일로 서울에 가서 간직한 진정을 펴서 신원하고, 돌아와서는 벼슬길에 나가려는 생각을 끊고 만은(晩隱)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나이 많은 관리로 고을 수령이 된 사람들은 반드시 안부를 물었고, 혹 자신을 낮추어 강례(講禮)와 독약(讀約)의 장(長)으로 부르면 즐겨 응하였지만, 불러서 함께 술을 마시고 시를 짓자고 하게 되면 문득 사양을 하였다.

 

공의 글씨는 전서(篆書)ㆍ예서(隸書)ㆍ진서(眞書)ㆍ초서(草書)에 대해 어느 것 하나 뛰어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인근의 정(亭)ㆍ사(榭)ㆍ비(碑)ㆍ판(版)의 글씨를 써달라는 청이 집에 계속 이어졌다. 처음에는 자못 기환(奇幻)하게 쓰는 것을 일삼았지만, 정자(程子)의 “몹시 공경스럽게 한다〔甚敬”는 말을 알고부터는 다시 거두어들여 방정하고 순수한 곳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공이 자제나 후생들을 가르칠 때는 흔히 글을 읽고 몸을 닦는 것을 주로 하고, 한 가지 기예를 지극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긍섭(兢燮)은 20년 전에 진주(晉州)의 서쪽에서 객지살이를 할 때 배산(培山)의 시골집으로 공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 그 때 이미 연세가 든 노인이었지만 말씀은 간명하면서도 자상하고, 행동거지는 위의를 갖추고 있었으며, 두 아들을 인사시켜주었다.

 

나는 비록 어렸지만, 마음속으로는 공을 덕이 있는 어른으로 생각하였다. 그 뒤로 세상이 극심하게 변해서 다시는 공이 잘 지내고 계신지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하루는 공의 차자 공(次子 公)이 처연하게 눈바람을 무릅쓰고 삼백 리 길을 찾아와서 묘갈명(墓碣銘)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니, 공은 11년 전에 이미 돌아가시고 두 아들도 또한 이미 노인이 되어 있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서 오래도록 슬프게 탄식을 하다가, 마침내 끝까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순서를 잡아서 대략 이와 같이 기록한다. 공은 순조(純祖) 정해년(1827, 순조27)에 태어나서 고종(高宗) 계묘년(1903, 광무7) 3월 14일에 돌아가셨고, 석대산(石臺山) 미좌(未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의 부인 최씨(崔氏)는 본관이 삭녕(朔寧)이고, 부친은 처묵(處默)이다. 2남을 두었는데, 맏이는 환주(綄柱)이고, 둘째는 채주(埰柱)이다. 환주의 두 아들은 어리고, 여섯 사위는 아무 아무이다. 측실의 아들과 딸은 각 하나씩이다. 채주의 네 아들은 병태(炳泰)ㆍ병화(炳化)이고 나머지는 어리며, 세 사위는 아무 아무이다.
명(銘)을 붙인다.



일찍이 녹을 구하지 않고서 / 不祿于早
어찌해서 만년에 은거한다고 했는가 / 奚晩而隱


새로이 조심할 뜻을 이루고 / 志就新懦
명성을 수치로 여겨서라오 / 恥以華聞


오래된 대나무는 소리가 맑고 / 久竹冷冷
텅 빈 누각은 운치 있구려 / 虛閣有韻


옛날의 고상한 아현이니 / 古高餓顯
내 명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 我銘不泯

 

[주해]

 

[주01]산해(山海) : 조식(曺植, 1501~1572)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별호가 산해(山海)이다. 유일로 천거되었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한평생 성리학의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황(李滉, 1501~1570)과는 동갑이자 라이벌로 학문적 명성이 높아서 당대의 많은 인재들이 찾아와서 배웠다. 저서로는 《남명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02]강성(江城) : 고려 시대의 고을로 조선 시대에 단계현(丹溪縣)과 합하여 단성현(丹城縣)이 되었다가 지금은 단성면이 되어 경상남도 산청군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주03]성재(性齋) 허 문헌(許文憲) : 허전(許傳, 1797~1886)을 말한다. 자는 이로(以老), 호는 성재(性齋),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이익(李瀷)에서 안정복(安鼎福)을 거쳐 황덕길(黃德吉)로 이어지는 기호의 남인학맥을 이은 학자로 당대 유림의 종장이 되었다. 특히 김해 부사로 재직할 때에는 학문을 가르쳐 경남 지역의 다수의 선비들이 그의 문하에 몰려들었다. 저서로는 《성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주04]강우(江右) : 경상도를 낙동강을 기준으로 좌우로 나누어 안동을 중심으로 한 북부지역, 곧 대체로 지금의 경상북도에 해당되는 지역을 강좌(江左)라고 하고, 진주를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 곧 대체로 지금의 경상남도에 해당되는 지역을 강우(江右)라고 하였다.

 

[주05]몹시 공경스럽게 한다〔甚敬〕 : 《근사록》 권4 〈존양(存養)〉에 “나는 글자를 쓸 적에도 몹시 공경스럽게 하는데, 이는 글자를 멋있게 쓰려고 해서가 아니라, 다만 이러한 행위 역시 공부이기 때문이다.〔某寫字時甚敬, 非是要字好, 只此是學.〕”라고 한 북송(北宋)의 유학자 정호(程顥, 1032~1085)의 말이 나온다.

 

[주06]배산(培山) :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배양마을을 말한다.

 

[주07]순조(純祖) : 원문의 ‘헌묘(憲廟)’는 ‘순묘(純廟)’의 오류이다. 문맥을 살펴 수정해서 번역하였다.

 

[주08]석대산(石臺山) :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입석리에 있다.

 

[주09]새로이 …… 이루고 : 당(唐)나라 한유(韓愈, 768~824)의 〈추회십일수(秋懷十一首)〉 제5수에 “물러나서 새로이 조심할 뜻 이루나니, 악착스레 애쓰던 전날이 슬프네.〔斂退就新懦, 趨營悼前猛.〕”라고 하였다. 《東雅堂昌黎集註 卷1》

 

[주10]아현(餓顯) : 굶어 죽어서 이름을 날림을 뜻한다. 전의되어 벼슬을 하지 않고 가난하게 살면서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연건(淵騫)〉에 “혹자가 ‘유하혜는 은자가 아닌가?’라고 묻자, ‘군자는 불공하다고 하지만, 옛날의 고상한 아현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或問:柳下惠非賢者與? 曰:君子謂之不恭, 古者高餓顯, 下祿隱.〕”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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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晩隱李公墓碣銘[癸丑]- 曺兢燮 撰

 

公諱尙輔字承彥。李氏故月城大族。上祖曰謁平。新羅元勳。其後有諱開。封江陽君。子孫因別貫江陽。在麗曰景芬。尙書左僕射。曰云皓。版圖判書。入李朝有諱壤根郡守。諱棟材觀察使。皆以文科。至諱光友。遊山海門。以學行著。世稱竹閣先生。於公間十世。曾祖諱錫春。祖諱震茂。考諱禧鎭號敬庵。妣安東權氏,金海金氏。公金氏出也。生有夙慧。就學不勞程督。而尤於書天得。甫十歲筆墨已往往照人牆壁。尋隨家泗川。泗有崔公某鉅姓也。欲妻以女。而家人難其貧。崔公曰是子材。貧何介焉。卒昏之。旣而三徙而還江城故居。家益旁落。然不以是爲戚戚。事親志軆俱養。撫少弟不使其有寒飢。得親之順。居喪竭情盡愼。至典鬻祭田。以足身棺之須。而田亦竟返諸我。甞師性齋許文憲先生。又與江右諸名碩有問辨遊從之樂。間以先墳事如京師。得伸積直。歸則絶意進取。自號曰晩隱。長吏之宰邑者必致存問。或屈以講禮讀約之長則樂爲應之。至邀與共詩酒吟賞則輒辭也。公之書。於篆隷眞草無不工。旁近亭榭碑版之請。相續于門。始頗事奇幻。及得程子甚敬之語。乃更斂就方正純如也。然公之敎子弟後生。多主讀書褆躬。不以一藝爲至。兢燮廿年前客晉西。甞過謁公培山村舍。時已癯然耋也。言簡而詳。動止有儀。且見其二子焉。予雖幼。心竊長者之。其後世變轉甚。不復聞公休咎。日公之次子公凄然冒風雪。迤邐十舍。以墓銘見寄。則公之沒已十一年。而諸子且耆耋矣。俯仰歲月。愴歎久之。遂不敢卒辭而爲之序次大略如此。公生以憲廟丁亥。其沒以高宗癸卯三月十四日。葬在石臺山未坐之原。崔氏系出朔寧。父曰處默。育二男。長綄柱次埰柱。綄柱二男幼。六女婿某某。側室男女各一。埰柱四男炳泰,炳化,餘幼。三女婿某某。銘曰。

不祿于早。奚晩而隱。志就新懦。恥以華聞。久竹冷冷。虛閣有韻。古高餓顯。我銘不泯。<끝>

 

암서집 > 巖棲先生文集卷之二十九 /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