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기타 金石文

신라 문무왕릉비 윗조각 찾아.

야촌(1) 2009. 9. 4. 20:17

빨래판으로 써온 신라 문무왕릉비 윗조각 찾아

 

중앙일보 2009년 09월 04일(금) 오전 03:08

중앙일보 이경희

 

조선시대에 발견됐다가 사라진 신라 제30대 문무왕릉비(문무왕 재위 661~681) 조각(사진)이 200여 년 만에 다시 발견됐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경주시 동부동 한 주택 수돗가에서 문무왕릉비 상단(上段) 부분을 확인했다고 3일 밝혔다.

 

시멘트로 발라 고정시킨 뒤 빨래판으로 쓰던 비석 조각을 수도 검침원이 발견해 신라문화동인회 김윤근(65) 부회장에게 제보하면서 실물이 확인된 것이다. 조선시대 경주부윤(오늘날 시장에 해당하는 벼슬)을 지낸 홍양호(1724~1802)는 자신의 문집 『이계집(耳溪集)』에 “68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진 문무왕릉비 조각들을 정조 20년(1796년) 발견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비문을 탁본한 것 중 한 부가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1793~1853)의 손에 들어가 그의 저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내용이 실렸다. 그 뒤 실물의 행방은 다시 묘연해졌다가 1961년 경주시 동부동에서 아랫부분 조각이 발견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상태다. 당시에 찾지 못한 윗부분을 이번에 발견한 것이다.


문무왕릉비에는 신라 왕실 김씨의 내력,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업적, 신라의 백제 평정 사실, 문무왕의 죽음과 유언 등이 적혀 있다. 특히 신라 왕실이 한 무제에 투항한 흉노 태자 김일제로부터 신라김씨의 뿌리를 찾으려 한 흔적을 보여주는 사료다.


국립경주박물관은 “비편 가장자리의 훼손은 심하지만 비문은 잘 남아 있어 기존에 밝혀지지 않은 글씨의 추가 판독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경희 기자

 

 

경주 가정집 수돗가에서 상단부 발견… 빨래판으로 사용된 듯.

 

조선시대 때 발견됐다가 종적을 감췄던 신라 문무왕릉비의 조각이 200여년 만에 나타났다. 국립경주박물관은 "2일 경주 동부동의 한 주택에서 문무왕릉비 우측 상단부 조각(가로 40x세로 66㎝)을 확인했다"고 3일 밝혔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30대 임금 문무왕(재위 661~681년)의 치적을 기록한 이 비석이 박혀있던 곳은 가정집 마당의 수돗가였다. 수도검침원이 검침하던 중 글씨가 새겨진 돌을 발견하고 신라문화동인회에 제보한 것. 현장을 조사한 박물관 관계자는 "비편이 놓인 위치와 물기를 머금은 상태 등을 볼 때 빨래판으로 사용된 것 같다"고 말했다.

 

문무왕릉비는 68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다. 이 비가 다시 기록에 등장한 것은 1,100년 뒤인 조선시대다. 1796년(정조 20년)에 밭을 갈다가 비석 하단부와 우측 상단부 조각이 발견됐다는 사실이 당시 경주부윤 홍양호(1724~1802)의 문집 '이계집(耳溪集)'에 나온다.

 

비편의 탁본은 청의 금석학자 유희해(1793~1853)에게 전해져 그가 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비문 내용이 실렸다. 이후 비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는데, 1961년 경주 동부동에서 하단부(94x60㎝)가 먼저 발견됐고, 48년 만에 같은 지역에서 상단부 조각이 나왔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경주부 관아가 있던 곳으로, 하단부도 발견 당시 가정집 빨래판으로 쓰이고 있었다.

 

이번에 발견된 상단부 조각은 표면이 훼손되고 모서리 부분이 마모됐으나, 비문을 읽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뒷면은 아직 땅 속에 박혀있어 비문의 잔존 여부를 알 수 없다. '해동금석원'에 따르면 앞면은 문무왕의 치적, 뒷면은 문무왕의 유언과 장례 철자 등을 기록하고 있다.

 

박물관 측은 비편을 정밀 조사, '해동금석원'에서 제대로 밝히지 못한 일부 글자도 판독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지원기자 eddi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