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기타 金石文

우탁 유허비(禹倬遺墟碑)

야촌(1) 2009. 4. 7. 03:13

고려 제주 우 선생유허(髙麗祭酒禹先生遺墟)

[우탁(禹倬) 선생 생졸년] 1263년(원종 4)∼1342년(충혜왕 3)

선생이 세상을 떠난 충혜왕(忠恵王) 임오년(1342년)으로부터 447년 뒤인 기유 년(정조 13, 1789년) 9월 일 세움.

 

[시대] 조선

[연대] 1789년(정조13년)

[유형/재질] 비문/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높이 180cm, 너비 77cm, 두께 32cm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이휘재(李彙載) / 김흘락(金興洛) / 미상

[개관]

이비는1789년(정조13년)의 우탁유허비(禹倬遺墟碑)로 이휘재(李彙載)가 비문을 지었고, 김흘락(金興洛)이 글씨를 썼다. 우탁(禹倬:1263~1342년)의 본관은 단양이고, 자는 천장(天章)이며, 호는 백운(白雲)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어 민심을 현혹한 요신(妖神)의 사당(祠堂)을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때, 충선왕이 숙창원비(淑昌院妃=고려 25대 충렬왕의 비)와 밀통한 것을 알고 이를 극간한 뒤 벼슬을 내놓았다. 충숙왕이 그 충의를 가상히 여기고 누차 불렀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뒤에 성균 좨주(成均祭酒)를 지내다가치사(致仕) 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정주학(程朱學)서적을 처음으로 해득, 이를 후진에게 가르쳤으며, 경사(經史)와 역학(易學)에 통달하였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박물관에 소장되어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단행본)조동원,1982,『한국금석문대계』3,원광대학교출판국

--------------------------------------------------------------------------------------------------------------------------------------

 

유허비명(遺墟碑銘)

 

선생이 살던 시대에 있어서 어떻게 제명(制命 : 왕의 말)이라는 말을 하겠는가?

고려의 왕이 덕을 잃어 천하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선생은 역학에 조예가 깊어 문을 닫아걸고 연구에 몰두하여 학생들에게 조선의 대운이 열렸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역학이 흥한 때는 은(殷)나라 말기 주(周)나라의 덕이 성한 때가 아니던가?

 

선생은 매우 굳세고 정직하여 고을을 다스릴 때 음사(滛祠)를 없앴으며 조정에 들어가서는 도끼를 가지고 용감하게 간언하였다. 성균관의 수장이 되어서는 옛날의 도를 행하고자 했으나 당시로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물러나 예안현(禮安縣) 지삼리(知三里)에 살며 자연 속에서 편안하게 노닐었다.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때는 명이(明夷 : 밝은 것이 손상됨)에 해당되고, 점(占)은 가손(嘉遯 : 아름다운 물러남)이었으며, 적절한 도리는 대과(大過 : 주역의 괘 이름)의 ‘혼자 꿋꿋하게 서서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숨어 살며 번민하지 않는다.(獨立不懼 遯世无悶)’이었던 것이다.

 

마을을 지삼(知三)으로 부른 것은 선생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도학·예의·지조가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 마을 옆에는 오래 된 우물이 있고 주춧돌이 남아있다. 단양(丹陽)의 사인암(舎人岩)도 역시 선생이 노닐던 곳이라서 관청에서 그렇게 불렀다.

 

사람들의 추모하는 바가 이와 같아 100여년 뒤 퇴계선생이 옛날 살던 곳에서 북쪽으로 10리쯤 되는 강가에 서원을 건립하고 많은 선비들과 함께 제사를 지냈다.

 

정조 기유 년(정조 13, 1789년)에 마을 사람과 선비들이 후손과 함께 유허에 비를 세우고 큰 글자로 깊이 새겨 표시하였다. 그로부터 6년 뒤 갑인 년(1794년, 정조 18)에 안동부(安東府) 북쪽에 있는 정정산(鼎井山)에 묻혀있던 비석이 출토되어 무덤을 만들고 비석에 다음과 같이 썼다.

 

“명이(明夷)의 단사(彖辭 : 괘의 뜻을 풀이한 말)에 ‘이로움이 있어도 오래가지 못하는 것은 밝음을 감추기 때문이다. 안으로 어려워도 뜻은 바르게 할 수 있으니 기자(箕子)가 그러하였다.’

 

기자의 홍범(洪範 : 모범이 되는 큰 규범)과 선생의 역학은 모두 오래가기 어려운 때를 당해서도 끝내 어둠속에서 일을 밝혔으니 비슷한 부류이다.” 명(銘)하기를,

 

우리나라의 역학은

선생에 힘입어 밝고

선생의 역학은

주자 정자의 학문이네.

기자의 홍범 앞에 있어

서로 씨줄 날줄 이루어

위태한 나라 기미 밝히고

돌처럼 굳센 정절 지켜

마을을 지삼이라 부르고

이곳에다 집을 지으니

세상 멀어 사람 없으며

산은 높고 물은 맑았다.

옛 우물 먹지 않으니

내 마음이 서글퍼서

영남과 호남 사이에

서원 세워 완성하니

하늘이 유학을 열었다.

끝없이 영원히 전하고자

살던 마을에 표시하니

나라 사람들은 본받으라.

 

후학 가선대부 행한성부윤(嘉善大夫行漢城府右尹) 진성(眞城) 이휘재(李彙載) 지음.

재령(載寧) 이우량(李宇亮) 전액을 씀

조봉대부 전 행경상도사(朝奉大夫前行慶尙道都事) 문소(闻韶) 김흘락(金興洛) 비문 글씨.

정조 기유년(己酉年)으로부터 92년 뒤 경진 년(고종 17,1880년) 4월 일 옮겨 세우고 비문을 새김.

-----------------------------------------------------------------------------------------------------------------------------

 

[原文]

 

髙麗祭酒禹先生遺墟」

 

先生卒于忠恵王壬午後四百四十七年己酉九月日立」

 

遺墟碑銘」

 

先生之世胡元制命麗王失德天下之亂極矣先生深扵易學閉門參究教授生徒以啓 我朝之鴻運」

易之興也當殷之末世周之盛德者非歟先生以剛大正直之深莅郡毁滛祠立朝持斧敢諫長成均欲」

行古道知時不可為退居禮安縣知三里優游林泉累召不起以其時則明夷也以其占則嘉遯也以其」

義則大過之獨立不惧遯世无憫也里号知三自先生始道學禮義莭操三者是已傍有古井遺礎如丹」

陽之舎人岩亦以先生来遊故以其宦稱之為人所愛慕如此後二百餘秊退陶夫子建院扵旧居北十」

里江上與多士祀之 正廟己酉鄊人士與後孫卽遺墟立碑大字深刻以表之後六秊甲寅安東府北」

鼎井山埋碣出現遂封其墓書于石明夷之彖曰利艱貞晦其明也内難而能正其志箕子以之箕子之」

洪範先生之易學皆値艱貞之時卒能用晦而明其事又相類也銘曰」

東國易學頼先生明先生之易閩洛攸程箕範在前相為緯經炳幾危邦介石之貞村号知三于玆結楹」

世遠人亡山高水淸古井不食為我心惻嶺湖之间祠院翼翼天啓斯文永垂無極表厥▨闾邦人是式」

後學嘉善大夫行漢城府右尹真城李彙載謹撰」

載寧李宇亮書大字」

朝奉大夫前行慶尙道都事闻韶金興洛書碑隂」

正廟己酉後九十二秊庚辰四月 日移竪刻隂」

 

 

↑고려 제주 우 선생유허(髙麗祭酒禹先生遺墟)

 

↑안동 우탁 유허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