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기타 金石文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야촌(1) 2009. 2. 26. 00:40

■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근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의 환국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북관대첩비는 1709년 숙종 임금이 임진왜란때 함경도 의병장 농포 정문부(農圃 鄭文孚) 선조등이 최초로 의병을 규합하여 함경도 지방에서 왜군을 8차례나 싸워 격퇴시킨 공을 영구히 기리기 위해 세운 전승기념비이다.

 

「조선국함경도임진의병대첩비」라는 공식명칭을 가진 이 비는 임진왜란 당시 3대 의병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길주군 임명역 부근에 세워졌던 높이187cm 폭66cm 너비13cm이며 그 내용은 정문부 장군을 중심으로 한 관북(함경도)의 의병이 왜군의 제2군 선봉장이던 가토리요마사(加虅淸正) 군대를 격파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북관대첩비는 1905년 러.일전쟁 당시 길주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2사단 17여단장 이께다마사스케(池田正介)소장이 임명역에서 발견하고 자신들의 패전역사가 담겨있는 이 비를 수치스럽게 여겨 1906년 미요시중장이 일본으로 뜯어갔고 일본 왕실에서 보관하다가 오늘날에는 바로 문제의 야스쿠니신사로 옮겨진 것이다.

 

이 비는 1969년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연구원 원장에 의하여 발견되면서부터 환국이 거론되어 정부와 민간단체의 수차례에 걸친 반환요구에 대해 일본 정부는 “북관대첩비의 원소재지가 북한이라는 점 또한 민간 종교법인 즉 야스쿠니신사의 보유물건에 대한 정부 관여가 곤란하다는 점”등을 이유로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일본으로부터 반환 후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세워져있고, 이 비는 경복궁에 세워진 복원한 북관대첩비 이다.

 

임진왜란 당시 함경북도 북평사 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의병을 모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을 무찌른 전투를 소상히 기록한 전승비이다

 

조선국 함경도 임진의병 대첩비명


곤륜(崑崙) 최 창대(崔昌大) 지음
이봉화명필(李奉化明弼) 씀


옛날 임진란에 힘써 싸워 적을 깨뜨려 일세를 크게 울린 이로 해전에서는 이 충무의 한산대첩이 있고, 육전에서는 권 원수의 행주대첩이 있으며, 이 월천(李月川)의 연안(延安) 대첩이 있어, 역사가가 그것을 기록하였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칭송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지위가 있어 말과 부역과 군졸들을 낼 수 있음에 힘입은 것이다. 고단하고 미약한 데서 일어나 도망하여 숨은 무리들을 분발시켜 충의로써 서로 격려하여 마침내 오합지졸을 써서 완전한 승첩을 거두어 한 쪽을 수복함과 같은 이는 관북의 군사가 제일인 것이다.


처음 만력 중에 왜의 추장 수길이 강한 군사들을 믿고 거만하게 중국을 침범하고자 엿보다가 우리가 길을 빌려 주지 않음을 성내어, 드디어 크게 쳐들어와 서울에까지 이르렀다. 선조는 이미 서쪽으로 거둥하였고, 모든 고을이 무너졌으며, 적은 이미 경기도를 함락시키고 그 무서운 장수 두 사람이 군사를 두 길로 나누니 행장(行長)은 행조(行朝)를 뒤밟아 서쪽으로 가고 청정(淸正)은 북방 침공하는 것을 맡았었다.

 

그 해 가을에 청정이 북도로 들어갔는데 적의 정예한 군대가 매우 거세었기 때문에 철령(鐵嶺) 이북은 성을 지키지 못했다. 이 때에 국경인(鞠景仁)등이 반역하여 적에게 내응하였다.

 

경인은 회령부의 아전으로 본성이 악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적이 부령(富寧)에 이르자 그 위기를 타고 난을 일으켜 피난해 온 두 왕자와 대신을 잡고 그리고 장수와 관리들을 묶어 적에게 주고 정성을 보였으며, 경성(鏡城) 아전 국세필(鞠世弼)은 그의 숙부요, 명천(明川) 사람 말수(末秀), 목남(木男)과 서로 무리를 지어 모두 어울려 적이 주는 관작을 받아 각각 고을을 점거하고 성세를 벌여 죽이고 위협하기를 그의 지령대로 하니, 여러 고을이 무너지고 겁내어 인민들이 스스로 보전하지 못했었다.

 

경성(鏡城) 이 붕수(李鵬壽)는 의기 있는 선비라, 분개하며 말하되 ‘비록 국가의 어지러움이 이에 이르렀으나, 흉도가 감히 저렇게 할 수 있겠는가?’하고 최배천(崔配天)․지달원(池達源)․강문우(姜文佑)등과 함께 의병 일으키기를 꾀했는데 여러 사람의 지위가 서로 비슷하여 장수 삼을 이가 마땅치 않았다.


평사 정문부(鄭文孚)는 문무의 재주는 있으나 군사가 없어 싸울 수 없으므로 몸을 빼어 산골에 숨어 있던 중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즐거이 좇았던 바, 마침내 정공을 추대하여 주장을 삼고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과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등을 차장으로 삼고 피로써 맹서하며 의병을 모집하여 백여명을 얻었다.

 

그 때 북쪽 오랑캐들이 또 북쪽 변방을 침범하므로 여러 장수들이 사람을 시켜 세필을 달래어 같이 힘을 합하여 오랑캐들을 막자 하니 세필이 허락하고 의병들을 성안으로 받아들였다. 이튿날 아침 정공이 기와 북을 세우고, 남문으로 올라오도록 꾀어 그가 현신할 때에 문우(文佑)가 그를 사로잡아 목을 베어 조리돌리고, 그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은 놓아주었다.

 

그리고 곧 군사를 이끌고 명천(明川)으로 가서 말수(末秀) 등을 잡아 목베고 회령 사람이 또한 경인을 쳐서 목베어 의병에게 호응하니 군세가 점점 커지고 따라와 붙는 자가 더욱 많아졌으며, 길주 사람 허진(許珍)․김국신(金國信)․허대성(許大成)이 또한 군사를 모아 성원하였다. 이때에 청정(淸正)이 편장(偏將)으로 하여금 정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길주에 웅거케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남관(南關)에 진을 쳐 호응하고 있었다.

 

11월에 적을 가파리(加坡里)에서 만나 싸우려는데 정공은 여러 장수들을 배치하되 현룡은 중위장(中衛將)을 삼아 백탑(白塔)에 진을 치고, 오응태․원충서는 복병장을 삼아 석성(石城)과 모회(毛會)로 나누어 진을 치고, 한인제(韓仁濟)는 좌위장을 삼아 목책(木柵)에 진을 치고, 유경천(柳擎天)은 우위장(右衛將)을 삼아 날하(捏河)에 진을 치고, 김국신․허진은 좌우 척후장을 삼아 임명과 방치(方峙)로 나누어 진을 치게 했는데 적들은 여러 번 이긴 끝이라 방비를 허술하게 했다.

 

우리 군사들은 모두 함께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여 기운을 얻어 밀고 나갔는데 고함치며 앞서 나가지 않는 군사가 없으니 적이 패하여 달아났는데, 군사를 추격하여 그 장수 5명을 죽이고 목을 수 없이 베었으며, 그 말과 무기들을 모조리 빼앗았다.

 

그래서 원근이 진동하여 장수 관리들로 도망치고 숨어 엎디었던 자들이 다투어 일어나 호응하니, 무리들이 7천 명에 이르렀으며, 적은 마침내 길주성으로 들어가 움츠리고 감히 발동하지 못했는데 길 옆에 복병을 두어 나오기만 하면 무찔러 버렸다.

 

이윽고 성진의 적이 임명(臨溟)을 크게 침략하므로 정예한 기병들을 이끌고 습격했으며, 산에 기대어 복병했다가 적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협공하여 크게 깨뜨리고 또 수백 명을 목베고 마침내 그 배를 갈라 창자를 행길가에 늘어 놓자 군사의 형세가 크게 떨치고 적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12월에 또 쌍포(雙浦)에서 싸웠는데 싸움이 한창 어울리자 편장(偏將)이 철기(鐵騎)를 끌고 가로 찌르기를 풍우같이 빨리 하니 적이 세력을 잃어 맞서 보지도 못하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므로 이긴 기세를 타고 또 깨뜨렸다.

 

이듬해 정월에 단천에서 싸웠는데, 세 번 싸워 세 번 이기고 돌아와, 길주에 진을 치고 군사들을 쉬게 하자, 청정이 불리함을 알고 큰 군대를 보내어 길주의 적을 맞아 돌아오게 하므로 우리 군사들은 그 뒤를 쳐서 백탑에 이르러 크게 싸워 또 깨드렸으며, 이 전쟁에서 이붕수(李鵬壽)․허대성(許大成)․이희당(李希唐)은 전사했으나, 적은 마침내 물러가 다시는 감히 북쪽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이때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도 또한 행장(行長)을 평양에서 깨뜨렸는데, 정공이 최 배천을 시켜 샛길로 행재(行在)에 승첩을 아뢰니 임금이 불러보고 눈물을 흘리며, 붕수에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증직(贈職)하고, 배천에게는 조산대부(朝散大夫)의 계급을 내렸다.

 

그 때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이 문부가 절도사에게 아뢰지 않았음을 성내며 의병의 공적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시기하여 임금께 공로를 숨기고 거짓말로 아뢰었기 때문에 공에게는 포상이 시행되지 않았다.


오랜 뒤 현종(顯宗)때에 관찰사 민 정중(閔鼎重)과 북평사 이 단하(李端夏)가 부로(父老)들에게서 듣고 사실을 아뢰어 비로소 문부에게는 찬성(贊成), 붕수에게는 지평(持平)을 증직하고 남은 사람들에게도 차등 있게 관작을 내렸으며, 또 사당을 경성 어랑리(漁郞里)에 세워 당시 같이 일한 여러 사람들을 제사케 하고 창렬(彰烈)이라 사액했다.

 

지금 임금 경진년(庚辰年)에 창대(昌大)가 북평사가 되어 의병의 자손들과 함께 연고지를 방문하여, 사적을 자세히 얻어 개연히 제공의 기풍을 상상도 하고 또 이른바 임명(臨溟)․쌍포(雙浦)를 찾아 진치고 싸우던 자리를 거닐고 돌아보며 탄식하면서 떠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부로에게 말하되 ‘섬 오랑캐의 전화가 몹시 심하여 세 서울이 함락되고 팔도가 무너졌는데, 이 분들은 죽음을 걸고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서 억센 도적을 무찔러 우리나라의 발상한 옛 땅으로 하여금 마침내 오랑캐 땅이 되는 것을 면하게 했으며, 변방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일어나 충의를 서로 권하게 된 것이 그 또한 누구의 힘이더냐?

 

행주 연안에는 모두 비갈(碑碣)이 있어 사적을 적어 공렬을 나타내었으므로 동서로 오가는 이들이 우러러보고 몸을 굽히거니와 관북의 거룩한 공로를 가지고도 비갈 하나가 없으니 어찌 제군의 수치가 아니겠는가?’하니 모두 대답하되 『그렇소』그것은 우리들의 뜻이기도 한데 하물며 공의 명령까지 있음이겠소.’하며 마침내 돌을 다듬고 재물을 모으고 사람을 시켜 글을 청하건마는 나는 적임자가 아니므로 사양했더니 다시 와서 말하되 ‘이 일은 공이 실로 발의한 사람이니 허락해 주지 않으면 일을 철폐하겠소.’ 하므로, 나는 마침내 이의 사적을 서술하고 새긴다.

 

남쪽에서 도적이 와 명나라를 치려드니 / 有盜自南 讐我大邦

우리는 이웃이 되어 온 나라가 화 입었네. / 我王于蕃 以國受鋒

 

높고 높다 북방이여 오랑캐 소굴 되니 / 屹屹北原 狼籍穴墉

어리석은 백성들이 저항 없이 따르도다. / 有蠢者氓 不抗而從

 

피 머금은 입으로 흉한 독을 뿜을 적에 / 血口胥呑 濟毒以兇

씩씩하다 우리 군사 뭇 호걸 헌걸차다. / 士也朅朅 俊群攸同

 

군사란 정의가 제일, 창과 활이 부질없어 / 兵義莫利 不屑戈弓

반역자 무찌르니 저 도적 못 덤비네. / 旣殲叛徒 寇莫我衝

 

병정들 북을 치니 산이 무너지듯 바다가 끓듯 / 武夫鼓呼 山摧海洶

우리 군사 빛난 전술 흉한 적을 무너뜨리네. / 師征孔赫 厥醜崩惱

 

천벌을 내리게 함 사사 아닌 충성 때문 이거 / 協底帝罰 匪私我忠

북쪽 땅 평정되어 누에치고 농사짓네. / 北土旣平 爾蠶我農

 

임금이 감탄하며 누가 그대의 공보다더 하겠느냐 / 大君曰咨 孰尙女功

벼슬 주고 사액하고 한결같은 은혜로다. / 贈官命祠 光惠始終

 

선비 기풍 열렬하니 백성들도 용감 / 士風其烈 民可卽戎

임명 바닷가에 우뚝한 돌이 있어 / 臨溟之厓 有石海高

칭송을 거기 새겨 영원토록 보이노라 / 刻之誦詞 用眠無窮

 

숭정 갑신 뒤 65년(1709 숙종 35) 10월 일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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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昆侖集卷之十七

 

北關大捷碑 癸未

 

在昔壬辰之難。其力戰破賊。雄鳴一世。水戰則有李忠武之閑山焉。陸戰則有權元帥之幸州焉。有李月川之延安焉。史氏記之。游談者誦之不倦。雖然。此猶有位地。資於乘賦什伍之出也。若起單微奮逃竄。徒以忠義相感激。卒能用烏合取全勝。克復一方者。關北之兵爲最。始萬曆中。倭酋秀吉。怙强驁逆。規犯中國。怒我不與假道。遂大入寇。長驅至都。宣廟旣西 幸而列郡瓦解。賊已陷京畿。其驍將二人。分兵首兩路。行長躡行朝西。淸正主北攻。其秋。淸正入北道。兵銳甚。鐵嶺以北。無城守焉。於是鞠敬仁等叛應賊。敬仁者。會寧府吏也。素惡不率。及賊到富寧。隙危扇亂。執兩王子及宰臣奔播者。並縳諸長吏。與賊效欵。鏡城吏鞠世必。其叔父也。及明川民末守木男。連謀相黨。並受賊所署官。各據州城。聲張勢立。殺脅惟所指。數州崩駭。人莫自保。鏡城李鵬壽。爲氣士也。奮曰。縱國家創攘至此。兇徒敢爾耶。乃潛與崔配天,池達源,姜文佑等。謀起義兵。諸人地相夷。莫適爲將。評事鄭 文孚有文武才。無兵可戰。脫身匿山谷間。聞義兵起。欣然從之。遂推鄭公爲主將。鍾城府使鄭見龍慶源府使吳應台爲次將。歃血誓義。募兵得百餘人。時北虜人侵北邊。諸公使人誘世必。並力禦北虜。世必許之。內義兵州城。明朝。鄭公建旗鼓。上南城樓。誘世必上謁。時其入。目文佑禽之。斬以徇。赦其脅從。卽引兵南趣明川。又捕末守等斬之。會寧人亦討敬仁誅之。以應義兵。軍勢稍壯。來附者益衆。吉州人許珍,金國信,許大成。亦聚兵爲聲援。當是時。淸正令偏將。領精兵數千。據吉州。身率大軍。屯南關以護之。十一月。遇 賊于加坡將戰。鄭公部署諸將。見龍爲中衛將。屯白㙮。應台及元忠恕爲伏兵將。分屯石城,毛會。韓仁濟爲左衛將。屯木柵。柳擎天爲右衛將。屯涅河。金國信,許珍爲左右斥候將。分屯臨溟方峙。賊狃勝不甚備。諸軍並起揜擊。乘銳蹙之。士無不疾呼先登者。賊敗走。縱兵追之。殺其將五人。斬獲無數。盡奪其馬畜兵械。於是遠近響震。將吏亡伏者爭起應之。衆至七千餘人。賊收入吉州城。窘不敢動。列伏于旁陿。邀其出輒剿之。已而城津賊。大掠于臨溟。率輕騎襲之。萆山設伏。伺其還夾擊。大破之。又斬數百人。遂剖其腹腸。 暴之大路。於是兵聲大振。賊益畏之。十二月。又戰于雙浦。戰方合。偏將引鐵騎橫衝之。迅如風雨。賊失勢。不及交鋒。皆散走。乘勝又破之。明年正月。又戰于端川。三戰三勝。還屯吉州休士。旣而。淸正知軍不利。遣大兵迎還吉州賊。我軍尾擊。至白㙮大戰。又敗之。是役也。李鵬壽,許大成,李希唐。戰死。然賊遂退。不敢復北。當是時。皇明將李如松。亦破行長於平壤。鄭公乃使崔配天。間行奏捷行在。上引見流涕。贈鵬壽司憲府監察。賜配天秩朝散。時觀察使怒文孚不稟節度。而疾義兵功聲。出已聞奏。率以誣揜。以故賞不行。 久之。顯宗時觀察使閔鼎重。北評事李端夏。聽於父老。以實聞。於是加贈文孚贊成。鵬壽持平。餘人贈官有差。又建祠鏡城之漁郞里。祀同事諸人。賜額曰彰烈。今上庚辰。昌大爲北評事。旣與義旅之子孫。訪問前故。得事蹟爲詳。慨然想諸公之風。又嘗路所謂臨溟雙浦者。觀其營壁戰陣之所。徘徊指顧。爲之咨嗟而不能去。間語其長老曰。島夷之禍烈矣。三京覆而八路壞。諸公出萬死一生。提孤軍摧勁寇。使我國家興王舊地。卒免於左袵。而邊塞之人。興於聽聞。勸於忠義者。又誰之力也。幸州,延安。俱有碑碣。載 事垂烈。東西者瞻式。以關北之功之盛而獨闕焉。庸非諸君之恥歟。咸應曰然。惟鄙人志。矧公命之。遂伐石鳩材。以人來請文。辭非其人。又來曰。斯役也公。實首議。不得命將輟。余乃叙其事。系之銘曰。
有盜自南。讐我大邦。我王于蕃。以國受鋒。屹屹北原。狼虺穴墉。有蠢者氓。不抗而從。血口胥呑。濟毒以兇。士也朅朅。俊羣攸同。兵義莫利。不屑戈弓。旣殲叛徒。寇莫我衝。武夫鼓呼。山摧海洶。師征孔赫。厥醜崩恟。協底帝罰。匪私我忠。北土旣平。爾蠶我農。大君曰咨。孰尙女功。贈官命祠。光惠始終。士風其烈。民 可卽戎。臨溟之厓。有石嵸嵸。刻之誦詞。用眡無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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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관대첩비 이달 하순 반환받아

    2005년 10월 12일 인도문서 서명식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있는 북관대첩비 모습

 

 

북관대첩비가 이달 하순 반환된다.

한일 양국은 10월 12일 북관대첩비 인도문서에 서명식을 갖고 비 철거를 위한 기술적 작업을 시작해 늦어도 이달 26일 전에 철거와 운송을 개시할 예정이라고 외교통상부 당국자가 10일 밝혔다.

앞서 북관대첩비를 갖고 있는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측은 3일 이사회를 개최하고 반환을 최종 결정했다.

인도문서에는 한일 양국 정부와 야스쿠니(靖國) 신사측의 서명이 포함돼 있다.

비(碑) 철거 당일 야스쿠니 신사내에서 민간단체 등의 주관으로 고유제(告由齊, 일본명 移運式)가 개최된다.

고유제는 철거 완료후 한국으로 이송하기 직전에 치르는 마지막 유교의식이지만 특정 종교색채를 띠지는 않는다. 양국 정부와 민간 주관으로 이뤄지며 한일불교복지협의회도 참석할 예정이다.

북관대첩비는 우리나라로 인도된 뒤 문화재청과 통일부를 포함한 관련부처 논의와 국내에서 일정기간 전시후 적절한 시기에 북한으로 전달된다.

높이 187㎝에 1천500자의 글을 담고 있는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때 함경도 경성 (鏡城)과 길주(吉州)에서 당시 정문부(鄭文符) 의병장이 왜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해 숙종 34년(1707년) 길주군에 세워진 것으로 1905년 러일전쟁중 일제에 의해 약탈돼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돼왔다.

정부는 1978년 북관대첩비가 재일사학자 최서면 박사에 의해 발견된 이후 그 이듬해인 1979년부터 외교통상부를 창구로 야스쿠니 신사, 일본 외무성과의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반환을 요구해왔다.

 

야스쿠니 신사측도 한국을 경유한 북관대첩비의 반환시 북측으로부터 항의의 여지가 없도록 남북 당국간 합의후 외교적 경로를 통해 요청하면 반환하겠다는 의지를 비쳐왔으며 최근에는 작업상 편의를 위해 비 주변의 수목을 미리 제거하는 등 협조적인 자세를 보여왔다.


지난 3월28일 한일 불교복지협회 회장인 초산스님이 북한 조선불교연맹과 접촉해 반환 합의문을 채택했고 남북은 제15차 장관급회담에서 북관대첩비 반환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일본 정부는 이어 2개월 후인 5월20일 남북 당국간의 합의후 우리나라 정부가 요청하면 반환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전했으며, 남북한은 다음 달인 6월23일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 공동보도문을 통해 일본측으로부터 북관대첩비를 반환받기로 하고 이를 위한 실무적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