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 2038

성균진사 이응춘 묘지명(成均進士李應春墓誌銘)

성균진사 이공 묘지명(成均進士李公墓誌銘) – 백사 이항복 이응춘『李應春, 1545년(인종 1) ~ 1600년(선조 33) / 백사공파 생각하건대, 우리이씨는 대서(代序)가 멀리서 내려왔으니, 그 보첩(譜牒)과 사서(史書)에 드러나서 명백히 기록하여 전할 만한 것이 있다. 평장사(平章事) 알평(謁平)은 육부(六部)를 규합하여 신라시조를 도와 추대해서 맨 처음 신라의 기반을 구축하였고, 좌복야(左僕射) 핵(翮)은 덕을 전하고 아름다움을 이었으며, 명성을 드높이어 전대(前代)를 빛내고, 뒤에서 서업(緖業)을 계승하였다. 그래서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아주 드러난 두어 겨레가운데서 반드시 이씨를 으뜸으로 치는 바이다. 국조(國朝)에 들어와서는 휘 성무(成茂)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 증조이고, 그 아우인 성..

이학영 행장(李學榮行狀) - 밀직공파

肅齋集卷之二十五 : 숙재 조병덕 善濂齋李公 學榮 行狀(선렴재이공행장) (이학영(밀직공파)/충남 보령지역 세거) 公諱學榮。字幼文。善濂齋其號也。李氏系出慶州。以新羅始祖赫居世佐命功臣諱謁平。爲鼻祖。至麗季。有諱齊賢。諡文忠。號益齋。於公爲十八世祖。入我朝。諱俶祉。卽益齋四代孫。從蔭仕。景泰甲戌。出監石城縣。翌年乙亥。棄官寓鴻山縣。卽光廟初也。及端宗昇遐。以未敢持服。乃八縣北麻田谷廬焉。盖取麻字之義也。仍沒身自靖。孫諱龜齡。中生員試。値燕山朝戊午士禍。隱德不仕。是生諱荃。文章德業。爲先輩所推重。登中廟己卯司馬。時年二十。是歲靜菴趙先生披禍。遂遯跡于藍浦內洞。杜門自修。與世相忘。生諱堯年。事親孝。年八十二。丁內艱。居廬三年。享年九十六。以先世之不仕。終辭壽秩。五代祖諱萬章。高相諱震白。曾祖諱錫亨。祖諱宗淵。世有潛德。考諱敬植。贈敎官。號希濂窩。與其族弟蘭菊齋李公禮煥。講磨道義。..

百七歲老人墓碣銘

■ 이수천『李壽天, 1750년(영조 26)~1856년(철종 6) ------------------------------------------------------------------------------------------------------------------------------------- 百七歲老人墓碣銘 - 귤산 이유원 찬 先王之治天下者五。貴老爲其近乎親也。湖南之詩山。有百七歲老人焉。老人姓李。諱壽天。字乃百。慶州人。以鷄林君爲鼻祖。麗朝有益齋先生。入我朝。有諱暿官嶺南伯。號淸湖。傳至四世。有諱擎柱號知休翁。壬辰之役。殉于能峙。贈參判。生諱瑜。丁卯立慬郭山。贈司僕寺正。寔六世五世祖也。高祖諱時馨。號一事堂。丙亂倡義。贈敦寧府正。曾祖諱澱以孝聞。贈通禮院奉禮。祖諱偉章忠勳府經歷。考諱世參將仕郞。妣東萊鄭氏。父曰履福。生考諱得萬。妣金..

이봉수장군의 산소(1563~1634)

■ 이봉수(李鳳壽) 경주이씨 평리성암공파 애일당문중 1573년(선조 6)∼1634년(인조 12).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로(德老), 호(號)는 석계(石溪), 아버지는 호조참판(戶曹參判-從二品)에 추증된 동명(東明)이고, 어머니는 장수황씨(長水黃氏) 경서(慶瑞)의 따님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성웅으로 만든 7명의 영웅들이 있었다. 석계 이봉수(石溪 李鳳壽) 장군이 그중 한분이다. 석계 이봉수 장군은 어렸을 적부터 활을 쏘고 말을 타며 또 병법인 팔진법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스무 살 초의 나이에 이순신을 찾아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왜군을 무찌르는 계책을 알림으로 전란에 참여하게 되었고, 화약(염초=질산)을 제조하는 기술을 발휘하여 화포로서 왜선을 제압할 수..

이달존(李達尊)

■ 이달존(李達尊) [고려문과] 충혜왕(忠惠王) 즉위년(1330) 경오(庚午) 경오방(庚午榜) 을과(乙科) 3위(3/37) --------------------------------------------------------------------------------------------------------------- [인물요약] ◇자(字) : 천각(天覺) ◇호(號) : 운와(雲窩) ◇생년 : 계축(癸丑) 1313년(충선왕 5) ◇졸년 : 경진(庚辰) 1340년(충혜왕 후1) ◇향년 : 28세 ◇합격연령 : 18세 ◇본관 : 경주(慶州) ◇거주지 : 미상(未詳) [경력] 고려후기의 별장(別將), 헌납(獻納), 감찰장령(監察掌令/정4품), 전의부령(典儀副令/從五品), 전리총랑(典理摠郎)을 역임한 문신...

영천의 경주이씨

영천의 경주이씨 [정의] 이알평(李謁平) 을 시조로 하고 이거명(李居明)을 중시조로 하며, 이옥삼(李玉三)과 이응백(李應伯)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영천시의 세거 성씨. [연원] 이옥삼은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이천(李蒨)을 파조로 하는 국당공파(菊堂公派)로 경상북도 영천의 신녕현(新寧縣) 지역에 입향을 하였으며, 이응백은 이제현(李齊賢)을 파조(派祖)로 하는 익재공파(益齋公派)로 임진왜란 전에 영천에 입향하였다. 경주 이씨로 영천에 세거하는 파는 이 외에도 여러 파가 있으나 대체로 국당공파와 익재공파가 주류를 이룬다. [입향 경위] 이옥삼과 이응백이 영천에 입향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이들이 입향한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각각의 아들인 이온수(李蘊秀)와 이희복(李希福)이 의병으로 참전하여 큰 공훈을..

서계 이위 행장(西溪李緯行狀) - 국당공후 문정공파

이위『李緯, 1562년(명종 17)~1638년(인조 16)』 이광산 처사 행장(李筐山處士行狀) – 이위(李緯)/국당공후 문정공파) 이위『李緯, 1562년(명종 17)~1638년(인조 16)』의 자는 찬중(粲仲) 호는 서계(西溪)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반우당(飯牛堂) 이경(李經)의 동생으로, 평소 소학(小學)을 율신(律身)의 법도를 삼았으며, 기축사화(己丑士禍)의 횡액(橫厄)을 당하여 회령(會寧)으로 유배되자 매일 멀리 고향에 있는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산꼭대기에 올라 남쪽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임진왜란 당시 사면(赦免)되어, 마침내 과거(科擧)를 단념하고 어머니 봉양에만 전념했다. 어머니 상을 당해서는 3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고,3년 동안 죽만 마시고 지냈다.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직(贈職..

영상 이유원 영세물망비

영상 이유원 영세물망비(領相李裕元永世不忘碑) 조선말 1869년(고종 6)에 경상도 양산군 좌이면(慶尙道 梁山郡 左耳面) 소속이던 구포(龜浦=지금의 부산광역시 북구지역)가 동래군(東萊郡)에 탈속(奪屬)되게 되었다. 이에 양산 군민들이 양산군으로 환속(還屬)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양산의 유림(孺林)에서 우석규(禹錫奎) 서상로(徐相魯) 이기수(李基洙/경주이씨) 세 사람을 공의(公議)로 추대하여 한양[서울]으로 보내었다. 시골 선비로서 백방으로 주선해도 임금을 배알 할 방도를 찾지 못하게 되자 최후 수단으로 남산 봉수대에 올라가서 밤에 봉화(烽火)를 올려 결국 의금부(義禁府-조선시대 특별사법 관청)로 잡혀갔다. 세 사람은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구포(龜浦=左耳面)가 오랫동안 양산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