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영상 이유원 영세물망비

야촌(1) 2020. 2. 16. 10:35

영상 이유원 영세물망비(領相李裕元永世不忘碑)

 

조선말 1869년(고종 6)에 경상도 양산군 좌이면(慶尙道 梁山郡 左耳面) 소속이던 구포(龜浦=지금의 부산광역시 북구지역)가 동래군(東萊郡)에 탈속(奪屬)되게 되었다. 이에 양산 군민들이 양산군으로 환속(還屬)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양산의 유림(孺林)에서 우석규(禹錫奎) 서상로(徐相魯) 이기수(李基洙/경주이씨) 세 사람을 공의(公議)로 추대하여 한양[서울]으로 보내었다. 시골 선비로서 백방으로 주선해도 임금을 배알 할 방도를 찾지 못하게 되자 최후 수단으로 남산 봉수대에 올라가서 밤에 봉화(烽火)를 올려 결국 의금부(義禁府-조선시대 특별사법 관청)로 잡혀갔다.

 

세 사람은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구포(龜浦=左耳面)가 오랫동안 양산군 소속인데 인부족(人不足) 세부족(勢不足)으로 동래 쪽에 빼앗겼으니 이를 바로잡아 달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당시의 영상(領相=領議政) 이유원(李裕元) 대감에게 보고되자 영상은 세 사람의 의기(義氣)를 가상히 여겨 봉수대 봉화 사건을 면책하고 1875년(고종 12)에 구포(좌이면)를 양산군에 환속토록 조치하였다.

 

이에 향민(鄕民)들이 영상 이유원 대감의 은혜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는데 『영상대감 이합 유원 영세 물망비』이다.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헌신한 세 선비는 관직이 없어 영상대감의 비석 뒷면에 이름만 병기(倂記)했다.

 

이 비석은 경남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291번지 천성산(千聖山) 내원사(內院寺) 입구 국도변에 세워져 있다가 지금은 양산시 교동 1길 10(교동 198-2), 양산 향교 앞 비석 군에 세워져 보존되고 있다.

 

비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비두는 높이 60㎝. 너비는 102㎝. 두께 27㎝로 꽃과 구름이 새겨진 관석(冠石) 모양을 하고 있다. 비신은 높이 121.5㎝. 너비 54.5㎝. 두께 25㎝이고 비 좌는 가로 98㎝. 세로 62㎝. 높이 7㎝의 시멘트 구조물로 되어있다.

 

비문은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어있고 비의 앞면 중앙에 큰 글씨로 「영상대감 이합 유원 영세 물망비(領相大監 李閤 裕元 永世不忘碑)」라고 적고 오른쪽에는 「아! 우리 상공이시여! 끼치신 은택을 우러러 사모한다네.

 

읍이 유지되고 백성들이 생존된 것이 누구의 힘이던가(猗我相公 景仰遺澤 邑支民存 伊誰之力)」라고 새기었으며 왼쪽에는 「호수를 잊은 물고기와 가지에 걸린 사슴 꼴이 되어 고을의 백성 모두 모여 이에 한 조각 비석을 세웠다네(忘湖之魚 足+票柯之鹿 咸聚境民 玆成片石)」라고 4언시구(四言詩句)로 구성되어 있다.

 

또 앞면 오른쪽 맨 끝에「상지십육년기묘십이월일립(上之十六年 己卯十二月 日立)/1875년(고종 12) 12월 일」이라고 건립 일을 적었고 왼쪽 맨 끝에는「통훈대부 양산군수 겸 동래 진관 병마동 첨절제사 이능화 근찬(通訓大夫梁山郡守兼東萊鎭管兵馬同僉節制使李能華謹撰)」이라 하여 근립 당시의 양산군수 이능화(李能華)가 비문을 지었음을 보여준다.

 

[각주]

『내 고장 전설』- 1983 양산군청

『부산북구향토지』- 2014 부산 북구청

 

 

사진출처>닥밭골(심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