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성균진사 이응춘 묘지명(成均進士李應春墓誌銘)

야촌(1) 2020. 3. 6. 20:26

 

성균진사 이공 묘지명(成均進士李公墓誌銘) – 백사 이항복

이응춘『李應春, 1545년(인종 1) ~ 1600년(선조 33) / 백사공파

 

생각하건대, 우리이씨는 대서(代序)가 멀리서 내려왔으니, 그 보첩(譜牒)과 사서(史書)에 드러나서 명백히 기록하여 전할 만한 것이 있다.

 

평장사(平章事) 알평(謁平)은 육부(六部)를 규합하여 신라시조를 도와 추대해서 맨 처음 신라의 기반을 구축하였고, 좌복야(左僕射) 핵(翮)은 덕을 전하고 아름다움을 이었으며, 명성을 드높이어 전대(前代)를 빛내고, 뒤에서 서업(緖業)을 계승하였다.

 

그래서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아주 드러난 두어 겨레가운데서 반드시 이씨를 으뜸으로 치는 바이다. 국조(國朝)에 들어와서는 휘 성무(成茂)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 증조이고, 그 아우인 성달(成達)은 통진 현령(洞津顯令)을 지냈다.

 

현령이 병절교위(秉節校尉) 정신(貞臣)을 낳았는데, 병절교위가 교수(敎授) 유흡(柳洽)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 을사년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응춘(應春)이고 자는 모이다. 나이 8세에 모친이 작고하였고, 34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42세에는 부친이 작고하였고, 49세에는 아내가 죽었으며, 56세에는 공이 죽었으니, 아, 궁하도다.

 

아내 양씨(楊氏)는 인의(引儀) 옥(沃)의 딸인데, 2남을 낳았으니 전방(傳芳)ㆍ연방(聯芳)이다. 공은 모친이 일찍 작고한 것을 애통하게 여기어, 일찍이 부친상을 입어 마치고 나서는 모친상 3년을 추후하여 입어 마쳤다.

 

공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아우에게 우애하였으며, 학문에 힘을 썼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향린(鄕鄰)에서 그를 민망히 여겨 세 번이나 예부(禮部)에 천거하였지만 끝내 등용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궁하다고 이를 만하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이미 학문은 넉넉하였으나 / 旣優於學

끝내 운명이 불우하였네 / 終躓於命

오직 효성과 우애의 명성은 / 惟孝與友

그 영원토록 전해지리라 / 厥垂斯永

 

[原文]

 

成均進士李公墓誌銘 - 白沙 李恒福

 

緬維我李。遠有代序。其著於譜見於史。班班可紀而傳者。平章事謁平。糾合六部。翊戴羅祖。肇基於始。左僕射翮。傳德襲休。倡名光前。紹業於後。自新羅以迄于高麗。數族之顯者。必以李氏爲甲。入國朝。有諱成茂。吾曾祖也。其弟曰成達。通津縣令。縣令生貞臣。秉節校尉。娶敎授柳洽女。以嘉靖乙巳生公。公諱某字某。年八歲。母歿。三十四。中司馬試。四十二。父歿。四十九。妻亡。五十六而逝。吁窮哉。妻楊氏。引儀沃之女。生二男。傳芳,聯芳。公慟母早歿。嘗服父喪。旣闋。追服母喪三年而後除。其孝於親。友於弟。力於學而不中第。鄕隣愍之。三薦於禮部。卒不試。斯可謂之窮也。銘曰。旣優於學。終躓於命。惟孝與友。厥垂斯永。

 

[주-01] 洽 : 冾

 

白沙先生集卷之二 / 墓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