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사지보감국사묘응탑비
(瑩源寺地寶鑑國師妙應塔碑)
[수량] 1
[소재지] 경남 밀양시 황성동 112번지
[문화재지정번호] 경남 지방문화재 제13호
[문화재지정일자] 1972년 02월 12일
[소유자] 경남 밀양시
↑영원사지보감국사부도(瑩源寺址寶鑑國師浮屠.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호).
■ 영원사지보감국사묘응탑비(瑩源寺地寶鑑國師妙應塔碑)
보감국사(寶鑑國師)는 고려 말기 충숙왕(忠肅王)때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를 지낸 고승(高僧) 혼구(混丘: 1251~1322)의 시호(諡號)인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왕명을 받들어 "조계종자씨산영원사보감국사비명병서(曹溪宗慈氏山瑩源寺寶鑑國寺碑銘竝書)"라는 비문(碑文)을 지었다,
이때 세운 비석(碑石)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이나 밀주구지(密州舊誌) 등에도 "비상입기지(碑尙立基地)"라고 적고 있어서 이곳에 있었던 것을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밀주승람(密州勝覽)에서도 "영원사재자씨산하고려이제현선승보감 비명비석상재(瑩源寺在慈氏山下高麗李齊賢선僧寶鑑碑銘碑石尙在)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봐서 훼손(毁損)하기 전까지는 남아 있었든 것 같으나 지금은 유실(遺失)되어 완형의 비석을 대하기는 어렵게 되었고, 지대석(地帶石)도 없이 다만 비석의 일부(一部)인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만 남아 있다.
귀부(龜趺)의 중앙에는 비신(碑身)을 박은 장방형(長方形)의 홈이 있고 그 둘레에 구름 문양(雲文)을 새겼으며 등허리에는 귀갑문(龜甲文)이 정연하다. 귀두(龜頭)의 목은 바로 선(直立)자세이고 입을 벌린 괴수(怪獸)의 형태인데 조각은 비교적 섬세하다.
이수(이首)는 원상(圓狀)의 삼각형으로 앞뒤에 두 마리씩의 용(龍)이 여의주(如意珠)를 다투는 형상을 하고 있어 고려시대 탑비(塔碑)의 일반적인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익재난고 제7권
■ 고려국 조계종 자씨산 영원사 보감국사 비명병서
(高麗國 曹溪宗 慈氏山 瑩源寺 寶鑑國師碑銘幷序)
지은이 : 익재 이제현
근세의 큰 비구(比丘)로서 부처의 도를 밝혀 후학(後學)을 계도한 이는 보각국존(普覺國尊)인데, 그의 무리가 대개 수백 수천 명이지만 능히 어려운 도를 뚫고 깊은 이치를 파악하여, 묘계(妙契)가 줄탁(啐啄)한 사람은 오직 보감국사(寶鑑國師)가 그런 사람이다.
국사는 휘가 혼구(混丘), 자는 구을(丘乙), 구명은 청분(淸玢), 속성(俗姓)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증 첨의평리(贈僉議評理)로 휘는 홍부(弘富)이며 청풍군(淸風郡) 사람인데, 황려 민씨(黃驪閔氏)의 딸에게 장가들고 복령사(福靈寺) 관음불상에게 기도하여, 충헌왕(忠憲王) 27년(신해) 7월 27일에 국사를 낳았다.
어려서 여러 아이들과 놀이할 적에 기와 조각과 돌을 모아 탑(塔)과 묘(廟)를 만들었고 쉴 때는 벽을 향하고 앉아 무엇을 생각하는 것같이 하였으며, 용모가 단정 엄숙하고 성격이 또한 자애 다정하였기 때문에 친척들이 작은 아미타불이라고 하였다.
열 살 때 무위사(無爲寺)의 천경선사(天鏡禪師)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며, 구산(九山)의 승과(僧科)의 상상과(上上科)를 수석으로 급제하였으나 버리고 보각국존에게 가서 종학(從學)하되 스스로 다짐하기를, 심오한 데를 보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기로 했다.
처음에 보각국존이 꿈을 꾸니, 중 하나가 와서 스스로오조(五祖)의 연(演)이라 하였는데, 이른 아침에 국사가 와서 뵙자 마음에 홀로 이상하게 여겨 오다가, 이때에야 그의 민첩하고도 부지런함을 감탄하며 여러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꿈이 증험이 있다.’ 하였다.
보각국존의 자리를 이어받아 개당(開堂)하자 여러 사람을 거느림이 법도가 있었고 강론이 하나로 그어 놓은 듯이 일정하였으며, 옹용(雍容)하고 한아(閑雅)함은 더 나았었다. 충렬왕은 가리 법복(伽梨法服)을 내리고 누차 하비(下批 임금이 내리는 글)하여 대선사(大禪師)에까지 올렸으며, 덕릉(德陵 충선왕)이 즉위하여 서는 특히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을 제수하고 ‘대사자 왕법보장 해국일(大師子王法寶藏海國一)’이라는 호를 내렸다.
황경(皇慶) 계축년(癸丑年 충선왕 5, 1313)에 덕릉이 왕위를 물려주고 영안궁(永安宮)에 거처할 때, 누차 중사(中使 왕명을 출납하는 내시)를 보내며 수레로 맞아다가 조용히 도를 담론하여, 더러는 해가 저물 때도 있었다.
이에 국왕과 의논하여 조종(祖宗)의 전례대로 국사를 ‘오불심종 해행원만 감지왕사(悟佛心宗解行圓滿鑑知王師)’로 책명(冊命)하고, 두 대의 임금이 함께 제자가 되어 배우기를 청하였으니 예전에 없던 일이다.
두어 해 되자 물러가기를 매우 간절하게 청하므로 윤허(允許)하고 이어 영원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 절은 본래 선원(禪院)이던 것이, 원정(元貞-원 나라 성종의 연호) 무렵에 지자종(智者宗 천태종(天台宗)의 별칭)의 소유가 되었다가 국사 때문에 비로소 전대로 복구하게 된 것이다.
지리(至理) 2년 겨울 10월에 감기를 앓게 되자, 송림사(松林寺)로 옮겨가 유서를 써서 봉인(封印)하여 시자에게 주고, 30일째는 목욕하고 설법(說法)하여 여러 제자들과 고별하였는데 그 대략에, “가시숲에 태어나 전란 시대를 살아왔네. 오늘의 가는 길 과연 어디인지? 흰 구름 끊긴 곳이 청산(靑山)인데, 떠나는 사람 다시 그 청산밖에 있네.”하고, 방장(方丈)으로 돌아와 걸상에 의지하고 세상을 떠났다.
국사가 침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었고, 여러 학문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시문을 지은 것이 많았는데 《어록(語錄)》 2권, 《가송잡저(歌頌雜著)》2권,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 2권, 《중편지송사원(重編指頌事苑)》 30권을 남겨, 총림(叢林)에 전파되었다.
중오(中吳)의이 몽산(異蒙山) 선사(禪師)가 일찍이 《무극설(無極設)》을 지어 선박(船舶) 편에 부쳐왔었는데, 국사가 묵묵히 그 의미를 터득하여 스스로 호를 ‘무극노인(無極老人)’이라 하였다. 향년(享年)은 73세요 승력(僧歷)은 63년이다.
왕이 부고를 듣자 애도하며 ‘보감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호(塔號)를 ‘묘응(妙應)’이라 하였으며, 이어 신(臣) 모(某=이제현)에게 명하여 그의 덕행을 비석에 새기도록 하였다. 신은 듣건대, 부처는 즐겨 복(福)과 지(智)를 말하여 자기 자신을 닦으므로 사람들이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 두 가지 중에 하나만 없어도 제 자신조차 세울 수 없는 법인데, 어찌 남에게 신임을 받겠는가?
국사는 무릇 일곱 차례 품계(品階)가 오르고 여섯 차례 호(號)를 받았으며, 아홉 차례 이름난 절을 순례하고 두 차례나 내원(內院)에서 지냈으며, 온 나라 불교의 우두머리가 되어 두 왕의 스승 대우를 받되 이론하는 사람이 없이 모두 당연하게 여겼으니, 이른바 복과 지가 둘 다 존엄한 이가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되겠는가?
글을 지어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하더라도, 신은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아래와 같이 명한다.거룩한 저 심종(心宗 불심종(佛心宗)의 약칭) 바다 건너 동으로 와, 아홉 종파(宗派) 중에 도의(道義) 스님 제일인데, 끊임없이 이어받아 대마다 철인 났도다.
바른 길 지키고 잘못을 고치기로는 운문(雲門)이 으뜸인데, 박학(博學) 독행(篤行)하고 뛰어나게 총명하며 현윤(顯允)한 감지(鑑知) 스님, 그 적통(嫡統) 받았도다. 심오한 생각 탁월한 재주라 그 충혜왕의 휘(諱)는 정(禎)이다. 를 답습하여 조종(祖宗)으로 삼았도다.
종맹(宗盟) 도맡자 모든 방법 다 쓰고, 서사(書史) 섭렵하여 정밀하게 이치 탐구하며, 붓들고 글쓰되 가을 파도 봄 구름 일듯 했네. 임금이 예우 갖춰 좋은 호칭 내리고, 신임할 뿐 아니라 북면(北面)하여 스승으로 삼았도다.
승려들이 경하하고 의지하나 국사는 큰 체하지 않고 산 속에 들어 앉아 나라의 복 빌었도다. 훤한 그 모습 갑자기 숨자 왕의 마음 측은하여, 신 시켜 명을 지어 억만 년 전하게 하였네. 배우지 않으면 어긋나고 생각지 않으면 어리석은 법이니, 승려들이여, 힘쓰기를 나는 바라노라.
[주1]줄탁(啐啄) : 사제간에 서로 부합되는 것. 줄은 병아리가 태어날 때,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 탁은 암닭이 밖에
서 쪼아 주는 것.
[주2]오조(五祖)의 연(演) : 송대(宋代)의 기주(蘄州,지금의 호북성 기춘현(蘄春縣) 오조산(五祖山)의 법연선사
(法演禪師).속성(俗姓) 은(鄧).
[주3]운문(雲門) : 운문종(雲門宗)의 약칭. 운문산(雲門山 광동성 소주에 있음)의 문언(文偃)을 종조(宗祖)로 한
선종(禪宗)의 한 파.
'■ 경주이씨 > 익재이제현선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중 수교 20년 - 사대주의 산맥을 넘어 ② 익재 이제현 (0) | 2012.09.30 |
---|---|
원나라 수도에 세운 만권당은 고려 자주를 위한 외교사령탑. (0) | 2012.09.16 |
익재문집 발(三간본) - 유성룡 (0) | 2011.08.17 |
익재선생 연보 후서(益齋先生 年譜 後敍) (0) | 2011.08.15 |
효행록서(孝行錄序) - 이제현(李齊賢) (0) | 2011.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