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한·중 수교 20년 - 사대주의 산맥을 넘어 ② 익재 이제현

야촌(1) 2012. 9. 30. 02:24

‘팍스 몽골리카’시대, 그의 시는 고려를 지키려는 절규였다.

[중앙일보]입력 2012.09.29 00:46 / 수정 2012.09.29 00:46

 

한·중 수교 20년 - 사대주의 산맥을 넘어 ② 익재 이제현

 

중국 삼국시대 유비와 제갈량이 넘나들었던 험준한 관문인 쓰촨성 검문각(劍門閣).

여기서 당 수도가 있던 장안(지금은 시안)으로 이어지는 길이 ‘촉도’다.절벽에 구멍을

내 나무를 박은뒤 그 위에 길을 낸잔도(棧道)가 곳곳에 남아 있다. 이제현이 충선왕의

명령을 따라 오간 길이다.

 

지금이야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북경·北京)에 가는 데 한 시간 남짓이 걸릴 뿐이다. 그러나 육로를 따라 개성에서 베이징으로 1600여㎞의 길을 가야 했던 고려와 조선 때는 무려 50일 정도 걸렸다. 길의 험난함을 별도로 계산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개성과 지금의 베이징까지 왕복 약 2만4000㎞, 중국 내지 약 4만350㎞를 오간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고려의 최고 문인 익재 이제현이다. 그는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당시 팍스 몽골리카의 중심인 원(元)의 수도 연경(燕京)에 이르는 ‘연행(燕行)’의 여정만 6~8차례, 연경에서 중국의 길 중에 가장 험하다고 알려진 촉도(蜀道)를 지나 쓰촨(四川)성 아미산, 연경에서 대운하를 따라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 연경에서 서북방 간쑤(甘肅)의 험지 도스마를 오고 간 왕복의 여정을 기록한 인물이다.

 

익재 이제현은 이를테면 700년 전 한반도 지식인으로서 광활한 중국 대륙을 가장 긴 기간에 걸쳐 답사한 여행자다. 그러나 그 가슴에는 팍스 몽골리카의 힘이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 고려의 국운을 마지막까지 지키려는 비장함이 가득 들어 있던 여행자였다.

 

지금이야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북경·北京)에 가는 데 한 시간 남짓이 걸릴 뿐이다. 그러나 육로를 따라 개성에서 베이징으로 1600여㎞의 길을 가야 했던 고려와 조선 때는 무려 50일 정도 걸렸다. 길의 험난함을 별도로 계산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개성과 지금의 베이징까지 왕복 약 2만4000㎞, 중국 내지 약 4만350㎞를 오간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고려의 최고 문인 익재 이제현이다. 그는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당시 팍스 몽골리카의 중심인 원(元)의 수도 연경(燕京)에 이르는 ‘연행(燕行)’의 여정만 6~8차례, 연경에서 중국의 길 중에 가장 험하다고 알려진 촉도(蜀道)를 지나 쓰촨(四川)성 아미산, 연경에서 대운하를 따라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 연경에서 서북방 간쑤(甘肅)의 험지 도스마를 오고 간 왕복의 여정을 기록한 인물이다.

 

익재 이제현은 이를테면 700년 전 한반도 지식인으로서 광활한 중국 대륙을 가장 긴 기간에 걸쳐 답사한 여행자다. 그러나 그 가슴에는 팍스 몽골리카의 힘이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 고려의 국운을 마지막까지 지키려는 비장함이 가득 들어 있던 여행자였다.

 

 

▲그는 한때 원나라 황실의 태자 스승인 태사(太師)의 직위를 맡았던 고려 국왕

   충선왕의 충실한 동반자요, 기록자였다.

 

또한 충선왕이 연경에 만권당(萬卷堂)을 지어놓고 고려의 자주(自主)를 위해 기울인 외교적 노력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호흡을 함께했던 문인이다. 그가 1321년 1월 2일께 지은 시 하나가 있다. ‘황토점(黃土店)’이라는 제목의 시다. 그 안에는 망연자실(茫然自失)의 심정이 진하게 들어 있다. 절망에 가까운 비탄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세상 일, 아이고, 차마 들을 수 없구나/ 낡은 다리에 말 세우고 할 말을 잊는다…여기저기 검은 산이 눈물로 가리운다…죽어도 부끄럽다….”(『서정록을 찾아서』, 지영재 저)

 

익재가 남긴 시문을 통해 그의 중국 여행에 담긴 진정한 의미와 고려 충선왕의 외교적 노력을 치밀하게 고증한 지영재(중국문학) 전 단국대 교수는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원나라에서 고려의 자주적 행보를 위해 만권당을 차려놓고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던 충선왕이 모함에 걸려 머리를 깎인 뒤 티베트로 유배 갔다는 소식을 들었던 이제현이 당시의 충격을 묘사한 내용”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원 황실이 충선왕을 붙잡아 구금했을 때 그의 구원을 위해 송도(개성)에서 만권당이 있던 연경으로 급히 간 익재는 충선왕이 유배 길에 오른 날 황토점에 도착했다. 그리고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황토점은 지금도 있다. 익재가 활동할 무렵의 황토점은 고려인들이 연행의 길에 올라 연경에 도착하기 직전 묵었던 숙소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취재팀이 찾아간 황토점은 이제 조그만 촌락에 불과했다.

 

베이징 기차역에서 철로로 34㎞, 시의 외곽 창핑(昌平)구에 속해 있는 한적하고 쓸쓸한 마을이다. 이곳 어디에도 익재의 자취를 느낄 만한 유적은 없었다. 그러나 중국의 곳곳에는 익재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드넓은 분지(盆地)인 쓰촨성의 청두(成都)평원, 하천이 곳곳에 발달한 동남부 항저우 일대, 실크로드가 이어지는 시안(西安) 등 서북부 지역에는 700년 전 고려 왕조의 명맥을 유지하고자 안간힘을 썼던 위대한 시인 익재의 숨결이 배어 있다.

항저우 영은사(靈隱寺) 냉천정(冷泉亭)은 앞 회에서 소개한 바 있다. 취재팀이 청두에서 자동차로 3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중국 역사에서 유명한 검문각(劍門閣)이다. 중국 삼국시대 유비와 제갈량이 넘나들었던 험준한 관문(關門)이다.

여기서 당나라 때 수도가 있던 장안(지금은 시안)으로 이어지는 길이 이른바 ‘촉도’다.

 



고려 말 원나라의 화가인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 국보 제110호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화폭 상단에 적힌 제문(題文)에 따르면 1319년(충숙왕 6년) 당시 33세의 이제현은 충선왕을 따라 중국 땅을 유람했다.
당나라의 시인 중 으뜸으로 꼽는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촉나라 가는 길은 하늘에 오르는 길보다 더 험난하다”고 읊었던, 중국에서 가장 험로(險路)로 치는 길이다.

절벽에 구멍을 내 나무를 박은 뒤 그 위에 길을 낸 잔도(棧道)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익재는 만권당을 차려놓고 외교적 노력을 펼치던 충선왕의 명령에 따라 원나라 자무치, 즉 역참(驛站)을 이용하면서 이 험난한 길을 오갔다.

그 시점은 1316년 여름이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319년에는 중국 동남부의 ‘강남(江南)’으로 여행을 떠난다. 둘 다 ‘형편’이 좋던 시절이었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자인 충선왕의 정치적 입지가 좋았기 때문이다.

1319년의 강남 여행에서는 익재가 충선왕을 수행했다. 충선왕은 익재보다 12세 연상으로 큰형 또는 작은삼촌뻘이었다. 익재는 그렇게 ‘형편’ 좋았던 시절의 여행 중 남긴 시에서는 감정의 기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전쟁을 회고하거나 춘추전국시대 등 중국의 과거 유명 인물들의 발자취에서 정치적 교훈을 되새겨보는 문장들을 주로 남긴다.

그러나 충선왕 구명운동을 벌이다 마침내 충선이 멀고 먼 티베트의 사꺄에서 간쑤성 도스마로 유배지를 바꿔주는 감형(減刑)의 일종인 양이(量移)를 받은 뒤 그를 마중하기 위해 도스마로 떠나는 3차 중국 여행길에서의 시는 그리움과 반가움, 우려와 초조를 함께 내비치고 있다.

 
특히 조국인 고려의 수도 개성, 즉 송도(松都)을 그리는 시가 이채를 띤다. 그래도 익재가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곳은 충선왕이 세우고 운영했던 고려 외교의 현장 만권당이었다.

그는 충선왕이 티베트의 사꺄로 유배 가 있는 동안 만권당에서 원나라 사대부들과 교류하면서 여론 형성을 통해 충선을 구원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원나라 승상 바이주를 비롯한 실권자들에게 열심히 청원을 내고, 한족(漢族) 사대부들로부터 우호적인 여론 형성을 위해 만권당 활동을 계속 이어간다. 충선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던 충숙왕 또한 부친의 구명을 위해 여러 차례 연경을 오간다.

 
팍스 몽골리카의 시대에 고려의 자주성을 이어가기 위해 펼쳐졌던 이들의 노력이 모두 만권당을 중심으로 뻗어갔으리라는 게 지영재 전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이런 활동은 충선왕이 승하한 뒤에도 이어져 익재를 비롯해 연경으로 간 수많은 고려인이 만권당을 중심으로 당시로서는 세계의 초강대국 역할을 맡았던 원나라 상대의 강대국 외교를 펼쳤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익재의 시는 마구 지어지지 않았다. 일정한 독자를 염두에 둔 정치적 작시(作詩)였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1316년 아미산 여행, 1319년 강남 여행, 충선왕이 붙잡힌 뒤 급히 개성을 떠나 연경으로 향하는 1320년의 여행, 도스마로 충선왕을 마중하러 나가는 1323년의 여행길에만 집중적으로 지어진다.


지영재 전 교수는 “충선왕의 외교적 목적에 따라 시가 지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충선왕이 불행한 사건에 휘말렸을 때는 여론 형성을 통해 충선왕을 구원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시가 만들어졌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나머지 기간에는 일절 시작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익재의 시가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지어졌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라고 그는 풀이한다.


베이징에 있었던 만권당, 강남 여행길의 여러 노정(路程), 촉도의 험로를 넘어 이어졌던 쓰촨 분지에서의 회고로 드러나는 익재의 시는 그를 읽고 감상하는 청자(聽者)를 의식한 작품들이다.

 

언뜻 보면 자연을 읊는 음풍농월(吟風弄月), 중국 고전에 대한 이해를 과시하는 시작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의 국운을 건 충선왕의 정치적 노력에 맞춰 익재의 시를 편차(編次)해 보면 그 의도는 충분히 드러난다.

 

그곳에는 쓰러져가는 고려를 지키기 위한 개혁 군주 충선왕과 그의 정치적 목적을 충실히 이해하며 그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던 익재의 고뇌가 엿보인다. 만권당은 그런 충선왕과 익재의 간고한 노력이 숨어 있던 곳이다.

고려인들이 펼치는 만권당의 활동은 충선왕 사후 27년이 지나 등극한 공민왕 때까지 이어진다. 장기간에 걸친 몽골의 통치로 점차 제 풍습과 문화를 상실해가던 고려의 막바지 운명이 힘겨운 고비를 맞을 때였다.

700년 전의 만권당은 한반도 주변 국제정치의 험한 풍랑을 살피는 눈과 귀였다. 그러나 이제 만권당은 잊힌 이름이다. 바깥으로 눈을 돌리지는 못하면서 내정(內政)만을 두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 현대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특히 그 이름을 잊은 지 아주 오래다.

특별취재팀=유광종·허귀식·박소영·예영준·민경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