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90

익재문집 노림재본 중간지 발문

익재문집 제7간 병인 1923년(왜정) ■익재문집 노림재본 중간지 발문 도(道)는 하늘에서 나온다. 하늘이 변하지 않으므로 도 또한 변하지 않는 것인데, 문자(文字)로 기록하는 데 이르러서는 이를 변치 않게 하는 것이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아! 우리 선조(先祖)의 이 문집(文集)은 도(道)가 보존되어 있는 바이니, 마땅히 변함없이 전하여져서 하늘과 함께 그 종시(終始)를 같이하여야 한다. 그러나 한 결 같이 하늘에만 의존한 채 임자년(1434)ㆍ경자년(1600)ㆍ계유년(1693)에 중간(重刊)하는 역사(役事)가 없었던들, 이 문집이 지금까지 전하여 오는 것 또한 기필할 수 없었을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과 계유년의 역사와의 기간 또한 이미 오래라서 판본(板本)이 이..

익재문집(益齋文集) 중간지 발문(重刊識跋文) - 허경(許熲)

익재문집 제4간 – 계유 1693년(숙종 19) ■익재문집(益齋文集) 중간지 발(重刊識跋) -허경(許熲) 선생(先生)께서 평소 저술하신 것이 수없이 많은 데도 세상에 전하여 오는 것은 단지 약간의 시편(詩篇) 및 《패설(稗說)》 뿐이다. 지나간 만력(萬曆) 경자년(1600, 선조 33)에 상서(尙書) 이시발(李時發)이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적에 판각(板刻)하였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자획(字畫)이 이지러져 읽을 수가 없었으므로 식자(識者)들이 모두 탄식하고 애석해 하였다. 내가 마침 본주(本州 경주를 가리킨다)의 부윤(府尹)으로 와있었으므로, 세대가 오래가면 마침내 민멸(泯滅)될까 염려하여 드디어 다시 판각하여 중간(重刊)하였다. 선생의 이름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오래전하여 질뿐만이 아니라, 후생..

죽림당 유허비(竹林堂 遺墟碑)/종보 원고 자료

개성 죽림당 유허비 - 북한 보존 유적 제1154호 북한의 개성시 자남산(子男山) 동쪽 기슭에 익재공 께서 생전에 사셨던 옛 집터를 죽림당(竹林堂)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북한이 전후 남측 인사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곳이지만 이재정(李在禎) 제33대 통일부 장관이 취임하면서 공의 산소와 함께 이곳 죽림당을 2008년 2월 13일 문중인사 213명에께 첫 공개한 곳입니다. 아울러 남북 교류가 잘 이루어져 향후 후손들이 자유로히 답사할 수 있기를 고대하며 본 유허 비문은 2007년 봄 북측으로부터 탁본 문을 전달받아 그해 처음으로 국역을 해서 필자의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 바 있습니다. 본 유허 비문은 찬인 덕봉 이진택 선생의 문집인 덕봉집 3책(冊) 중 2책 38면에 ‘선조 익재 선생 유허비문’ 이라는 제(題)..

[漢詩] 어촌 낙조(漁村落照)

漁村落照(어촌 낙조) 어촌의 저녁노을 落日看看銜遠岫(낙 일간 간 함원 수) 떨어지는 해는 차차 먼 산봉우리에 빠지고 歸潮咽咽上寒汀(귀 조인 인상 한정) 몰려오는 조수는 철썩철썩 찬물 가를 친다. 漁人去入蘆花雪(어인 거 입 로 화설) 고기 잡는 사람들은 흰 갈꽃 속으로 들었는데 數點炊煙晩更靑(수점 취연 만경 청) 두어 점 밥 짓는 연기 날 저물어 더욱 푸르다. 지은이 : 익재 이제현 1287년(충렬왕 13) ~ 1367년(공민왕 16) ※이 詩는 익재공 께서 전남 강진군 대구면 구수리 인근에 들렸을 때 지은 詩입니다.

우정승 문충공 익재 선생 전[17世]

우정승 문충공 익재 선생 전[17世] 이제현(李齊賢)의 자(字)는 중사(仲思)요. 초명은 지공(之公)이니 검교정승 진(瑱)의 아들이다. 충렬왕(忠烈王) 신축(辛丑) 二十七년(1301)에 나이 15세로 성균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또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말하기를 이것으로는 족히 나의 배운 것을 다하지 못하겠다하고 드디어 문을 닫고 공자. 맹자. 사마천(司馬遷=漢나라의 문장가) 한유(韓愈)의 글을 읽었다. 읽기를 이미 익숙한 뒤에 붓을 잡고 글을 쓰면 옛날 작자(作者)의 체법(體法)이 있으니 진(瑱)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우리 가문을 크게 할 사람은 반듯이 이 아이라고 하였다. 무신(戊申) 34년(1308)에 선발되어 예문관과 춘추관에 들어갔고, 기유(己酉) 충선왕(忠宣王) 원년(1309)에 발탁(拔擢) ..

익재 진자찬(益齋眞自贊)

↑이제현 선생 유상(遺像). 《익재난고》 앞부분에 판각되어 있다. 초상화가 오래 보존되지 못할까 걱정되어 문집을 만들 때 새로 새겨 넣었다 는 기록이 부기되어 있다. 익재 진자찬(益齋眞自贊) 홀로 공부하여 고루하였으니 도를 들은 것이 자연 늦었도다. 불행은 모두 자신이 만든 것, 어찌 스스로 반성하지 않으랴.백성에게 무슨 덕을 베풀었다고, 네 번이나 재상이 되었단 말인가. 요행으로 그렇게 된 일이기에 온갖 비난을 불러들였구나. 못나고 보잘것없는 내 모습그려서 또 무엇에 쓰겠는가만 나의 후손에게 고하여 주노니 한 번 쳐다보고 세 번 생각하여 그런 불행 있을까 경계하며 아침 저녁으로 꾸준히 노력하라. 만일 그런 요행 바라지 않는다면 불행을 면하게 될 것을 알리라. 《익재난고(益齋亂藁)》 제9권- 선생이 자신..

급암 시집 서(及菴詩集序)- 이제현(李齊賢)

급암시집 서(及菴詩集序) - 이제현(李齊賢) ◇급암은 민사평(閔思平)의 호임 우리 선군(先君)께서 일찍이 과거 시험을 관장하실 적에 이름난 선비 23인을 선발하셨다. 높은 벼슬에까지 오른 이로는 밀직(密直) 박인간(朴仁幹),- 원문 훼손 -급암(及菴) 민사평(閔思平)은 선군이 아끼시던 사람으로, 성품 이 솔직하고 겉치레를 하지 않았으며 매번 술이 얼큰해질 때면 시를 지었는데 속세의 말이 없었다. 아들은 없고 김씨(金氏) 성을 가진 두 외손자 제민(齊閔)과 제안(齊顔)이 있다. 급암(及菴)이 세상을 떠나자 제민 이 유시(遺詩) 약간을 수습하여 엮어서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의 시를 읽어 보고 그의 평생을 상상해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에 젖었다. - 원문 훼손 - 더욱 적은데 하물며 선군께서 - 원문 훼손..

누실시(陋室詩) - 이제현

■ 누실(陋室)이란? 겸양(謙讓)의 용어로 누추한 집 또는 나의 집을 말한다. 급암시집 제2권 / 율시(律詩) / 민사평『閔思平, 1295년(충렬왕 21)~1359년(공민왕 8)』 저 에 차운하여 송 학사에게 축하하며 이담 송천봉이다.[次陋室詩韻賀宋學士 李湛 宋天逢] 妙齡被薦起鄕廬(묘령피천기향여) / 젊은 날에 천거되어 고향집에서 일어나니, 意氣曾如耳數余(의기증여이수여) / 일찍이 의기가 진여를 꾸짖던 장이와 같았네. 果使聲名動場屋(과사성명동장옥) / 과연 명성이 과장을 진동케 하니, 固知富貴大門閭(고지부귀대문려) / 부귀한 대문벌임을 진실로 알겠도다. 榮開豹榜多承寵(영개표방다승총) / 표방이 펼쳐져 영광스럽게도 은총을 많이 받았으니, 功在螢窓好讀書(공재형창호독서) / 공을 이룸은 반딧불이 비치는 창에서..

익재공의 고향 경남 김해로 밝혀져

익재 이제현『1287년(충렬왕 13) ~ 1367년(공민왕 16)』의 고향은 경남 김해(金海)로 밝혀져...... ▲경주이씨 익재공파 보은 장산문중이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한 익재공 영정 지금까지 동암 공과 익재공 부자(父子)분의 고향이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아래 자료를 통해 밝힙니다. 익재(益齋) 문집 연보(年譜)나 어떤 문헌기록에도 익재공이 태어난 곳은 말하지 않고, 김해군(金海君)에 봉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입니다. 군호(君號)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종실(宗室), 외척(外戚), 공신(功臣)에게 준 작호(爵號)인데 이는 왕위의 안전 및 왕권의 확립을 위해 종친이나 외척, 공신을 우대하여 그들에게 명예와 실리(實利)를 부과하여 공(公), 후(侯), 백(伯)의 작호를 주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군호는 봉군(封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