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우정승 문충공 익재 선생 전[17世]

야촌(1) 2018. 11. 17. 22:04

우정승 문충공 익재 선생 전[17世]

 

이제현(李齊賢)의 자(字)는 중사(仲思)요. 초명은 지공(之公)이니 검교정승 진(瑱)의 아들이다. 충렬왕(忠烈王) 신축(辛丑) 二十七년(1301)에 나이 15세로 성균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또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말하기를 이것으로는 족히 나의 배운 것을 다하지 못하겠다하고 드디어 문을 닫고 공자. 맹자. 사마천(司馬遷=漢나라의 문장가) 한유(韓愈)의 글을 읽었다.

 

읽기를 이미 익숙한 뒤에 붓을 잡고 글을 쓰면 옛날 작자(作者)의 체법(體法)이 있으니 진(瑱)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우리 가문을 크게 할 사람은 반듯이 이 아이라고 하였다. 무신(戊申) 34년(1308)에 선발되어 예문관과 춘추관에 들어갔고, 기유(己酉) 충선왕(忠宣王) 원년(1309)에 발탁(拔擢) 되어 여러 번 성균 악정(成均樂正)으로 천직(天職)하였다.

 

충선(忠宣)이 인종(仁宗)을 도와 내란을 이미 평정하고 무종(武宗)을 영립하니 심히 총애하여 우대하였다. 드디어 충숙왕(忠肅王)에게 나라를 전하고 태위(太尉)로 연경(燕京=원나라의 서울/베이징의 옛 이름)에 머물러 있는데 원 중(苑中)에 만권 루(萬卷樓)를 지어놓고 서사(書史)를 즐기면서 말하기를 경사(京師)의 문학하는 선비는 다 천하에서 선발된 사람들인데 우리 부중(府中)에는 그런 사람이 있지 않다하고 드디어 제현(齊賢)을 불러 연경에 이르게 하였다.

 

이때 조수(姚燧),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趙孟頫) 등 여러 사람들이 다 있었다. 제현이 날마다 그들과 더불어 종유(從遊)하면서 문장이 날로 진취하니 조수(姚燧) 등이 칭찬하여 말지 아니하였다. 성균 제주로 옮기었고 서촉(西蜀에 사신으로 갔는데 이르는 곳마다 시(詩)를 쓰서 읊은 것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었다.

 

그 후 선부전서(選部典書) 승직하였다. 충선왕이 강남에 향을 내리어 제현이 권한공(權漢功)과 더불어 좇아갔는데 왕이 강산누대(江山樓臺)를 만나면 문득 빈객과 더불어 술을 기울이고 시(詩)를 지으면서 말하기를 이 자리에 이생(李生=익재를 말함)이 없어서는 아니 되겠다고 하였다.

 

뒤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고려시대 밀직사의 從二品벼슬)로 옮기었고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號)를 주었으며 또 전답과 하인을 상으로 주었다. 연오(燕吳)에 모시고 좇아갔던 공으로 아뢰어 고려왕부의 일을 처단하는 관직을 주었고 뒤에 다시 원나라에 갔는데 유청신(柳淸臣), 오잠(吳潛) 등이 도성에 글을 올리어 본국을 내지(內地=종속국에 대해서 자기나라 또는 ‘본국을 이르는 말)와 같이 입성(立省=고려 땅을 원나라의 성으로 분립하자는 것)을 하자고 청하였다.

 

이제현이 글을 도당(都堂=나라의 최고 정무기관)에 올리어 말하기를 중용에 가로대 무릇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구경(九經=공자가 주창한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데 긴요한 아홉 가지 법도로

첫째 몸을 닦을 것(修身), 

둘째 어진 이를 존경할 것(尊賢), 

셋째 친척을 사랑할 것(親親), 

넷째 대신을 공경할 것(敬大臣), 

다섯째 여러 신하를 자신의 몸같이 보살필 것(體群臣), 

여섯째 백성을 제 자식처럼 대할 것(子庶民), 

일곱째 각 분야의 기능인을 모이게 할 것(來百工), 

여덟째 원방인(遠方人)을 관대히 대우할 것(柔遠人), 

아홉째 제후를 위로하여줄 것(懷諸侯) 등이다.)이 있는데 행하는 것은 첫째입니다。

 

끊어진 대를 이어주고 피폐한 나라를 들어주며 어지러운 것을 다스리고 위태한 것을 유지시켜주며 가는 예는 후하게 하고 오는 예는 박하게 하는 것이 제후를 회유(懷柔) 하는 것인데 해설하는 자가 말하기를 후계 없는 자는 이어주고 이미 멸망된 자는 나라를 봉하여 상하(上下)로 하여금 서로 편안하게 하고 대소(大小)가 서로 도와주어 천하가 그 충성을 다 받치어 왕실을 호위하나니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형(邢)을 옮기어 자기 집으로 돌아가 듯하게 하였고 위(衛)를 다시 봉하여 망한 것을 잊게 하였으니 제후를 규합하여 천하를 일광(一匡)해가지고 오패(五霸)의 으뜸이 된 것입니다。

 

패자(霸者=실패자)도 오히려 이것을 힘쓸 줄 알거늘 하물며 지역 중(地域 中) 큰데 있으면서 사(四)해로 집을 하는 자이겠습니까? 그 윽 히 생각 하오 건데 소방(小邦)의 시조 왕씨는 개국 이래로 무릇 사백여년에 신하로서 성조(聖朝)에 복종하여 해마다 직책과 공물을 수행한지가 또 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백성에게 덕을 끼친 것이 깊지 아니한 것이 없고 조정에 공을 세운 것이 두텁지 아니한 것이 없었습니다. 세차가 무인년에 있을 적에 요국(遼國) 백성의 금산왕자(金山王子)라는 자가 있어서 중원의 백성을 몰고 동쪽 도서(島嶼=크고 작은 여러 섬)에 들어가 제멋대로 날뛰면서 스스로 방자하니 태조 성무황제가 합진(哈眞) 찰랄(札剌) 두 원수를 보내어 토벌을 하는데 이때 하늘에서 큰 눈이 내리어 먹일 양곡이 통하지 못하였는데 우리 충헌왕이 조충(趙冲), 김취여(金就礪)에게 명하여 양곡을 받치고 기병들이 와 광적(狂賊)을 잡아 죽이기를 파죽지세 같이 빨랐습니다。

 

이에 양원수가 조충과 더불어 형제가 되기를 맹서하야 만세에 잊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또 세종황제가 강남에 돌아오시는데 우리 충경왕(忠敬王=고려 24대 元宗)께서 천명이 돌아가 인심이 복종하는 것을 알고 오천(五千) 여리를 산 넘고 물을 건너 양초(梁楚)들에서 맞이하여 뵈었습니다.

 

충렬왕이 역시 몸소 조근(朝覲=천자에게서 뵙는 것) 하여 일찍이 게을리 아니하였고 일본을 정벌할 적에도 피폐한 부세(賦稅)를 다 기울이어 전구(前驅=앞장서서 가는 군사)가 되었고 합단(哈丹)을 추봉하는 데는 관군(官軍)을 도와 괴수를 섬멸하였습니다.

 

천자에게 부지런히 받친 공효(功效)는 가히 낱낱 치 거론할 수가 없는 고로 공주를 강혼(降婚)하여 대대로 구생(舅甥)의 호의가 두터워 옛 풍속을 고치지 아니하고 종조(宗祧)의 사직을 보전하여 왔는데 이것은 대대로 황조(皇詔=天子의 조칙詔勅)의 유지를 힘입은 것입니다.

 

지금 듣사오니 조정이 소방(小邦)에 행성(行省)을 세워 제로(諸路)에 견주려고 한다하오니 만약 과연 그렇게 한다면 소방의 공은 논하지 아니하더라도 그 세조(世祖) 조칙(詔勅)의 뜻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연전 十一월에 새로 내리신 조칙의 조목을 읽사오니 간사하고 정직한 것으로 하여금 길이 다르게 하고 해우(海宇=海內의 땅)로 하여금 평안히 다스려지게 하여 중통(中統) 지원(至元=元 世宗의 年號)의 치적을 회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성성(聖上)이 이 같은 덕음(德音)을 발하신 것은 실로 천하四해의 복이옵니다. 홀로 소방의 일에 있어서 세조 조서(詔書)의 뜻을 몸 받지 아니하시면 옳겠습니까?

 

중용의 글은 성문(聖門)에서 후세에 교훈을 준 것이요. 빈말이 아니옵니다. 그 말한 것을 보면 끊어진 것은 내가 다시 이어주고 피폐한 것은 내가 다시 일으켜주며 어지러운 것은 다스려주고 위태한 것은 편안하게 하여준다는 것인데 지금 아무 연고 없이 자그만 나라의 四百年 왕업을 가지고 하루아침에 폐절(廢絶) 시키어 사직으로 하여금 주인이 없게 하고 종묘로 하여금 제사를 궐하게 하니 이치로 헤아리어 본다면 반드시 그렇지 아니할 것입니다.

 

다시 소방을 생각해보면 땅은 千리에 지나지 아니하고 산림천수(山林川藪)로 쓸데없는 땅이 十분의 七이되어 그 땅의 부세(賦稅)는 조운(漕運=배로 물건을 운반하는 것)을 주용(周用)하지 못하고 그 백성의 부세(賦稅)도 봉록(俸祿)을 지탱하지 못해서 조정용도(朝廷用度)에도 구우(九牛)의 일모(一毛) 같습니다.

 

더욱 땅은 멀고 백성은 어리석어 언어가 상국과 더불어 같지 아니하고 취하고 버리는 것이 중화와 더불어 절연(絶然)히 다른지라 이 일을 들으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니 가히 집집이 가서 타일러 편안하게 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또 왜민(倭民)과 더불어 바다같이 서로 바라보이니 만의 하나라도 이런 일을 듣는다면 우리가 당한 것으로 경계를 하여 스스로 계획을 얻었다고 하지 아니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집사합하(執事閤下)께서는 세조의 공훈을 생각하시었던 뜻을 추급하여 생각하시고 중용의 세상을 훈계한 말씀을 기억하시어 그 나라를 나라로 인증하고 그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여 그 정치와 부역(賦役)을 수행하야 번이(蕃蘺=울타리가 되는 諸侯란 말)가 되어 한계가 없는 복을 받게 하여 주신다면 어찌 삼한(三韓)의 백성이 집집이 서로 경하하야 성덕(盛德)을 노래할 따름이겠습니까?

 

그 종묘사직의 신령이 장차 명명(冥冥)한 사이에서 감동하여 울을 것이 옵니다 라고 하여 의론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충선이 참소를 만나 토번(吐蕃)으로 유배되니 제현(齊賢)이 또 최성지「崔誠之,1265년(원종 6)~1330년(충숙왕 17)」와 더불어 원나라 낭중(郎中) 및 승상 배주(拜住)에게 글을 올리어 왕의 원통함을 아뢰니 배주가 제(帝)에게 말하여 충선(忠宣)을 감형을 해서 타사마로 옮기었다.

 

제현(齊賢)이 가서 충선을 도중에서 뵈오니 밀직사사를 더 제수하고 추성양절(推誠亮節) 공신이란 호를 주었다. 다시 첨의평리 정당문학으로 전직하고 또 김해군으로 봉하였다.

 

충숙왕(忠肅王)이 돌아가니 조적(曺頔)이 난리를 일어 키거늘 충혜왕(忠惠王)이 처서 죽이었다. 그러나 그의 당파가 도성에 심히 많이 있어 반드시 왕의 죄를 저항하고 저하니 원(元)이 사신을 보내어 왕을 불렀다.

 

인심(人心)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화 또한 헤이지 못하게 되었다. 제현(齊賢)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나는 우리 인군의 아들만 알뿐이다. 하고 왕을 좇아 경사에 가서 일을 변론하여 풀으니 공(功)이 일등이어서 철권(鐵券)을 주었다.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많은 소인들이 좋아하지 않고 낮이나 밤이나 터무니없는 말로 선동하여 제현(齊賢)을 중상하니 제현이 두려워하여 자취를 감추어 나오지 않고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하였다.

 

충혜왕이 원에 잡혀있고 충목왕이 왕위에 올라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제수하고 부원군(府院君)을 봉하니 도당(都堂)에 글을 올리어 말하기를 지금 우리나라 국왕전하가 옛날 원자(元子)가 입학(入學)하는 나이(八세를 말함)로 천자의 밝은 명령을 받들고 조종(祖宗)의 중대한 왕업을 이어 전왕(前王)의 전복(顚覆)한 뒤를 당하게 되었으니 가히 조심하여 공경하고 삼가하지 아니하겠는가.

 

공경하고 삼가는 실지는 덕을 닦는 것만 같지 못하고 덕을 닦는 요점은 학문을 향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지금 제주(祭酒) 전숙몽(田淑蒙)이 이미 스승으로 이름 하였으니 다시 어진 선비 두 사람을 선택하여 숙몽(淑蒙)과 더불어 효경,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강의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리를 익힐 것이며 의관자제(衣冠子弟=선비의 자제)로서 말이 정직하고 행동이 근후(謹厚)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예를 사랑하는 자 十인을 선발하여 시학(始學)으로 좌우에서 보도(輔導) 할 것이니 사서(四書)를 이미 익히거든 육경(六經)을 차례로 강명할 것이며 교만하고 사치한 것과 음란하고 방탕한 것과 노래와 미색과 엽구(獵狗)와 치마(馳馬)는 귀와 눈에 접하지 않게 하고 익히어 본성으로 이루어저서 덕에 나감을 깨닫지 못하게 할 것이니 이것이 막급한 당무(當務)입니다.

 

임금과 신하는 의리가 일체(一體)와 같으니 원수(元首=나라를 대표하는 자격을 갇는 사람)와 고굉(股肱=대신을 말한 것임)이 친하게 가까이 하지 아니 하는 것이 옳겠는가.

 

지금 재상은 연회가 아니면 서로 접하지 못하고 특소(특召=임금이 특별히 부르는 것)가 아니면 임금 앞에 나가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이치입니까? 마땅히 날마다 편전(便殿=임금이 평상시 거처하는 御殿)에 앉아서 매양 재상들과 더불어 정사를 의론하고 혹 가히 격일제로 나가 임금을 대하야 비록 일이 없더라도 이 예를 폐ㅖ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하지 아니하면 대신은 날로 멀어지고 환관은 날로 가까워져서 생민의 휴척(休戚)과 종사(宗社=종묘사직이란 말)의 안위(安危)를 임금에게 듣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정방(政房)이라는 이름은 권신 세상에서 생긴 것이고 고인의 제도가 아니니 마땅히 정방을 개혁하여 전리군부(典理軍簿)에 돌려보내고 고공사(考功司)를 두어 그 공훈과 허물을 표하고 그재주와 무재를 논해서 매년 六월과 十二월에 도목 고정 안(都目考政案=벼슬아치의 성적을 채점하는 안 건)을 받아 파직하고 등용하여 길이 항규(恒規)로 하면 청일(請謁=이익을 청구하는 것)의 무리를 끊을 것이고 요행(僥倖)의 문로가 막아질 것입니다.

 

지금 만약 그대로 쫓아가면서 고제(古制)를 회복하지 아니한다면 장래 양장(梁將). 조윤(祖倫). 박인수(朴仁壽). 고겸(高謙)의 무리가 벌떼 같이 일어나 흑책지방(黑冊之謗=두꺼운 종이에 먹칠하여 기름에 결어서 만든 아이들의 글씨연습지면이다. 당시 여기에다 정치 실정의 잘못을 비방한 글을 아이들이 써놓은 고사)을 가히 막지 못 할 가 두렵습니다.

 

응방내승(鷹防內乘)에서 백성에게 가장 심하게 독을 끼치는 것을 전일에 이미 혁파하라는 영을 내리었는데 뒤에 다시 천연하야 중외(中外)가 실망하였고 고룡보(高龍普)로 하여금 나가서 책망을 받게 하였으니 마음에 능히 부끄럽지 아니한가.

 

금은(金銀)과 비단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아니한 것이므로 전배공경(前輩公卿)이 피복에는 다만 흰 비단을 쓰고 기명(器皿)은 유기와 구리와 자기와 옹기를 씀으로 덕릉(德陵=고려 제26대 충선왕의 능)은 옷을 옷을 하나 만드는데 물어서 가격이 중하면 거두어 하지 않았고 의릉(毅陵=고려 제27대 왕 충숙왕)은 일찍이 전왕의 금으로 수놓은 옷과 깃을 꽂은 갓은 우리조상의 옛 법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국가 四百年의 사직을 능히 보전한 것은 한갓 검소한 덕이란 것을 볼 것이다.

 

근 일에 와서 풍속의 사치가 극심하여 백성의 생활이 곤란하여졌고 국가의 용도가 궤핍하여진 것은 이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청하 옵 건데 지금으로부터 뒤로는 금수(錦繡=수를 놓은 비단)로 옷을 하지 말고 금옥(金玉=아주 귀한 것을 비유적으로 한 말) 기명을 하지 말며 현복 승마 자(袨服乘馬者=고운 옷을 입고 말을 탄자)로 하여금 뒤를 옹호하게 하지 말고 각각 검약(儉約)하기를 힘써서 윗사람을 풍간하고 아랫사람을 교화하면 풍속이 두터운 대로 가히 돌아갈 것이다.

 

전자에 박절하고 포악하게 걷은 베는 납자(納者)에게 환급하는 것이 합당하나 관리가 이것으로 인해 간사한 짓을 하여 세궁민이 실혜(實惠)를 입지 못할까 두렵다. 그런고로 마땅히 제사(諸司)에게 분부하여 내년 잡공(來年雜貢=다음해에 받치는 잡된 곡물)에 보충해서 꾸어서 선납(先納) 하는 폐단을 면하게 하라는 문첩(文牒)을 각 고을에 이미 보냈으니 마땅히 일찍이 시행할 것이다.

 

삼(三) 식업을 이미 설립한 뒤에 百관의 봉록(俸祿)이 갖추어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릇 일국의 군주로서 많은 신하들이 생활하는 자료를 취하야 사장(四藏=개인 창고란 말)을 채우는 것이 어찌 후세의 꾸지람이 있지 아니 하겠습니까?.

 

청하옵건대 양궁(兩宮)에 말씀을 드리어 식읍(食邑)을 파하고 광흥창(廣興倉)에 환속시키어 그 봉록(俸祿)을 보충하게 하소서. 경기토전(京畿土田)은 조업구분(祖業口分=옛날 자손이 없는 관원 또는 전사자 군인의 아내에게 등분에 따라 주던 논밭)을 제하고 나머지는 다 꺾어서 지급해 가지고 녹과전(祿科田)으로 하여 실행한지가 근 오십년이 되었습니다.

 

근 일에 와서 권호가문(權豪家門)에서 다 탈취하였는데 중간에 정리하자고 여러 번 의론을 하였으나 문득 위태하다는 말로 임금을 위협하고 속이어 마침내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대신이 굳이 집행하지 아니하는 소치(所致)이다.

 

과연 이것을 혁신한다면 기뻐하는 자가 심히 많을 것이고 기뻐하지 아니하는 자는 권호(權豪) 수십명을 따름이니 무엇을 끌어 과감하게 하지 못합니까? 라고 하였다. 후일에 안축(安軸)과 이곡(李穀)과 안진(安震)과 이이복(李仁復)과 더불어 민적(閔績)이 편찬한 편년광목(編年光目)을 증수하고 또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삼조(三朝)의 실록(實錄)을 편수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여 아직 원(元)에서 나라에 이르지 아니하였는데 제현(齊賢)에게 명하여 임시 권도로 정동성의 정사를 단행하게하고 바로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從一品)을 받았다.

 

이제현이 배전(裵佺)과 박수명(朴守明)을 행성옥(行省獄)에 하옥하여 다스렸고 직성군 노영서(盧英瑞)를 가덕도에 찬성사 윤시우(尹時遇)를 각사에 유배하였으며 찬성사 정천기(鄭天起)를 폄직(貶職=벼슬이 전보다 낮아지거나 면직됨)하여 제주목사로 지도첨의 한 대순(韓大淳)을 기장감무로 하였다.

 

이때 왕은 원나라에 있었고 나라는 공허하였는데 권리를 가진 소인이 틈을 타서 용사(用事)를 하므로 인심이 흉흉하여 다 말하기를 조석에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제현이 왕의 명령으로 주임을 맡아 모든 일을 마땅하게 조치하여 사직이 망하지 아니하였다.

 

조일신(趙日新)이 제현의 직위가 자기위에 있는 것을 보고 깊이 꺼리었다. 제현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일신의 위에 가히 있을 수가 없다하고 드디어 직위를 사양하니 윤허하지 아니하거늘 또 말에서 떨어져 발을 상하게 하고 인하여 잔(戔=해칠 잔)을 올리어 사양하니 또 윤허하지 않고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의 호를 더 주었다.

 

제현이 또 삼잔(三戔)을 올리어 굳이 사양하여 말지 아니하고 드디어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그만하는 것) 하였다. 일신이 착하지 못한 무리들을 많이 모아 밤에 궁중에 들어가 꺼리는 자를 다 살해하고 병 대를 놓아 주살(誅殺=죄를 물어 죄인을 죽임) 하였는데 제현은 직위를 사양하였음으로 화를 면하였다.

 

일신을 잡어 죽이고 제현을 일어키어 우정승으로 하야 순성직절 동덕찬화공신(純城直節同德贊化功臣)의 호(號)를 내리었다. 명년에 사직을 하고 부원군(府院君) 지공거(知貢擧=과거시험의 책임자)로 이색(李穡)을 취하였다.

 

다시 우정승이 되었는데 사양하니 김해 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봉하였고 또 사양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六년에 본직으로 치사하기를 청하니 좇았고 또 잔(戔)을 올리어 늙으므로 해서 물러가기를 청하니 인해 집에 있으면서 국사를 편찬하라고 명하여 사관(史官) 및 삼관(三館)이 다 모이었다.

 

홍건적(紅巾賊)이 들어와 도적질하야 상(上)이 남으로 피란을 가니 제현이 상주(尙州)에 가서 왕을 뵈옵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금일 파천(播遷=임금이 피난 가는 것을 말함)이 당나라 현종(玄宗) 때, 록산(祿山)의 난리와 어찌 다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적이 물러가니 또 홍언박(洪彦博)과 더불어 말하기를 고인(古人)이 칭도하기를 장하도다. 산하(山河)여 이것은 위국(魏國)의 보배로다 라고 하였는데 처음에 만약 험한 곳에 군대를 설치하여 좁은 목을 지키었더라면 제승(制勝) 할 것은 필연 사실인데 일찍이 도모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적이 민약 야전(野戰)을 하였다면 아군이 반드시 패하였을 것인데 다만 비와 눈으로 인하야 적이 방비하지 않았던 틈을 탓 던 고로 승리한 것이니 이것은 종묘사직과 산하(山河)의 도움을 힘입은 것이다 하고 드디어 언박(彦博)과 더불어 손을 잡고 방황하기를 오래하였다.

 

제현의 상모(狀貌)가 헌걸차게 컸고 빠른 말과 급한 안색이 없었으며 사람의 착한 것을 보면 비록 작고 천하며 하위(下位)에 있는 자라도 문득 추천하고 칭찬하야 사람이 듣지 아니하였을까 두려워하였다.

 

그 의론과 사업을 발언하는 데는 학문으로 보충하고 고치어 벌려 놓은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뜻이 어찌 고인과 같지 아니 하리요만은 다만 나의 재주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 고 하였다.

 

만년에 한가히 있을 적에 손이 오면 문득 술상을 설치하고 고금인물(古今人物)의 고하와 일의 시비(是非)를 열심히 논하여 가히 들을만하다. 최해(崔瀣)는 일찍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익재는 천하의 선비 다 라고 하였다.

 

공민왕 十六년(1367년)에 졸하니 연세가 八十一이요.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처음 공민왕이 신돈(辛旽)을 총애할 적에 제현이 왕(王)에게 말씀드리기를 신(臣)이 일찍이 신돈을 한번 보니 그 골 법(骨法)이 옛날의 흉인과 같으니 청 하오 건데 가까이 마옵소서라고 하였는데 신돈이 깊이 혐의를 머금고 백가지로 헐뜯었으나 그 늙었으므로 해를 가하지 못하고 이에 왕에게 말하기를 선비라고 하는 자가 좌주 문생(座主門生=座主는 고려 때 監試에 급제한 자가 試官을 부르는 명칭)이라고 하면서 중외에 포렬하여 서로 간청(干請=利祿을 구하고 사건을 청탁하는 것) 하고 있는데 지금 선비로서 이제현의 제자라고 칭도하는 자들이 드디어 만국 지도(滿國之盜)가 되었으니 원 하오 건데 왕은 살피소서라고 하였다.

 

신돈이 패하기에 미처서 왕이 말하기를 익재의 선견지명은 가히 미치지 못하겠다하였다.

소시 적부터 같은 제배(儕輩)가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익재 선생이라고 칭도 하였던 고로 왕 역시 호를 칭도하였다. 뒷날 공민왕 묘정에 배향하였다.

 

저술한 난고(亂藁) 十권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제현이 일찍이 국사가 갖추어지지 못한 것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어 백문보(白文寶). 이달충(李達衷)과 더불어 가년전지(紀年傳志)를 저작하였는데 제현은 태조(太祖)에서 일으키어 숙종(肅宗)에 이르렀고 문보(文寶)와 달충(達衷)은 예종(睿宗) 이하를 찬술하였는데 문보는 예종과 인종(仁宗) 이조(二朝)를 겨우 초하였고 달충은 취고(就稿=草稿를 이루는 것)도 못하였다가 남쪽으로 옮겨 갈 때 다 산실되었고 오직 제현의 태조기년(太祖紀年)이 남아있었다.

 

세 아들은 서종(瑞種)과 달존(達尊)과 창로(昌路)이다. 서종의 아들은 보림(寶林)이다.

달존(達尊)의 자(字)는 천각(天覺)이니 문장이 좋았고 처음에 문음(門蔭)으로 별장(別將=정7품 무관직)이 되었는데 충혜왕(忠惠王) 원년 과거에 올라 정대(鞓帶)를 받고 사보(司補)로 말미암아 헌납(獻納=都僉議使司의 정5품 관직)에 오르고 조금 있다가 감찰(監察). 장령(掌令=사헌부에 있던 종4품직). 전의부령(典儀副令=典儀寺)의 정4품 관직)으로 옮겼다.

 

충혜왕(忠惠王)이 원나라에 갈 때 그 아버지와 함께 따랐고 왕이 복위하자 전리총랑「典理摠郎=고려시대 전리사(典理司)의 정4품 관직」으로 제수(除授) 받았는데 동(東)으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졸하였으니 나이가 二十八세(歲) 이었다.

 

아들은 덕림(德林)과 수림(壽林)이다. 보림(寶林)은 사람됨이 근엄하고 방정(方正)해서 정치할 재능이 있었다. 일찍이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되어 새로 제용재(濟用財)를 설치해서 지공(支供)의 비용으로 쓰고 백성에게 함부로 걷지 않았다.

 

또 경산부(京山府)의 수령(守令)이 되어 길을 가다 들려오는 부인의 곡성을 듣고 말하되 「곡성이 슬프지 않고 기뻐함이 있는 것 같다」하여 잡아다가 심문하니 과연 간부(奸夫)와 함께 남편을 죽인 자였다.

 

어떤 사람이 송사하되 이웃사람이 우리 소의 혀를 잘랐습니다 하나 이웃사람은 승복하지 않았다. 보림(寶林)이 그 소를 목마르게 한 다음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물에다 된장을 섞으면서 명령하기를 『차례대로 소에게 장물을 마시게 하되 소가 마시려고 하거든 그치게 하라』마을 사람들은 명령대로 했다.

 

송사 당한 사람에게 이르니 소가 놀래어 달아났다. 신문 한즉 과연 승복하기를 그 소가 우리 벼를 뜯어먹으므로 그 혀를 잘랐습니다. 또 어떤 사람의 말(馬)이 뛰어나와 남의 보리 싹을 뜯어먹었다. 보리주인이 송사를 하려하니 말(馬) 주인이 말하되 「우리 보리밭에 있으니 결실하면 너에게 주리니 소송하지 말라」하므로 보리밭주인은 허락했다.

 

여름이 되어 보리 싹이 다시 돋아 거둘 것이 있으니 말 주인이 말하기를 「너의 보리도 결실도 있었으니 줄 수 없다」하였다 하므로 보리밭주인이 소송을 하였다. 보림(寶林)이 명령하여 말 주인은 앉게 하고 보리밭주인은 서게 하고서 같이 달리되 뛰 떨어지는 자는 벌을 주리라 했는데 말 주인이 불급(不及=미치지 못함)한지라 벌을 주려하니 말 주인이 말하기를 「저 사람은 서고 나는 앉았으니 능히 따를 수가 있습니까?」하자 보림이 말하되 「보리도 그와 같다.

 

뜯어먹은 후에 돋은 싹이 결실을 잘 할 수 가있겠는가? 너의 말(馬)이 뛰어나와 보리 싹을 먹게 한 것이 첫 번째 죄이고 관청에 고하지 못하게 한 것이 두 번째 죄이니 법을 어지럽히는 백성은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하고 드디어 곤장을 때리고 보리를 소송한 자에게 주라하였으니 정사(政事)가 근엄 명백함이 이와 같다.

 

신우(辛禑=고려 우왕)의 초기에 판 안동부사(判安東府事-정3품)가 되어 다스림이 최고(最高)라 하여 대사헌(大司憲=사헌부의 종2품)에 발탁되었다. 조금 있다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옮기었다. 제주(濟州)에서 진상(進上)한 염소를 여러 고을에 나누어 기르되 많이 죽고 번식되지 못하므로 그 값을 거두게 하였다.

 

재상(宰相) 들이 그 나머지를 나누어 기르자고 하거늘 보림(寶林)이 권중화(權仲和)로 더불어 말하되 「백성들은 값을 내게 하고 우리는 나누어가지면 의리에 맞겠는가?」하고 드디어 그만 두었다.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2품 관직」에 오르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였으며 졸한 후에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다.

 

자료 : 고려 명신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