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140

금천 도산서원 복설협찬회 발문외 4점

■ 익재선생 도산서원 복설협찬회 발문외 4 점 (益齋先生 道山書院 復設協讚會 發文外 四點) ◈판종 : 금속활자 인쇄 ◈시대 : 1939년(소화 14)/일제 강점기 ◈지질 : 미색 모조지 ◈소장자 : 이재훈 ↑익재선생 도산서원 복설협찬회 발문 ㅣ 크기 : 가로 25.8Cm x 세로 17.7Cm ↑도산서원 복설 파보간행 미납단 종중에 고함과 선조 제행일 참배 종중과 대종회 사항보고 통문. / 크기 : 가로 20.5Cm x 세로 19.3Cm ↑익재선조 도산서원 복설 혈보 간행 파보 법규를 이사회에서 결정한 공지문./ 크기 : 가로 33.1Cm x 세로 19.3Cm ↑익재선생 도산서원 복설 협찬회 임원명단(가로 40Cm x 세로 19.3Cm) ↑개성 도산서원 복설 참여 호소문 한점(가로 55.2Cm x 세로 3..

6, 25 전쟁(戰爭)

■ 상기(想起)하자 6.25 전쟁(戰爭) ↑1950. 10. 1.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하는 국군용사들 ↑1950. 10. 1. 38선을돌파하고북진하는국군용사들 ↑1950. 10. 1.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하는 유엔군 ↑북진하는 국군용사들 ↑국군 환영 군중대회(함흥) ↑1950. 10. 10. 함흥 부근의 한 동굴에서, 공산군에 확살된 300여 명의 시신을 꺼내고 있다. ↑평양 북빙에 니히하는 공수부대 ↑평양 환영 군중대회 ↑압록강에 도착한 국군용사(1950, 11, 20) ↑1950.11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중공군 40군단. ↑1950.11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중공군 40군단. ↑후퇴하는 미군들... ↑후퇴하는 미군들.. ↑1950년 12월 3일 평양, 파괴된 대동강 철교에서 피란민들이 남하하고 있다..

‘무관의 제왕’ 흥선군 권문세가와 전면전

■ 조선 왕을 말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제185호 | 20100925 입력 어떤 정치 지도자가 혜성같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기존 체제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혜성같이 등장한 지도자가 성공의 결실을 거두는 경우를 찾기는 쉽지 않다. 기존 체제와 맞서 싸우면서 미래를 지향해야 하지만 대부분 기존 체제와 싸우다가 끝을 맺기 마련이다. 혜성같이 등장했던 대원군의 앞에도 마찬가지 길이 놓여 있었다. 개국군주 망국군주 고종 ① 대원위 분부 시대 ↑대원군 초상 대원군은 극적으로 집권했지만 그 앞에는 과거와 전혀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가 권태균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의 철종이 사망했다. 5남 6녀를 두었으나 금릉위 박영효에게 시집간 4녀 영혜(永惠)옹주를 제..

상산초, 중국 용정실험소학교 방문

진천신문 2011-04-15 오전 11:08:00 상산초, 중국 용정실험소학교 방문 진천상산초등학교 이피찬 교장이 지난 12일 중국 용정시 용정실험소학교(교장 임금순)를 방문하고 상호협력을 약속했다. 중국에 있는 용정실험소학교와 상산초등학교는 아주 오래 전 깊은 인연으로 맺어졌다. 진천출신이신 이상직선생께서 1905년 10월에 진천상산초등학교를 세우고, 사촌형인 이상설선생께서는 중국에 용정실험소학교를 1906년 8월에 용정실험소학교의 모태가 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했다. 두 선현들은 어렸을 적 함께 동문수학하셨으며, 한말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민족교육을 흥기시키기 위해 육영사업에 힘쓰셨다. 용정실험소학교는 용정시에서 가장 큰 학교로 조선족교육의 요람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상설선생께서 처음 학교를 ..

수락영당

↑수락영당의 봉안 익재영정 ■ 청원 수락 영당([淸原 水落影堂) ◇봉안 신위 : 익재공 이제현 영정(益齋公 李齊賢 影幀) ◇제향일 : 매년 음력 3월 15일, 음력 9월 15일 ◇소재지 : 충북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가양리(佳陽里) 44-4 진천 양호사(陽湖祠)에 봉안했던 익재공 이제현 영정((益齋公 李齊賢 影幀)을 1898년(광무 2)에 이곳 수락 영 당으로 이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영당이다. 영정은 1319년(충숙왕 6)에 원(元) 나라의 화가 진감여(陳鑑如) 그린 것을 후대에 모사한 것이다. 선비복장을 한 반신상을 그렸으며, 가로 49㎝, 세로 93㎝의 설채 견본(設彩絹本)이다. 윗부분에는 이유원(李裕元)이 쓴 제기(題記)가 있는데, 이는 이제현이 1350년(충정왕 2)에 지은 자찬문(自贊文) 을 ..

베갯머리송사로 정한 후계자, 피바람을 예고하다

작성일 : 2010. 11. 21 ■ 베갯머리송사로 정한 후계자, 피바람을 예고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83호] 2010.09.12 입력 새 왕조는 개창과 동시에 왕조의 안정적 유지라는 큰 과제를 짊어지게 된다. 새 왕조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서는 개국시조뿐만 아니라 그 후계자의 자질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성계는 선양 형식으로 개국에 성공했지만 세자 책봉이라는 국가 중대사를 부인 강씨의 입김에 따라 결정함으로써 새 왕조의 앞날에 큰 부담을 주었다. 개국군주 망국군주 태조④ 역성혁명 출중한 무장인 이성계는 정도전 같은 전략가들의 보필을 받아 선양 형식으로 새 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다. 우승우(한국화가) 남은(南誾)과 조인옥(趙仁沃) 등이 위화도 회군을 건의했을 때 이성계 추대는 이미..

귀족의 땅을 백성에게 개국의 씨앗을 뿌리다

■ 귀족의 땅을 백성에게 개국의 씨앗을 뿌리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82호]20100905 입력 한 체제를 전복하는 것은 무력으로 가능하지만 새 체제를 여는 것은 무력만으로는 불 가능하다. 새 체제를 세우기 위해서는 사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구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새 체제에 대한 정당성을 설파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새 사상은 관념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의 지형을 바꿀 수 있는 실제적인 정책으로 나타나야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색 신도비와 사당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 있다. 사진가 권태균 개국군주 망국군주 태조 ③ 과전법 실시 이성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계기는 위화도 회군이다. 우왕 14년(1388) 3월 명나라가 고려와의 접경지역에 철령위(鐵嶺衛)를 설..

전쟁 영웅에게 쏠린 민심, 개국의 원동력이 되다.

■ 전쟁영웅에게 쏠린 민심, 개국의 원동력이 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81호] 2010.08.29 입력 전통시대에는 왕의 즉위나 새 나라 개창의 정당성을 ‘천명’에서 찾았다. 천명을 받았는지 여부를 나타내는 지표가 바로 민심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엎기도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은 공허한 수사가 아니다. 집권세력이 기존 체제를 유지할 정당성과 능력을 상실했을 경우 민심은 새 나라가 열리기를 희구한다. 황산대첩비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있다. 이성계는 운봉전투로 남방 사람들에게도 무명을 떨쳤다. 일제는 반(反)시국적인 고적(古蹟)을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이 비를 깨뜨렸다. 지금 서있는 비석은 195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삼봉집 목판 정도전이 쓴..

임금을 묻은 다음 날, 노론은 역사를 되돌리기 시작했다.

■ 임금을 묻은 다음 날, 노론은 역사를 되돌리기 시작했다. 성공한 국왕들 정조⑪ 정조 독살 의혹 이덕일 | 제179호 | 2010.08.15 입력 ‘정조 독살설’이 현재적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가 조금만 더 살아 그의 정책들이 계속 유지됐다면 조선은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각종 사회적 갈등을 정치로 풀기 위해 노력했던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었다. 그의 사후에 비로소 민란이 발생해 백성과 국가권력이 직접 충돌한다는 사실이 주는 의미는 심장하다. ↑다산 초당 정약용이 18년간 유배 생활을 한 전남 강진의 만덕산 기슭에 있다. 정약용의 일가는 정조 사후에 사형당하거나 유배를 당해 폐족 신세가 된다. 최근 정조가 노론 벽파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이 공개되면서 일부 학자는 ‘심..

임금의 죽음 예고하듯, 상복 입은 ‘하얀 벼’ 기현상

작성일 : 2010. 11. 14 ■ 임금의 죽음 예고하듯, 상복 입은 ‘하얀벼’ 기현상.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78호 | 20100807 입력 정치세력이 분열돼 미래와 과거를 각각 지향하면 양자의 공존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떤 이념을 표방하든 과거를 지향하는 정치세력은 기존 체제의 유지로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과거 지향의 정치세력에 둘러싸인 채 24년간 고군분투했던 정조는 끝내 대개혁의 칼을 뽑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것은 비단 정조뿐만 아니라 조선의 미래도 함께 죽은 것이었다. ↑정조 건릉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데 정조와 부인 효의왕후 김씨를 합장한 무덤이다. 사도세자 묘소인 융건릉 곁에 있다. 노론 벽파는 시신을 땅에 묻자마자 정조가 키워온 남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