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140

민심이 원한 건 변화 … 신도시발 농업·상업 혁명 시동

■ 민심이 원한건 변화…신도시발 농업· 상업 혁명 시동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7호 | 20100731 입력 세종시는 원안이든 수정안이든 정치논리가 우선했다. 그 결과 선거라는 정치적인 방법으로 미래가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 사도세자의 배후도시라는 정치적 의미를 뛰어넘는 가치를 담았다. 조선의 농업혁명과 상업혁명을 선도하겠다는 미래 가치를 담아냈다. 화성 건설에는 플러스 알파뿐만 아니라 오메가까지 담겼기 때문에 논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수원 화성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4㎞의 성곽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정조는 화성을 조선의 미래를 지향하는 선도도시로 만들려고 계획했다.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⑨ 화성의 탄생 ..

경학가(經學家) 사전에 오른 경주이씨 인물

● 25世 이항복(李恒福) [생몰년] 1556년(명종 11)∼1618년(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자상(子常), 호(號)는 필운(弼雲) 또는 백사(白沙)이고, 고려 검교정승(檢校政承) 세기(世基)의 후손으로 참찬몽량(夢亮)의 아들이다. 경기도 포천출생으로 1580년 알성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때 선조를 호종하고, 뒤에 양관 대제학 이조 형조판서 등의 중앙요직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광해조때 인목대비의 페비에 반대하다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졸하였다. 저서로는 《백사집(白沙集)》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 이시발(李時發) [생몰년] 1569년(선조 2)∼1626년(인조 4) 조선 중..

은송정(隱松亭)

↑은송정(隱松亭) ● 이영우(李英雨) [생졸년] : 1853년(철종 4) ~ 1913년(왜정) / 향년 61세 경주이씨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형조판서(刑曹判書)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의 10대손이다. 자(字)는 문칙(文則), 호(號)는 은송(隱松), 1853년(철종 4) 9월 29일 오늘날 고령군 개진면 양전 리에서 태어나, 향토와 벗을 좋아하고 사랑 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여 향중 벗들이 그를 존경 하였다. 1959년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2 리(안 개실) 안산 선영 아래에, 그의 후손들이 선생의 학문(學問)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재실(齋室)이다. --------------------------------------------------------------------------..

가을산책(散策)

■ 가을산책(散策) 때 : 2010. 개천절날 15 : 00 ↑가벼운 운동을 위해 한적한 들길을 찾아 한시간 걸어며 가을모습을 잠시 담아 보았습니다. 알밤이도보입니다. ↑가을 바람에 산들 산들 춤을추내요. ↑만개한 길가의 국화꽃이 지나는 사람들을 반깁니다. ↑고구마 밭입니다. 밭주인 께서 자녀들이 많아서 이 정도는 심어야 한답니다. ㅎ 10여분간 정겨운 농심의 얘기도 들어봤습니다. ↑길가에선 감나무 입니다. 탐 스럽게 가을은 이렇게 읶어 갑니다. ↑이런 시골길을 한시간 걷습니다. ↑벼도 잘 영걸어 가고 있습니다. ↑이름 모를 붉은 열매 달린 나무에 매료되어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 놀이터에 아이들 노는 모습에 잠시 정신을 놓았습니다.ㅋ

■ 기타/포 토 2010.10.03

益齋集 七刊本 木板刻(익재집칠간본목판각)

■ 익재문집 제七간본 목판각(益齋文集弟七刊本 木板刻) 익재집 《칠간본》.은 병인(丙寅) 1926년에 저자의 19대손 이규석(李圭錫)이 하겸진(河謙鎭)의 서(序)를 받아 연활자(鉛活字)로 경북 안동(安東) 노림재(魯林齋)에서 6책으로 간행하였다. ↓아래 목판각은 1926년 안동 노림재에서 6책으로 간행된 익재집 목판각 이다. ↑역옹패설 목판각(櫟翁稗說 木板刻) ↑익재난고 목판각(益齋亂藁 木板刻) ↑발(跋) * 지(誌) * 습유(拾遺) ↑효행록 목판각(孝行錄木板刻) ------------------------------------------------------------------------------------------------------------------------------------- ■ 역..

힘보다 뜻이 컸던 군주의 운명은

힘보다 뜻이 컸던 군주의 운명은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34호 | 20091001 입력] 개혁은 당위성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명분뿐만 아니라 개혁 대상의 저항을 넘어설 수 있는 현실적 힘을 갖고 있어야 성공하는 것이다. 예종은 공신 집단의 해체라는 분명한 개혁 목표와 실천의지를 갖고 있었으나 현실적 힘을 확보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특히 남이를 비롯한 신공신 집단을 제거한 것은 구공신에 맞설 세력을 제거한 결정적 하자였다. 독살설의 임금들 예종 ② 개혁 능력의 한계 ▲신숙주의 영정 이상(理想)을 택한 사육신에 비해 현실을 택한 신숙주의 여유롭고 부귀한 모습이 잘 드러난 영정이다. 그러나 신숙주는 조선시대 내내 사육신과 비교 대상이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수양대군과 함께 쿠데타로 집권한 공..

국왕 장례 예법 둘러싼 사대부 싸움, 王權만 추락하다.

■국왕 장례 예법 둘러싼 사대부 싸움, 王權만 추락하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18호 | 20090613 입력] 집권 서인들은 겉으로는 효종을 국왕으로 여겼으나 속으로는 차자(次子)로 낮춰 보았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정당이 집권하면 불필요한 정쟁이 빈발한다. 겉과 속이 다르니 논리의 모순이 생기고 반대편이 이를 지적하면 정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예송 논쟁은 일인(日人)들의 주장처럼 무의미한 당쟁이 아니라 효종의 종통을 둘러싼 이념 논쟁이기에 치열했던 것이다. 전남 해남군 해남읍에 있는 윤선도 사당. 윤선도는 효종의 사부였으나 격정적 성격 때문에 자주 논란에 휩싸 였다예송 논쟁 때 송시열을 강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끝내 함경도 삼수로 귀양가게 된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현종 ..

「임금도 사대부」 예학의 틀에 갇혀버린 효종 장례

■ 「임금도 사대부」 예학의 틀에 갇혀버린 효종 장례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17호 | 20090607 입력] 인조반정 이후 국왕은 천명이 아니라 사대부가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 존재로 전락했다. 서인은 소현세자를 제거하고 효종을 추대했지만 둘째 아들로 낮춰 보았다. 국왕을 사대부 계급의 상위에 있는 초월적 존재로 보려는 왕실의 시각과 제1 사대부에 불과하다고 보는 서인의 시각은 큰 괴리가 있었다. 국왕 독점의 권력이냐 사대부 균점의 권력이냐의 문제였다. 양자의 시각이 충돌한 것이 제1차 예송(禮訟) 논쟁이었다. ↑조선성리학의 흐름을 예학으로 이끈 태두 김장생을 모신 충남 논산 돈암서원. 김장생과 송시열·송준길 등 당대 의 서인-노론 계열 예학자들을 배향하고 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

설욕보다 기득권」 사대부들 安民 내세워 양병론을 꺾다.

■「설욕보다 기득권」 사대부들 安民 내세워 양병론을 꺾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16호 | 20090530 입력] 인조반정은 조선을 사대부의 나라로 만들었다. 국왕은 사대부 가운데 제1 사대부에 불과할 뿐 초월적 존재가 아니었다. 국왕이 아니라 사대부가 나라의 구석구석을 지배했다. 효종은 북벌을 가능한 목표로 여겼으나 사대부는 불가능한 꿈으로 여겼다. 사대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북벌이 아니라 기득권 수호였다. 북벌 추진으로 위협받던 사대부의 기득권은 효종의 급서로 계속 유지되었다. ↑요동벌판 : 효종은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하던 경험을 통해 북벌을 가능한 목표라고 여겼으나 사대부들은 불가능 한 꿈으로 여기고 반대했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효종 ⑤스러진 ‘북벌의 꿈’ 윤휴(尹휴)의 일대..

말로는 북벌 외치며, 武臣 우대 발목 잡은 文臣들.

■ 말로는 북벌외치며, 武臣우대 발목 잡은 文臣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15호 | 20090524 입력] 사회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정권교체보다 몇 배는 어렵다. 조선은 개국 이래 문신 우대 풍조가 뚜렷했다. 사대부는 임진·병자 양란으로 전국이 유린되고도 숭문천무(崇文賤武) 사상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천한 무신은 고귀한 문신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효종이 북벌 단행을 위해 무신을 양성하려 하자 문신은 갖은 방법으로 제동을 걸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을 침략했던 청 태종과 효단문황후(孝端文皇后)의 심양 북릉.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으로 지정됐다. 효종은 북벌을 꿈꾸며 군비를 증강 했으나 문신의 반발에 부닥쳤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효종 ④사대부들의 저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