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140

러시아를 두 번 이기고 털어낸 ‘삼전도 콤플렉스’

■ 러시아를 두 번 이기고 털어낸 ‘삼전도 콤플렉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14호 | 20090516 입력] 서양은 이미 동양 사회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잇따라 표류하고, 러시아는 흑룡강까지 진출했다.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만난 다른 세상에 조선도 어느덧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효종은 청의 요구에 따라 러시아 정벌군을 파견해야 했다. 조선과 서양의 첫 조우는 원하지 않는 충돌로 시작되었다. 효종은 이를 북벌 테스트로 생각했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효종 ③서양과의 접촉 ▲북정일기(57Χ90㎝) : 1658년 제2차 나선 정벌에 참전한 신류 장군의 조총부대는 흑룡강에서 러시아군을 물리 쳤다. 이후 러시아군은 청·러 국경 지대인 흑룡강을 넘지 못했다. 출병 84일..

소현세자一家에 쏠린 동정론, 효종의 역린(逆鱗) 건드리다.

■소현세자一家에 쏠린 동정론, 효종의 역린(逆鱗) 건드리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13호 | 20090509 입력] 정치는 이상만 추구할 수 없다. 현재 시비(是非)가 분명한 일도 때로는 훗날 가리는 것이 지혜일 수 있다. 강빈(姜嬪:소현세자 부인)의 옥사가 그런 일이었다. 강빈의 억울함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강빈 일가의 비극 위에서 효종은 즉위할 수 있었다. 효종의 왕위를 인정한다면 강빈의 신원은 훗날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산림은 즉각적인 신원을 요구했고 효종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효종의 양녀(성종의 후손인 이개윤의 딸)의순공주의 묘.(묘는 의정부시 금오동에 있다) 의순공주(義順公主, 1635년-1662년)는 조선 효종의 양녀이다. 종친 금림군 이계윤의 딸로 본명은 ..

같은 현실을 보고도, 소현과 봉림 두 형제의 꿈은 달랐다

■같은 현실을 보고도, 소현과봉림두 형제의 꿈은 달랐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12호 | 20090502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효종 ①三宗의 혈맥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처럼 때로는 전혀 의외의 인물에게 대권이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대운(大運)이 따라 준 것이다. 그러나 대운은 여기까지다. 대운을 천명(天命)으로 승화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려 있다. 인조가 소현세자 일가를 죽이면서 생각지도 않게 대권을 잡은 효종은 굴러온 대운을 천명으로 전환할 방법을 숙고했다. 그것이 북벌이었다. 효종은 현종· 숙종을 잇는 삼종(三宗)의 혈맥 시대를 열었다. ↑명나라의 마지막 장수 오삼계가 지키던 산해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산해..

신분·조세제도 개혁, 民草들이 전쟁에 나서다

■신분·조세제도 개혁, 民草들이 전쟁에 나서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10호] 20090419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 ⑤免賤·作米法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민심을 얻는 것이다. 민심 획득의 요체는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제도와 관습의 개혁이다. 조선은 신분제와 조세제도의 모순 때문에 백성의 버림을 받았다. 이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 조선은 멸망할 것이었다. 류성룡이 제정한 면천법과 작미법으로 백성의 마음이 돌아오면서 조선은 바닥에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깊은 시름 하던 차에(95Χ140㎝) 이순신 장군은 한산대첩에서 일본 수군의 주력 115척을 궤멸시켜 ‘조선 회생’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 덕택에 곡창 지대인 호남을 확보하게 돼 일본군은 멀리 본토에서 군량..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라진 나라, 백성들도 버렸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라진 나라, 백성들도 버렸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9호] 20090411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 ④ ‘요동 파천’ 논란 지배층이 피 지배층의 신뢰를 받는 방법은 간단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앞장서는 것이다. 로마의 파비우스 가문처럼 어린 후계자만을 남기고 모두 목숨을 바치는 가문을 어찌 백성들이 존경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는 자기 희생은커녕 군역(軍役)을 합법적으로 면제받았다. 지배층이 군대에 가지 않는 나라의 피지배층이 전쟁 때 종군할 이유가 없음은 물론이다. ↑동래부순절도 : 동래부사 송상현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일본군의 요청을 거부하고 결사 항전을 하다 성민(城民)들과 함께 전사했다. 사진 권태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

수많은 전란의 징후, 무능한 정권은 눈을 감았다.

수많은 전란의 징후, 무능한 정권은 눈을 감았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8호 | 20090405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 ③임진왜란 전야 유능한 지배층과 무능한 지배층을 가르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현실인식 문제다. 유능한 지배층은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지만 무능한 지배층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 그렇게 머릿속의 바람을 현실인 것처럼 호도하는 동안 나라는 깊숙이 썩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의 혼간지(本願寺) 자리에 오사카 성을 짓고 조선 침략을 총지휘했다. 선조는 재위 8년(1575) 김효원(金孝元)을 함경도 경흥부사로 좌천시켰다. 당쟁을 유발해 조정을 시끄럽게 했..

당쟁 줄타기하던 임금, 서인의 손에 도끼를 쥐여주다

■ 당쟁 줄타기하던 임금, 서인의 손에 도끼를 쥐여 주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7호 | 20090329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 ② 정여립 사건 최고 지도자의 콤플렉스를 씻는 유일한 방법은 성공한 정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은 콤플렉스에 허우적대다 실패한 정치가로 끝나기 마련이다.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선조는 성리학을 국시로 삼아 사림의 지지를 받았으나 사림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밖으로 표출되면서 무수한 비극이 발생했다. ↑정여립이 자결했다는 전북 진안 죽도의 전경. 죽도에 서실이 있어 ‘죽도 선생’이라 불린 정여립은 성리학의 가치관을 뛰어넘는 혁신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 오른쪽 작 은 사진은 충북 진천에 있는 정철 ..

불투명한 후계자 계승, 정통성 콤플렉스를 낳다

■불투명한 후계자 계승, 정통성 콤플렉스를 낳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6호 | 20090321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 ① 방계 승통 절차의 투명성은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 특히 대통(大統)처럼 최고 권력을 잇는 절차는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 절차가 불투명하면 정국에 혼란이 온다. 당사자는 정통성 부족이란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이는 정국 운영에 큰 부담이 된다. 호문(好文)· 호학(好學)의 군주 선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불투명했던 왕위 계승 과정이었다. ↑선조는 학문을 좋아하고 예술에도 능한 임금이었다. 『열성어필(列聖御筆)』에 실린 선조의 그림과 글씨. 제목은 난죽도(蘭竹圖). 동아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선조가 태어날 때만..

어린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내몬 "仁祖"

■어린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내몬 ‘어질 인’ 仁祖.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5호 | 20090314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 ⑤세자 일가의 비극 명분과 현실의 괴리는 비극을 초래한다.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섬겨야 했던 인조는 청나라를 인정하려던 소현세자를 제거했다. 청나라에 맞서 싸우지는 못하면서 청나라를 인정하면 난적(亂賊)이 되는 모순은 이후 조선 지배층의 정신세계에 숱한 악영향을 끼쳤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모순은 분노의 표적을 찾았고 남은 세자 가족이 그 대상이 되었다.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은 심양을 관통하는 혼하(渾河 :옛 야리강) 근처에서 벼농사를 지어 청나라 고관에게 팔아 큰 이익을 남겼다. 그런 행위는 인조의 분노를 샀다. 큰 사진은 현재 이용하는 혼하의 다리..

새 세상을 봤지만 권력에서 소외된 후계자의 좌절

■새 세상을 봤지만 권력에서 소외된 후계자의 좌절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4호] 20090308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 ④날개 꺾인 소현세자 모든 역사에는 음양이 공존한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도 마찬가지다.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성리학 이외의 다른 사상과 세계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세자는 더 이상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조선을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개방을 결심했다. 그러나 이는 인조반정에 대한 부정이어서 양자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소현세자의 무덤인 소경원/사적 제200호로 지정됐으나 아직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정묘호란 때인 인조 5년(1627) 1월 만 15세의 소현세자는 분조(分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