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村 李在薰 102

간죽정 기(間竹亭 記)

■ 간죽정기(間竹亭記) 재사당 이원 찬(再思堂 李黿 撰) 귀양살이 속에서 아픔도 많아 오랫동안 붓을 들지 아니하였다. 하루는 나의 벗박공(朴公 : 朴權)이 이에 편지를 써서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나의 선친이 사시던 집이 영암(靈巖) 서쪽 二十里쯤에 있는데, 앞에는 덕진(德津) 앞바다의 조수(潮水)의 장관(壯觀)과 대하고, 뒤에는 기묘한 월출봉(月出峰)과 대하였으며, 그 가운데 한 시내가 도갑(道岬)에서 흘러내려, 여울은 구슬 같은 물방울을 튕기고, 물이 흥건하게 고여서는 못을 이루고, 백번도 더 꺾이고, 꺾이어서 빙빙 돌아 에워 둘으며, 서쪽으로 흐른다. 또 월출봉(月出峰)의 북쪽 산줄기는 이어 내려와, 엉기어 모여서 주먹 같이, 또는 혹 같이 집의 동쪽에 불끈 솟아 있다. 정자(亭子) 사이에는 대나무..

벽오 이시발 선생 묘역(碧梧 李時發 先生 墓域)

■ 벽오 이시발 선생 묘(碧梧 李時發 先生 墓) ↑벽오 이시발 선생(좌측)과 배위, 정경부인 여흥민씨 묘(進士 閔敬男의 女) ↑맨위의 묘가 오촌공 이대건 묘이고 다음 아들 이시발 묘, 그 아래 제일 앞쪽의 묘는 이시발의 손자 이인환 묘이다. ↑벽오 이시발의 계배 정경부인 고령신씨 묘(이시발 묘역의 바로 우측에 있다) ↑정경부인 고령신씨 묘의 뒤에서 바라본 전경(우측에 보이는 묘역이 이시발 묘역) ↑1980년 비각 건립 이전의 신도비 ↑쌍오비각(雙梧碑閣) 충청북도 지방 유형문화재 제142호(진천군) ↑소재지 :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192-11 벽오공의 묘소도 1626년 별세하셨을 당시에는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천내의 선영 아래, 장례를 치렀으나 1658년 아들분들에 의하여 이곳으로 이장했다. 따라서..

한훤당 김굉필 신도비명 병서(寒暄堂 金宏弼 神道碑銘 幷序)

한훤당 김선생 신도비명 병서 (寒暄堂 金先生 神道碑銘 幷序) 여헌 장현광 찬(旅軒 張顯光 撰) 명(明) 나라가 문명(文明)의 운(運)을 열자, 우리 조선의 여러 성왕(聖王)들이 운을 따라 계속하여 나와서 덕을 쌓고 교화를 높였다. 이에 진유(眞儒)가 동방에서 나와 도학(道學)이 전해지니, 바로 선생이 그러한 분이다. 선생은 휘(諱)가 굉필(宏弼)이고 자(字)가 대유(大猷)이며 호(號)가 한훤당(寒暄堂)이다.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과 《경현록(景賢錄)》에 기재된 것을 삼가 살펴보면 김씨는 황해도(黃海道) 서흥부(瑞興府)가 본적(本籍)이니, 고려조(高麗朝)에 금오위 정용 중랑장(金吾衛精勇中郞將)을 지낸 휘 보(寶)가 9세조이다. 낭장의 손자인 휘 천록(天祿)은 벼슬이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시랑 찬성사..

사계 김장생선생 문인록(沙溪 金長生先生 文人錄)

■ 사계 김장생선생 문인록(沙溪 金長生先生 文人錄) 송시열(宋時烈) 자(字)는 영보(英甫), 호(號)는 우암(尤庵)이고, 정미생이며, 관향은 은진(恩津)이다. 수옹(睡翁) 송갑조(宋甲祚)의 아들로서, 선생이 늘그막에 사문전수(師門傳授)의 서적을 주었으며, 관직은 유일(遺逸)로 좌상(左相)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기사년에 화를 당했다.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성무(聖廡)에 종사되었으며,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남겼다. 송준길(宋浚吉)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이고, 병오생이며, 관향은 은진이다. 청좌와(淸坐窩) 송이창(宋爾昌)의 아들로서, 관직은 유일로 좌참찬(左參贊)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이며, 성무에 종사되었고, 문집(文集)을 남겼다. 이유태(李惟泰) 자는 태지(泰之..

신독재 김집선생 문인록(愼獨齋 金集先生文人錄)

■ 신독재 김집선생 문인록(愼獨齋 金集先生文人錄) 윤선거(尹宣擧)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이고, 경술생이며, 관향은 파평이다. 팔송(八松) 윤황(尹煌)의 아들로서, 생원이며, 관직은 유일로 집의(執義)를 지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고,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봉향되었으며, 문집을 남겼다. 유 계(兪 棨)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이고, 정미생이며, 관향은 기계(杞溪)이다. 문과로 이조 참판을 역임하고, 정축년에 척화(斥和)하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임천(林川)의 칠산서원(七山書院)에 봉향되었고, 문집을 남겼다. 이 선(李 選) 자는 택지(擇之), 호는 지호(芝湖)이고, 관향은 전주(全州)이며, 완남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의 아들이다. 문과로 이조 ..

오성부원군 백사 이공 묘표(이항복)

오성부원군 백사 이공 묘표 (鰲城府院君 白沙 李公 墓表) 지은이 : 이정구(李廷龜) 휘(諱)는 항복(恒福), 자는 자상(子常)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세상에서 백사(白沙) 선생이라 일컫는다. 가정(嘉靖) 병진년(1556, 명종11)에 태어났고 경진년(1580, 선조13)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원(翰苑), 옥당, 남상(南床), 독서당(讀書堂), 이조 낭관,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임진년에 도승지로서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서북쪽으로 몽진하였고 그 도중에 병조 판서에 배수되어 중흥의 큰 공렬을 협찬하였다. 이조 판서, 대제학, 도원수(都元帥),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역임하였으며, 세 차례나 재상이 되었고 다섯 번이나 녹훈(錄勳)되었다. 계축년(1613, 광해군5)의 화(禍)에 재상에서 체직되어 교외에..

사류제집(四留齋集)/이정암(李廷馣) 著

본 문집의 저본은 후손 여주(汝柱)가 수집, 편차한 정고본(定稿本)을 여주의 아들 성룡(聖龍)이 1736년에 간행한 초간본으로, 7권, 부록5권, 보유(補遺) 합5책(384판)의 목판본(木板本)이다. 本 影印底本은 서울大學校 奎章閣藏本(圖書番號 : 奎5285)으로서 半葉은 10行 20字이고 半郭의 크기는 22.3×17.3(㎝)이다. [도서명] 사류제집(四留齊集) [시 대] 조선(朝鮮) [책 수 ] 총12권 5책 [크 기] 가로 20.8cm x 세로 32 cm [도서구분] 문집류(文集類) 사류제집은 임란시 황해로 일대에서 왜군을 토벌했던 이정복의 문집으로 의병 투쟁 내용이 그 주를 이루고 있고, 왜와 우리나라의 투쟁사 개괄, 의병장 대첩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책은 의병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그 가치가..

이영우(李英雨)

■ 38世 이영우(李英雨) [생졸년] 1853년(철종 4) ~ 1913년(외정 4) 경주이씨 벽오공 이시발(碧梧公 李時發)의 10대손으로 자(字)는 문칙(文則), 호(號)는 은송(隱松), 1853년(철종 4) 9월 29일 오늘날 경북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에서 종기(鍾基)의 아들로 태어났다. 배위는 성산전씨(星山全氏) 석일(錫日)의 딸로 묘지는 충남 금산군 제원면 천내3리의 동양 제2혈지로 불리우는 선인부사도강형(仙人艀槎渡江形) 지역내 소재한다. 이 묘역은 장자 상영(相永)이 직접 점지하여 모신곳이다. 향토와 벗을 좋아하고 사랑 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여 향중 벗들이 존경 하였다. 1959년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 2리(안개실 또는 상가곡) 안산 선영아래 후손들이 그의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재실 (齋室)을 ..

은송공 이영우 세계도(隱松公李英雨世界圖)

■ 38世 이영우(李英雨) 생졸년>1853(철종 4) ~ 1913(외정 4)] 충익공(忠翼公) 벽오 이시발(碧梧 李時發)의 10대손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문칙(文則), 호(號)는 은송(隱松), 1853년(철종 4) 9월 29일 오늘날 경북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에서 종기(鍾基)의 아들로 태어났다. 배위는 성산전씨(星山全氏) 석일(錫日)의 딸로 묘지는 충남 금산군 제원면 천내3리의 동양 제2혈지로 불리우는 선인부사도강형(仙人부사渡江形) 지역내 소재한다. 이 묘역은 장자 상영(相永)이 직접 점지하여 모신곳이다. 향토와 벗을 좋아하고 사랑 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여 향중 벗들이 존경 하였다. 1959년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 2리(안개실 또는 상가곡) 안산 선영아래 후손들이 그의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급량잡단(及梁雜端) - 성호 이익(星湖 李瀷)

■ 급량잡단(及梁雜端) 성호 이익(星湖 李瀷) - 여주인(驪州人) 1681년(숙종 7)~1763년(영조 39). 우리나라 사람은 문헌이 부족한 관계로 상고하는 데에 그릇된 점이 많아 사기의 득실은 논할 것도 없고, 자기네 시조의 보록(譜錄)에 까지도 그 착오를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경주이씨는 혁혁한 문벌인데도 지금 백사(白沙) 이상공(李相公)의 문집을 상고해 보면 매양, 우리의 시조는 사량부 대인(沙梁部大人)이라."고 했으니, 사량은 곧 진한 육부(六部)의 하나이다. 신라 혁거세 9년에, 급량부(及梁部)에는 이씨의 성을, 사량부(沙梁部)에는 최씨의 성을 하사했으니, 지금 경주 최씨는 곧 사량부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에, “최치원은 사량부 사람이라.”고 했으니, 이씨의 선조는 곧 급량부인데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