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문집

사류제집(四留齋集)/이정암(李廷馣) 著

야촌(1) 2009. 1. 11. 16:17

본 문집의 저본은 후손 여주(汝柱)가 수집, 편차한 정고본(定稿本)을 여주의 아들 성룡(聖龍)이 1736년에 간행한 초간본으로, 7권, 부록5권, 보유(補遺) 합5책(384판)의 목판본(木板本)이다. 本 影印底本은 서울大學校 奎章閣藏本(圖書番號 : 奎5285)으로서 半葉은 10行 20字이고 半郭의 크기는 22.3×17.3(㎝)이다.

 

 

 

 

 

 

 

 

 

 

 

 

 

 

 

 

 

 

 

 

 

 

 

 

 

 

 

 

 

 

 

 

[도서명]  사류제집(四留齊集)

[시 대]  조선(朝鮮)

[책 수 ]  총12권 5책

[크 기]  가로 20.8cm x 세로 32 cm

[도서구분]  문집류(文集類)

 

사류제집은 임란시 황해로 일대에서 왜군을 토벌했던 이정복의 문집으로 의병 투쟁 내용이 그 주를 이루고 있고, 왜와 우리나라의 투쟁사 개괄, 의병장 대첩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책은 의병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 된다.

 

[성 명] 이정암(李廷馣)
[생몰년] 1541년(중종 36)∼1600년(선조 33)
[본 관] 경주(慶州)
[자· 호] 중훈(仲薰), 사류재(四留齋), 퇴우당(退憂堂), 월당(月塘)
[시 호] 충목(忠穆)
[저서·작품] 《상례초(喪禮抄)》.《독역초(讀易抄)》,《왜변록(倭變錄)》,《서정일록(西征日錄)》,《사류재집(四留齋

                     集)》, 《명종실록(明宗實錄)》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541년(중종 36)∼1600년(선조 33).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류재(四留齋)·퇴우당(退憂堂) 또는 월당(月塘)으로 사직서 영(社稷署令) 이탕(李宕)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한성부 서부 반석방 한림동(현재 합동·중림동 지역)에 살았으며 명종 13년(1558)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고, 명종 16년(1561)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이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명종 20년(1565)에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었으며, 선조(宣祖) 즉위년인 1567년에는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과 공조·예조·병조의 좌랑(佐郞)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외직(外職)인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로 나갔다가 다시 중앙에 들어와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거쳐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로 나갔다.


선조 2년(1569)에는 경기도 도사(京畿道都事)로 전임되었다가 중앙으로 들어가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형조 좌랑에 재임용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가 다시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전임되었다. 이때 암행어사의 임무를 띠고 강원도에 나가 재해지역을 돌아보고 돌아와 정언(正言)을 지냈다.


선조 4년(1571)에는 예조 정랑(禮曹正郞)·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춘추관의 직책을 겸하고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경기도 경차관(京畿道敬差官)으로 나가 재해지역을 돌아보았다.

 

이듬해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제수되었으며 그 해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선조 9년(1576)에는 장단 부사(長湍府使)를 거쳐 1578년에는 제용감 정(濟用監正) 등을 지냈다.

 

이듬해에는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부임하여 행교(鄕校)와 도봉서원(道峰書院)을 중수(重修)했으며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번다한 역(役)을 없애는 등 치적을 쌓았다. 1580년에는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나갔으며, 선조 17년(1584) 장령(掌令)·사성(司成)·장악원 정(掌樂院正) 등을 지냈으며, 1587년에는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어 왜인(倭人)들의 폐단을 없앴다. 1591년에는 장례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승지(承旨)·공조 참의(工曹參議)·병조 참의(兵曹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1592년에는 이조 참의로 있으면서 왕을 호종(扈從)하였으나 체직되어 별 임무가 없어 아우인 당시 개성 유수(開城留守) 정형(廷馨)과 함께 개성을 수비하였는데 개성이 함락되자 황해도에서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활약하였고, 초토사(招討使)에 임명되어 연안(延安)을 수비하던 중 흑전장정(黑田長政)의 6,000여 명의 군을 대파하였고 그 공으로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겸 순찰사(巡察使)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병조 참판·전주 부윤(全州府尹) 등을 지내고 곧 전라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선조 29년(1596)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으나 죄수를 임의로 처벌하였다 하여 한때 파직되었다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고, 황해도관찰겸 순찰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해서 초토사(海西招討使)로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지켰다.

 

난이 끝난 후 사직하고 풍덕(豊德)으로 은퇴하여 시문(詩文)으로 소일하였다. 선조 37년(1604)에 연안(延安) 수비의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으로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追封)되고 좌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연안(延安)의 현충사(顯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상례초(喪禮抄)》·《독역초(讀易抄)》·《왜변록(倭變錄)》·《서정일록(西征日錄)》·《사류재집(四留齋集)》 등이 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燃藜室記述, 名世叢攷, 朝鮮人物號譜, 壬亂海西義兵에 대한 一考(李章熙, 史叢 14, 1969)
[관련항목] 김덕함(金德歟) 성혼(成渾)

 

 

●형태서지

권수제 사류재집(四留齋集)
판심제 사류재집(四留齋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36년 간행
권책 12권 5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2.3×17.3(㎝)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5285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51

 

 

●저자

성명 이정암(李廷馣)
생년 1541년(중종 36)
몰년 1600년(선조 33)
중훈(仲薰)
사류재(四留齋), 퇴우당(退憂堂), 월당(月塘)
본관 경주(慶州)
봉호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
시호 충목(忠穆)
특기사항 성혼(成渾), 이제신(李濟臣) 등과 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