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886

주(紂)왕과 달기(妲己)

■주(紂) : 은(殷) 나라의 마지막 왕. 하(夏)나라 걸(桀)왕과 더불어 폭군(暴君)의 대명사(代名詞)로 불리고 있다. 성품이 포악(暴惡)하고 주색(酒色)을 탐(貪)해서 주나라 무왕에게 나라가 망했다. 달기(妲己)라는 여색에 빠져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고 왕에게 간(諫)하는 者는 포락지형(炮烙之刑)을 내렸다. 목야(牧野)의 전쟁(戰爭)에서 주(周)나라 무왕(武王)과 전쟁을 하다 대패(大敗) 하여 녹대에서 죽었다. 미자계, 비간. 기자(箕子)가 자주 간하다가 불이익을 당했다. -------------------------------------------------------------------------------------------------------------------------------..

부열(傅說)

▲부열(傅說) 상(像) ■부열(傅說) : 상(商)나라 무정(武丁)때의 현신(賢臣)/ 최초의 성인 원래 죄인(罪囚)이였으나 무정(武丁)에게 발탁(拔擢)되었다. 무정(武丁)이 나라를 일으키려고 자나 깨나 고심하는데 꿈속에서 성인을 보았다. 이름이 열(說)이라고 했다. 꿈에서 본 인상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서 전국을 찾게했는데 부험(傅險)가운데에서 열을 찾아냈다. 그래서 부열(傅說)이라고 했다. 부열(傅說)은 무정을 도와 상왕조(商王朝)의 國力을 크게 증강(增强)시켜 번영(繁榮)하게 했다

이윤(伊尹 : 商나라의 賢臣)

■ 이윤(伊尹 : 商나라의 賢臣) ↑이윤 화상(伊尹 画像) 탕(湯) 임금을 도와 하(夏)나라를 멸말(滅亡) 시키는데, 공(功)이 많았다. 4대 까지 상(商) 왕조를 보필(輔弼) 하면서 국가 정치에 중요한 역할(役割)을 했다. 탕(湯)이 죽고 손자(孫子) 태갑(太甲) 즉위(卽位) 하였는데, 포악(暴惡)하고 현명(賢明)하지 못해서 이윤(伊尹)이 탕(湯)왕의 묘(墓)가 있는 동궁(東宮)으로 추방(追放)하여, 개과천선(改過遷善)하도록 지도(指導)하여 복위(復位)한 태갑(太甲)에게 대권(大權)을 넘겨 주었다.

제15회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행사(문과/무과)

2008. 10. 5(일) 11:00 ~ 17:00 문과 - 경복궁 근정전 무과 - 경희궁 앞뜰, 서울역사박물관 뒤에 위치 1. 행사 내용 ◇문과(경복궁) - 임금님 행차, 문과 과거시험, 시조백일장 전통예술공연(궁중무용, 판소리 및 민요, 타악공연 등) ◇무과(경희궁) - 전통무예시범, 택견 및 태권도 시범단 공연, 무과 과거시험, 전통 예술공연(타악과 사물놀이) - 만들기 체험: 대나무 활 만들기, 칼 만들기, 한적 책 만들기 - 음식문화 체험 : 다식 만들기, 엿치기, 떽메치기 - 급제자 체험 : 전통복식 체험, 말타기, 기녀촬영 2. 참고사항 - 경희궁은 무료입장이지만 경복궁은 입장료가 있습니다.

인조의 ‘원종대왕 만들기’ 프로젝트

■ 인조의 ‘원종대왕 만들기’ 프로젝트 기획연재|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26일-27일) 김진수 js@gimpo.com 경기도 김포에 위치한 유일한 왕능. ‘장릉’이라 불리는 이곳은 김포 시내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아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발길이 닿고 있다. 장릉은 인조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소다. 그런데 이 장릉은 실제 왕의 능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부터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죽어서 나중에 왕의 칭호를 받은 것이다. 이를 추존 혹은 추숭(追崇)이라고 하는데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을 말한다. 인조의 아버지, 어머니는 본인들이 원종대왕과 인헌 왕후가 된지도 모른 채 왕릉으로 김포 풍무리에 자리하고 있다. 인조가 자기의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대왕으로 추..

반경(盤庚)과 무정(武丁)

■ 문성왕 반경(文成王 盤庚) : (BC 1314~1287) - 은(殷)의 제19대왕) 시호는 세조(世祖). 이름은 자순(子旬)으로 양갑의 동생. 하북의 수도를 집권 초기 하남의 은(殷)으로 천도하여, 쇠퇴해가는 은나라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퇴폐풍조(類廢風潮)와 사치(奢侈)를 추방(追放)하고 민심(民心)을 새롭게 하여 은(殷)을 중흥(中興)시켰다. 이때부터 은왕조라 불리우고. 은나라의 국운은 다시 번성해 졌으며 황금기가 시작됨. 당시 제후들이 모두 입조하게 되었는데 이는 반경이 성탕의 덕정을 따랐기 때문이다. -------------------------------------------------------------------------------------------------------------..

주자(朱子=朱熹)

■朱子(1130~1200) - 儒敎를 集大成함. ↑주자 상(朱子 像) 이름은 희(熹). 字는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노인(雲谷老人)· 둔옹(遯翁). 존칭하여 주자(朱子)라고 한다. 선생은 북송 유학자들의 학설을 종합 계승하는 한편 동시대의 불교와 도교를 섭렵함으로써 송대의 유교를 집대성하였다. 19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가 28세에 고향으로 돌아가 약 20년 동안 유교 학문에만 정진하여 성리학을 완성시킴으로써 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정호(程顥)와 정이(程), 주돈이(周敦 : 1017~73), 장재(張載:1020~77) 등의 논문들을 편찬하면서 이 철학자들에 대한 尊敬을 表示했고 이들의 철학을 集大成하여 자신의 哲學을 完成시켰다. 그의 가..

솔잎 먹는 방법을 기록함 - 남구만

■ 솔잎 먹는 방법을 기록함 약천 남구만(藥泉 南九萬) 씀 새로 딴 푸른 솔잎 한 말과 콩[太]세 되를 볶아서 솔잎과 함께 찧어 마르기 전에 즉시 고운 가루를 만든 다음 고운체로 젖은 가루를 친다. 냉수 반 보시기[甫兒]에 솔잎가루 한 홉을 섞어서 마시면 맑은 향기가 입 속에 가득하여 전혀 쓴맛을 느끼지 못한다. 백비탕(白沸湯)에 미음으로 따뜻하게 먹으면 더욱 굶주림을 견딜 수 있는바, 한 말의 솔잎과 세 되의 콩으로 한 말 남짓의 가루를 만들 수 있는데, 한 말의 가루면 백 명이 마실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콩이 없으면 벼와 조, 기장과 피 등의 잡곡을 볶아 가루를 만들어도 모두 좋다. 시속의 방법에는 솔잎을 찧어 가루가 되기 전에 응달에서 말렸다가 다시 찧어 고운 가루를 만든다. 그러므로 맛이 매우 ..

백제의 멸망 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가?... <백제문화제>

작성일 : 2009. 10. 27 백제의 멸망 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가? 백제사를 7세기 후반 한반도에서의 멸망 시점이 아니라 백제 유민들이 당나라 요동의 건안고성(建安故城)에서 재건한 왕국이 발해에 병합된 8세기 중반 내지 9세기 초반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는 20일 "당은 보장왕을 수반으로 한 고구려 유민들을 요동에 거주시켰고, 이 집단이 소(小)고구려의 기원이 됐다. 당이 웅진도독 부여웅을 수반으로 하는 백제 유민 집단을 건안의 고성으로 이주시킨 것도 이와 유사한 사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즉, 건안고성에서 존속된 백제 유민 집단도 소백제로서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지적이다. 백제의 멸망시점은 31대 의자왕이 나당군에 항복한 660년으..

고구려 배신자 묘지명 중국서 발견

고구려 배신자 묘지명 중국서 발견 기사입력 2009-10-21 10:49 김영관 관장, '고요묘(高鐃苗)' 묘지명 소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나라가 망할 때는 배신자가 있기 마련이다. 고구려 또한 마찬가지였다. 668년 9월 12일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써 고구려 700년 사직이 종막을 고할 때도 당군과 몰래 결탁해 제 발로 평양성문을 열어준 이가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 주모자로 신성(信誠)과 함께 소장(小將)들인 오사(烏沙) 및 요묘(饒苗) 등을 거론하면서 이들이 평양성문을 열어 당나라 군대를 성내로 맞아들였다. 고구려 멸망을 재촉한 이들 삼인방 중 한 명인 '요묘'의 묘지명이 중국에서 발견됐다. 이 묘지명에 의하면 고구려 '정복'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데 대한 보상 때문인지 요묘는 당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