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886

병자호란 다시읽기(4)

(52) 인조의 생부 정원군 추승 논란 명 조정이 후금의 반간계에 넘어가 원숭환을 처형하는 등 자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던 무렵, 조선에서는 인조의 생부(生父) 정원군(定遠君)을 국왕으로 추숭(追崇:돌아가신 분의 지위를 뒤 시기에 올려 주는 것)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뜨거웠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즉위했던 인조는 자신을 낳아준 부친을 국왕으로 추숭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높이고 싶어했지만, 명분과 종통(宗統)의 의리를 강조하던 신료들은 인조의 그 같은 시도에 격렬히 반발했다. ▲경기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조선 인조(仁祖)와 그의 비 인열왕후의 능인 장릉(長陵). 반정이 라는 정변을 통해 즉위한 인조는 자신을 낳아준 부친을 국왕으로 추숭(追崇)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 계운..

병자호란 다시읽기(8)

(81) 근왕병이 패하다 Ⅱ 당시 근왕병들이 처해 있던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면,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을 구원하는 것은 애초부터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우선 지방의 감사나 지휘관들이 병력을 모으고 행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소집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고, 날씨가 추워 행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병사들은 대부분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문관 출신이 많았던 지휘부 또한 전문적인 군사지식이나 병법(兵法)에 익숙한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청군을 만나면 겁먹고 진군을 꺼리거나, 한 번 패할 경우 부하들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남한산성의 장경사(長慶寺).1624년 승려 각성(覺性) 등이 전국 8도의 승군(僧軍)을 동원해 성을 쌓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사찰이다. ●주도면밀..

병자호란 다시읽기(5)

(61) 반란자와 귀순자들 Ⅱ 공유덕과 경중명이 이끄는 반란군이 후금으로 도주하려 하자 명에는 비상이 걸렸다. 명 조정은 주문욱(周文郁)에게 수군을 이끌고 공경(孔耿) 일당을 저지하도록 지시했다. 주문욱은 나름대로 분투했지만 반란군의 도주를 차단하지 못했다. 급기야 공유덕 일당이 계속 달아나 압록강 쪽으로 갈 기미를 보이자 명은 조선을 끌어들이려 했다. 병력을 동원하여 공경의 도주로를 막고, 군량을 마련하여 추격하는 명 수군에게 공급하라는 요구가 날아들었다. 주문욱은 1633년(인조 11년) 1월부터 수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추격했다. 그는 수차례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공유덕 일당을 완전히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선 가도 등지에 있는 다른 명군 부대와의 협력 작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병자호란 다시읽기(3)

(46) 自强論의 이상과 현실 우여곡절 끝에 후금과 화친함으로써 정묘호란은 끝났다. 인조 정권은 어렵사리 종사(宗社)를 보전할 수 있었지만 남겨진 과제는 참으로 버거웠다. 먼저 후금군과 이렇다할 전투 한 번 변변히 치러보지 못하고 강화도로 피란했던 현실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반성론이 제기되었다. 병력을 뽑아 조련시키고, 조총을 비롯한 무기를 확보하며, 군량을 마련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바야흐로 조정에서는 자강(自强)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높아가고 있었다. ●“후금에 복수” 군비 강화론 급부상 1627년 4월 1일, 서울로 돌아오기 직전 인조는 신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내가 좋아서 오랑캐와 화친했겠는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화친한 것은 적의 기세를 늦춰 설욕하려는 것이니 그..

병자호란 다시읽기(2)

(31) 모문룡의 작폐. 인조반정 성공 이후 조선이 표방했던 대외정책의 성격은 ‘친명배금(親明排金)’이었다. 그런데 ‘친명’은 분명 실천했지만 ‘배금’은 쉽사리 실천할 수 없었다.‘배금’을 실천하려 할 경우 필연적으로 후금과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높아지고, 조선의 존망까지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괄의 난을 비롯한 내부 변란을 겪었던 와중에 조선은 후금과 군사적 모험을 벌일 능력도 여유도 없었다. 조선이 1627년 후금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모문룡(毛文龍)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모문룡과 가도(椵島)의 동강진(東江鎭)은 인조반정 이후부터 병자호란 직후까지 조선, 명, 후금 삼국관계의 ‘키워드´였다. ↑요동지역 명나라의 군사적 거점이었던 광녕(현재 요녕성 ..

병자호란 다시읽기(1)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 10만 포로의 눈물 조선은 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비참한 환란을 겪어야 했을까. 한마디로 17세기 초 명·청 교체기의 격랑 속에 조선 지배층이 국제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007년은 병자호란이 끝난 지 370년이 되는 해이다. 북핵 문제를 놓고 6자 회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듯,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안팎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우리가 과연 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러시아·일본 등과의 숨가쁜 외교전에서 북핵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난제를 슬기롭게 풀어가며, 미래를 당당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

天字文

■ 천자문(千字文) 天(하늘 천) 地(땅 지) 玄(검을 현) 黃(누를 황) 하늘은 위에 있어 그 빛이 검고 땅은 아래 있어서 그 빛이 누르다. 宇(집 우) 宙(집 주) 洪(넓을 홍) 荒(거칠 황) 하늘과 땅 사이는 넓고 커서 끝이 없다. 즉 세상의 넓음을 말한다. 日(날 일) 月(달 월) 盈(찰 영) 仄(기울 측)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점차 이지러진다. 즉 우주의 진리를 말한다. 辰(별 진) 宿(잘 숙) 列(벌일 열) 張(베풀 장) 성좌가 해 달과 같이 하늘에 넓게 벌려져 있음을 말한다. 寒(찰 한) 來(올 래) 暑(더울 서) 往(갈 왕) 찬 것이 오면 더운 것이 가고 더운 것이 오면 찬 것이 간다. 즉 사철의 바뀜을 말한다. 秋(가을 추) 收(거둘 수) 冬(겨울 동) 藏(감출 장) 가을에 곡..

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

■ 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 신라 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는 신라 때 서원경(西原京 : 청주) 지방 4개 촌의 장적(帳籍)으로, 당시 촌락의 경제 상황과 국가의 세무 행정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신라 민정문서(新羅民政文書) 또는 신라 장적(新羅帳籍), 정창원 문서(正倉院文書)라고도 부른다. 당시 신라의 율령 정치는 물론, 신라 사회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귀중한 자료이다. ↑통일 신라시대 촌락문서 일본 도오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정창원) 중창(中倉)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시대의 촌락에 대한 기록문서로 가족 형태에 관한 최초의 사료이다. [문서의 형태] 1933년 10월 『화엄경론질(華嚴經論帙)』의 파손부분을 수리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경질(經帙) 내부의 포심(布心)에 배첩되어 있던 이 문서는..

경주약사(慶州略史)

■경주 약사(略史) 본 글은 시인 김대원(瑞耕)님의 글을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경주는 먼 옛날 진한의 12국 가운데 사로국(斯盧國)이 있었던 지역이다. BC 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 BC 57∼AD 4)가 이곳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그 나라 명칭을 으로 부르다 제4대 석탈해 왕 9년에는으로 불리었다. 물론 역사서엔 그전 (15대 기림이사금 289~310) 10년에도 국호가 언급(言及) 되었지만 일치를 이루지 못하였고 이때 나라의 중심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지증 마립간(437~514) 시절에 가라국과 합병한 후 가라국(伽羅國AD42~526)의 문물제도를 흡수하여 라 호칭하다. 23대 법흥왕(514~540)때 비로써 정식으로 나라 형태를 갖추고 라 칭하게 되었으며 또한 국왕의 호칭(呼稱)을..

한민족의 원류 – 고리(稿離) 국

한민족의 원류 – 고리(稿離) 국 한국인의 三大조상 민족 : 맥(貊), 예(穢), 한(韓), 일본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郞 )가 항상 고민하던 문제 중의 하나가 “일본국민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였다고 한다. 이런 화두가 그런 대작가의 전매물만은 아니다. 퉁구스 족에 속해 있고 우랄알타이 어에 속하는 언어를 쓰는 한국국민들도 우리가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문제에 한번 관심을 가져 봤을 법하다. 이 의문이 일어나면 우리 모두는 일제히 심리적으로 북쪽을 올려다본다. 한반도 북쪽 저 광활한 대륙 어느 쪽에서 왔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 보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수학 공식 같은 확실한 정답은 현재 없다. 아직 한국민족에게 문자가 없던 때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저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