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백제사(百濟史)

백제의 멸망 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가?... <백제문화제>

야촌(1) 2009. 10. 27. 03:21

작성일 : 2009. 10. 27

 

백제의 멸망 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가?

 

 

 

 

백제사를 7세기 후반 한반도에서의 멸망 시점이 아니라 백제 유민들이 당나라 요동의 건안고성(建安故城)에서 재건한 왕국이 발해에 병합된 8세기 중반 내지 9세기 초반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는 20일 "당은 보장왕을 수반으로 한 고구려 유민들을 요동에 거주시켰고, 이 집단이 소(小)고구려의 기원이 됐다. 당이 웅진도독 부여웅을 수반으로 하는 백제 유민 집단을 건안의 고성으로 이주시킨 것도 이와 유사한 사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즉, 건안고성에서 존속된 백제 유민 집단도 소백제로서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지적이다.

백제의 멸망시점은 31대 의자왕이 나당군에 항복한 660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이 교수는 당이 백제에 설치한 행정관청 웅진도독부를 백제부흥운동의 연장선상으로 파악해 웅진도독부가 신라의 공격으로 해체된 672년을 백제사의 종지부로 주장해 왔는데 이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이 교수는 이에 대한 근거로 '삼국사기'와 중국 역사서 '구당서' '신당서'에 기록된 "그 땅(백제)은 이미 신라·발해말갈에게 분할되어 국계(國系)가 끊기고 말았다."는 구절을 지목했다.

 

백제 영역이 신라로 넘어간 건 맞지만 발해말갈로 분할되었다는 내용은 기존의 통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어서 이 구절은 오류로 간주돼 왔다. 하지만 당나라는 676년 건안고성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해 유민들을 모여살게 하고, 이듬해 백제의 태자 부여웅을 웅진도독 대방군왕에 봉해 통치하게 했다.

 

이 교수는 "부여융은 조부인 무왕이나 부왕인 의자왕이 당으로부터 부여받았던 대방군왕 관작(官爵)을 동일하게 습봉하였다."면서 "실질적인 독립국은 아니더라도 명목상 백제 왕국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건안고성에 재건된 백제는 언제까지 존속했을까. 이 교수는 "이 문제는 발해의 요동 지배시점과 맞물려 있다. 건안고성의 백제 왕국은 8세기 중반이나 9세기 초반 어느 때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뻗친 발해에 병합되었다."면서 "'삼국사기'등 사서에 기록된 '발해말갈에 분할되었다'는 구절은 이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

 

백제 멸망후 유민 생활은 정말 비참했나?

 

백제는 660년 멸망의 길로 들어서 사라졌다. 유민들은 당나라로 끌려가 당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최근까지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부여태비 묘가 당나라의 도읍인 시안(西安) 북쪽 당나라 고조 이연의 무덤에서 발견되면서 이런 추측이 뒤집혔다.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태비는 백제의 마지막 공주였다. 부여태비가 당나라를 세운 황제의 옆에 함께 묻혀 있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묘지석은 부여태비가 괵지역의 왕인 이옹의 왕비라고 설명하고 있다. 

 

부여태비는 왕족의 의무를 실현하고 유민들을 하나로 묶어 잘 살도록 하기 위해 22세 때 이옹과 결혼했고, 현모양처로서 생을 다할 때까지 어질며 덕행 있는 삶을 살았다. 이옹이 부여태비와 결혼함으로써 왕좌에 복귀할 수 있었을 정도로 당시 부여태비의 힘은 대단했다고 프로그램(□…‘역사스페셜’〈KBS 1TV 17일 오후 8시〉)은 전한다.

 

이런 부여태비의 힘은 백제 유민들의 활약에 따른 것이다. 원래 당나라는 백제 멸망 이후 유민들을 건안고성이라는 곳에 함께 모여 살게 해주고 백제국의 태자도 그대로 인정했다. 용맹스러운 백제 유민들은 당나라 군대의 요직을 차지하며 공을 세웠다. 부여태비의 지위는 이들의 활약에 따라 격상됐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