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종 시해 시나리오 ‘목호룡 고변’으로 발각.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40호] 20091115 입력
최소한의 공존의 틀마저 무너뜨리면 상대방만 타격을 입는 것이 아니다.
작용이 반작용을 부르는 것은 정치도 마찬가지다. 노론이 경종 제거를 당론으로 삼아 실행에 옮긴 것은 왕조국가에서 각 당파가 공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틀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이 무리한 처사에 격렬한 반발이 일어날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수많은 비극이 양산되었다.
왼쪽부터 ‘노론 4대신’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의 초상. 노론 영수인 이들은 경종을 제거하고 연잉군을
추대하려던 노론 당론을 추진하다. 목호룡 고변 사건으로 모두 사형당했다. 영조가 즉위한 후 모두 복관되는데, 노
론 쪽에서는 이를 신축· 임인년에 발생한 선비들의 화(禍)라는 뜻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불렀다.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
⑤ 노론 4대신
노론에서 경종을 끌어내고 연잉군(영조)을 추대하려는 시나리오를 짜던 경종 1년(1721) 여름은 가뭄 끝에 태풍이 덮쳐 기근이 우려되던 때였다. 좌의정 이건명은 이를 임금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고 주장했다.
“임금 사복(嗣服:즉위) 초에 작은 흠도 없는 정사를 펼쳤음에도 근래 드물게 큰 가뭄과 풍재(風災)가 심했고, 궁궐의 정문(正門)도 무너졌으니, 이는 인자하신 하늘의 경고하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경종실록』1년 7월 20일)
경종이 묻힌 의릉.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1962년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일반인의
접근이 제한되고 원형이 많이 훼손됐다. 95년 안기부가 옮겨 간 뒤 다시 일반에게 공개됐다. <사진가 권태균>
정작 임금에게는 하늘의 경고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민생과는 무관한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밀어붙인 정당이 노론이었다. 왕세제 책봉은 성공했으나 대리청정 기도가 실패하고 되레 김일경의 ‘신축소’로 정권이 소론으로 넘어가면서 정국은 폭풍전야처럼 긴장되었다.
드디어 경종 2년(1722) 3월 27일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이 긴장을 깨면서 정국을 소용돌이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성상(聖上)을 시해하려고 모의하는 역적(逆賊)들이 있는데, 혹 칼로써, 혹 독약으로, 또 폐출(廢黜:왕을 쫓아냄)을 모의한다고 하는데,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들이니 급하게 토벌해서 종사를 안정시키소서.”(『경종실록』 2년 3월 27일)
이것이 삼급수(三急手) 고변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목호룡 고변 사건이다. 삼급수란 칼, 독약, 폐출의 세 가지 수단을 동원해 경종을 죽이거나 내쫓으려 했다는 뜻이다. 이 중 대급수(大急手)는 숙종의 국상 때 자객을 궁중으로 보내 세자(경종)를 죽이는 것이고,
소급수(小急手)는 은(銀) 500냥을 궁중의 지상궁(池尙宮)에게 주어 경종의 어선(御膳:임금의 수라상)에 독약을 넣는 것이고, 평지수(平地手)는 숙종의 유조(遺詔)를 위조해 경종을 폐출시키는 것이었다.
목호룡은 이들이 만든 교조(矯詔:위조된 숙종의 교서)에 ‘세자(世子) 모(某:경종)를 폐위시켜 덕양군(德讓君)으로 삼는다(廢世子某爲德讓君)’는 구절이 있는 것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목호룡의 말대로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내용들이었다. 더구나 목호룡은 당초 이 모의에 깊숙이 가담했던 인물이란 점에서 그 여파가 어디까지 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신(臣:목호룡)은 비록 신분은 미천하지만 왕실을 보존하려는 뜻을 가지고 흉적이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는 모의를 직접 보고는 호랑이 입(虎口)에 먹이를 주어서 은밀히 비밀을 알아낸 후 감히 이처럼 상변(上變)하는 것입니다.”(『경종실록』 2년 3월 27일)
목호룡은 남인가의 서자로서 종친 청릉군(靑陵君)의 가노였는데, 감여술(堪輿術:풍수지리)에 능해 연잉군 사친(私親)의 장지를 정해 준 대가로 속신(贖身)돼 왕실 소유의 장토(庄土)를 관리하는 궁차사(宮差使)까지 오른 것으로 알려진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당초 연잉군 쪽에 줄을 섰다가 세제 대리청정 기도가 실패하고 신축환국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고변 쪽으로 돌아섰다.
이 사건에 가담했다고 목호룡이 고변한 인물들은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李器之), 이사명(李師命)의 아들이자 이이명의 조카인 이희지(李喜之),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손자 김민택(金民澤), 김만중의 손자이자 이이명의 사위인 김용택(金龍澤), 김춘택의 사위 이천기(李天紀) 등 노론 명가자제가 대부분이었다. 자제들이 하는 일을 부모들은 몰랐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긴장은 더했다.
목호룡은 용문산에 들어가 묏자리를 구하다가 이희지를 만났고 그를 통해 이기지·김용택 등을 만났다고 진술했다.
이기지·이희지 등은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가혹한 고문을 참으며 혐의를 부인하다 맞아죽는 길을 택한 이들도 있었고, 고문을 못 이겨 “지상궁을 통해 독약을 쓰는 것이 소급수”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죽은 김용택 같은 인물도 있었다.
목호룡은 이들 자제뿐만 아니라 이이명까지 직접 끌어들였다. 각자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심사(心事)를 표현하는데 김용택은 충(忠)자를, 다른 사람들은 신(信)·의(義)자 등을 썼는데 백망(白望)은 양(養)자를 썼다는 것이다. 이천기만 그 뜻을 알고 크게 웃었는데, 이는 이이명의 자(字)인 양숙(養叔)을 뜻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이 이이명을 추대하려 했다는 것은 목호룡의 의도된 과장이겠지만 이이명은 결국 이 사건에 연루돼 사형당해야 했다. 그가 사형당하던 경종 2년 4월 17일자 실록의 사관은 “이때에 이르러 목호룡이 상변(上變)했는데 이희지 등 여러 역적이 모두 이이명의 자질(子姪)과 문객(門客)에서 나오고, 흉모(凶謀)·역절(逆節)이 낭자하여 죄다 드러나자, 온 나라의 여정(輿情)이 모두 분완(憤<60CB>:분노와 탄식)을 품었다”고 전하고 있다.
숙종 43년(1717) 정유독대 이후 그가 경종을 쫓아내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므로 그의 비극적 죽음은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같은 날 영의정 김창집도 사형에 처해지는데, 그는 숙종 15년(1689) 남인이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 때 사형당한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란 점에서 대를 이은 가문의 비극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건명과 조태채도 이 사건에 연루돼 사형당하는데 이들을 ‘노론 4대신’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목호룡의 고변 또는 임인옥사인데 사형당한 이가 20여 명, 국문을 받다 장살(杖殺)된 이가 30여 명, 연루자로 교살된 이가 10여 명, 유배된 이가 100여 명을 넘었다. 집안의 몰락을 보다 못해 목숨을 끊은 부녀자도 9명이었다.
이 비극적 사건의 뿌리는 헌정질서에 의해 즉위한 국왕을 제거하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인물을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노론 당론(黨論)에 있었다. 보다 직접적 계기는 세제 대리청정이 무산된 데 있었다. 세제 대리청정이 무산되면서 노론은 반대당파로부터 ‘남의 신하가 되어 천위(天位)를 몰래 옮길 계책을 품었다’
‘그 마음의 소재는 길 가는 사람도 안다’는 공격을 받게 되자 당황했다. 이 난국 타개의 계책을 제시한 인물이 이천기가 ‘진정한 노론의 혈성(血誠)’이라고 불렀던 환관 장세상(張世相)이었다. 임인옥사 때 사형당한 정우관(鄭宇寬)은 장세상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자백했다.
“하루는 장세상이 저에게 말하기를, ‘이번에 청정(聽政)하는 일을 노론이 봉행(奉行)하지 않았으니 이는 하늘이 주는데도 받지 아니한 것이다. 장래에 노론은 반드시 씨도 남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한 장의 비망기(備忘記)를 도모해 얻는 즉시 궁성을 호위(扈<885E>)한다면 좋을 것이다. 이제 막 이 일을 서덕수(徐德修)에게 언급하였다.”(『경종실록』 2년 5월 15일)
경종이 세제 청정을 명했을 때 노론 대신들이 우유부단하게 눈치를 보다 시기를 놓쳤다는 비난이었다.
그러면서 환관 장세상이 제시한 방안은 다시 경종을 압박해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명한다”는 비망기를 얻어내 그 즉시 군사를 동원해 궁성을 호위하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것이었다.
서덕수는 세제 연잉군의 처제(妻弟:영조 즉위 후 정성왕후의 사촌동생)였는데 그 역시 국문에서 “청정(廳政:대리청정)하는 일이 성사되지 않았으니, 노론은 장차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자백했다.
또한 그는 김창집의 재종제 김창도가 “(대리청정을 허용하는 경종의) 비망기가 내려진다면 즉시 궁성을 호위하여 안팎을 엄하게 끊고, 또 상소하여 시끄럽게 다투는 근심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고도 자백해 그 역시 깊숙이 가담했음을 시인했다.
경종의 비망기가 다시 내리면 즉시 군사를 동원해 계엄 상황을 만들어 일체의 상소를 봉쇄하고 대리청정을 강행하면서 경종을 끌어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비망기를 다시 얻어내는 작업은 실패했고 도리어 김일경이 신축소를 올린 날 『경종실록』 사관의 표현대로 경종이 ‘하룻밤 사이에 건단(乾斷:천자가 정사를 스스로 재결함)을 크게 휘둘러’ 정권을 노론에서 소론으로 갈아치우자 거꾸로 목호룡의 고변이 나왔던 것이다.
무엇보다 임인옥사가 지닌 가장 큰 폭발력은 사건 판결문인 「임인옥안(獄案)」에 세제 연잉군이 역적의 수괴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처제 서덕수가 깊숙이 관여한 사실이 드러난 데다 서덕수의 추대 제의를 연잉군이 거절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신하가 자신을 임금으로 선택했다는 ‘택군(擇君)’을 수락한 것으로서 역모 가담 혐의를 피할 방도가 없었다.
경종이 선왕의 유일한 혈육인 연잉군의 보호를 선택함으로써 겨우 무사했지만 이 사건 이후 연잉군의 처지는 궁박해졌다. 소론 집권하에서 연잉군의 앞날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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