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세종은, 신분보다 능력을 택하다.

야촌(1) 2010. 11. 3. 14:26

■ 세종은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 문화 르네상스와 국력 신장을 이루다.

 

이덕일의 事思史 | 세종, 신분보다 능력을 택하다

[제165호] 20100509 입력

 

입지전적 인물이 많이 출현하고 그런 인물이 대접받는 사회가 희망 있는 사회다. 

태종·세종이 정점인 조선 전기는 능력만 있으면 천인(賤人)이라도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만큼 역동적인 사회였고 이것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만인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대한민국에서는 과연 능력이 학벌이나 연줄보다 우선되는지 600년 전의 시대와 비교해야 할 것이다.

 

성공한 국왕들 세종

⑦ 천인 등용

 

앙부일귀 세종은 천인 장영실을 명나라에 유학까지 보내면서 과학기술을 익혀 오도록 했다. 
 장영실이 만든 앙부일귀는 전하지 않는다. 사진은 후대에 만든 앙부일귀의 모습이다.

 

세종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인재를 등용했다. 하나는 인물의 장점을 간파해 등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인물의 장점을 간파하는 세종의 능력은 육진 개척의 영웅 김종서가 잘 보여준다. 
 

세종은 김종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는 본디 유신(儒臣:유학을 공부한 신하)으로서 몸집이 작고 무예도 짧으며 행정 능력(吏才)은 뛰어나니 장수로서 마땅하지는 않다. 


다만 그가 일에 임하면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일을 처리하는 것이 정밀하고 상세했다. 4진(鎭)을 새로 설치할 때에도 일을 처리한 것이 알맞아서 그 효과를 보았으니 포상할 만하다.(세종실록 22년 7월 5일)”
 

체구 우람한 무신이 아니라 몸집 작은 문신을 육진 개척의 적임자로 본 것이 세종의 능력이다. 김육(金堉 : 1580~1658)은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서 세종이 “비록 내가 있었어도 김종서가 없었다면 사진은 능히 개척하지 못했을 것이요, 

비록 김종서가 있었어도 내가 없었다면 이 일을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통념을 뛰어넘어 적재적소에 인재를 발탁하는 능력이 세종을 성공한 군주로 만들었다.

또한 세종은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했다. 조선은 양반 사대부가 정점에 서 있는 신분제 사회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능력이 뛰어날 경우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최장수 영의정인 황희도 그런 인물이었다. 

세종실록 10년 6월조는 “황희는 판강릉부사 황군서(黃君瑞)의 얼자(孼子)”라고 전한다.
실록은 이어 “황치신은 그 부친(황희)이 황군서의 정실(正室) 자식이 아닌 것을 알지 못했다”라고 썼다. 

 

황희 집안 차원에서 모친이 천계(賤系)라는 사실을 감췄음을 알려주지만 황희의 모계(母系)는 세종을 비롯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세종은 서자 출신을 최장수 영의정으로 등용한 것이다.

 

↑성균관 문묘 공자와 그 제자들을 비롯해 유학의 도통을 모시는 묘우다. 천인 출신 박자청이 4개월 만에

    완성했다는데 현재의 것은 임진왜란 후 중건한 것이다. <사진가 권태균>

 

세종 때는 미천한 신분으로 고위 관직에 오른 인물이 적지 않았는데 이는 태종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현재는 동래 관노(官奴) 출신으로 종3품 대호군(大護軍)까지 오른 장영실(蔣英實)만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많은 인물이 능력을 발휘해 고위 관직에 올랐다. 이런 인물들은 대략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무관 계통, 다른 하나는 기술자·과학자들로서 모두 실용을 중시했던 시대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천계(賤系)로 고위직에 오른 입지전에 대해 실록의 사관들은 한결같이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세종 때 정2품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오른 윤득홍(尹得洪)에 대해 세종실록은 “해안 출신의 미천하고 낮은 사람(沿海微劣人)인데 단지 바다에서 있었던 작은 공 때문에 임금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 지위가 2품에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있었던 작은 공’ 중에는 충청도 비인(庇仁)을 노략질한 왜구의 선박 1척과 왜구 수십 명을 생포한 큰 공이 포함되어 있다. 비인을 노략질한 왜구들은 태종이 대마도 정벌을 결심하게 만든 장본인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대부들은 기득권의 관점에서 ‘작은 공’ 운운하며 깎아내렸던 것이다.

 

세종실록 23년(1441) 2월조는 “전라도 처치사(處置使) 윤득홍이 나이 70이 차서 치사(致仕=사임)하려고 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윤득홍은 세종 30년(1448) 77세의 나이로 사망하는데 그의 졸기는 “항상 여러 도의 병선(兵船) 및 조운(漕運)의 일을 관장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세종이 나이 70이 넘은 윤득홍의 사직을 거부한 이유는 바다에 관한 한 꼭 필요한 해양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2품 동지총제(同知摠制) 송희미(宋希美)에 대해 세종 12년(1430) 좌사간 유맹문(柳孟聞) 등은 “송희미는 낮고 천한 데서 일어나 별다른 공이나 재능도 없이 단지 활을 조금 잘 쏘는 작은 재주로 임금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지위가 2품에 이르렀다”고 비난하고 있다. 

 

송희미는 세종 13년(1431) 북방의 경원절제사(慶源節制使)로 부임해 내내 북방을 지켰는데, 세종은 재위 17년(1435) 그가 오래 변방을 지켰다는 이유로 종2품 상계(上階) 품계인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세종은 재위 19년(1437) 여진족이 경원을 이틀 동안 포위하고 공격했음에도 송희미가 나가서 싸우지 않고 150여 명의 백성이 잡혀간 사실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진(自盡=자결)하게 했다. 이때 경원 사람 서득귀(徐得貴) 등 472명이 사형을 면하게 해 달라고 상언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세종 24년(1442) 장영실이 제작·감독한 안여(安輿:임금의 수레)가 부서지자 의금부에 명을 내려 국문시키고 직첩을 회수했다. 그 후 장영실은 기록에서 사라지는데 이는 세종이 능력 있는 천인들에게 기회도 주었지만 그 실책에 대해서도 엄격했음을 말해준다.

 

조선 초기에 등용된 천인 출신 중에서 가장 고위직까지 올랐던 인물은 박자청(朴子靑)이다. 

실록에 따르면 박자청은 개국공신 황희석(黃希碩)의 보종(步從:수행원) 또는 가인(家人) 출신이었다. 

그는 태조 때 중랑장(中郞將)으로서 궁문을 지키는데 태조의 이복동생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가 임금의 명령 없이 들어가려 하자 막았다.

 

화가 난 이화가 발로 면상을 차서 상처가 났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태조는 이화를 불러 “옛날 주아부(周亞夫:중국 한나라의 장수)의 세류영(細柳營)에서는 단지 장군의 명만 받을 뿐 천자의 조서도 듣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 박자청이 너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이런 것으로서 네가 한 일은 옳지 않다”고 꾸짖었다. 

 

그러곤 박자청을 정4품 호군(護軍)으로 승진시키고 은대(銀帶)를 하사했다. 박자청은 임금의 호위 장교로서 유악(<5E37>幄=휘장)을 지킬 때 저녁부터 새벽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순찰을 도는 성실함으로 큰 신임을 얻었다. 

 

태종은 박자청이 건축에 특별한 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 방면으로 중용해 재위 8년(1408)에는 나라 안의 모든 건축물과 공사를 총괄하는 공조판서로 임명했다. 정도전이 서울을 설계했다면 건축물은 박자청이 지었다고 할 정도로 대부분의 도성 건물이 그의 손을 거쳐 건설됐다. 

 

태종은 박자청이 지은 건물들을 열거하면서 “송도(松都=개경)의 경덕궁과 신도(新都:서울)의 창덕궁은 내가 거처하는 곳이다”라고 말했다. “모화루(慕華樓)와 경회루(慶會樓)는 사신을 위한 곳이다. 개경사(開慶寺)와 연경사(衍慶寺)는 고비(考妣)=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한 곳이다. 성균관을 짓고 행랑(行廊)을 세우는 것 또한 국가에서 그만둘 수 있는 일이겠는가?(태종실록 12년 6월 1일)”

 

태종이 이런 말을 한 것은 박자청에 대한 사대부들의 견제와 비판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었다. 

태종실록 7년 10월조는 “박자청은 성질이 까다롭고 급해서 역사를 감독할 때마다 속성으로 하려고 인부를 재촉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괴롭게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자청은 공기를 단축하는 데 전력을 다했고 이 때문에 한양은 개국 초임에도 제대로 된 도성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태종 12년(1412) 공조판서 박자청이 공사를 감독하는데 부사직(副司直:종5품) 이중위(李中位)가 인사도 없이 말을 타고 지나가자 박자청이 구타한 사건이 있었다. 이례적으로 삼성(三省:사헌부·사간원·형조)에서 합동으로 탄핵하자 태종은 “박자청은 다만 외로운 종적이고 대가 거족(大家巨族)이 아니다...

 

대개 삼성(三省)은 종사에 관계된 죄나 합동으로 신청하는 것이다...어째서 박자청을 이렇게 심하게 미워하는가?(태종실록 12년 5월 14일)”라고 비판했다. 태종은 이때 ‘박자청이 부지런히 일하는데도 도리어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동정하면서도 ‘(박자청을) 다른 사람으로 택해서 아뢰라’고 명했다. 

 

하도 비판이 거세자 교체를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의정부에서 “박자청이 일을 잘 알고 부지런하니 갈 수 없습니다”라며 대안이 없다고 보고할 만큼 그의 일솜씨는 최고였다. 세종은 즉위년(1418) 8월 노비 출신 박자청을 종1품 의정부 참찬으로 승진시켰다. 

 

세종실록의 사신(史臣)은 “(박자청은) 미천한 데서 일어나 다른 기능 없이 다만 토목공사를 감독해 지위가 재부(宰府=재상)까지 이르렀으니 중의(衆議)를 누를 수가 없었다”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때의 ‘중의’는 백성들의 의견이 아니라 사대부들만의 ‘시샘’에 지나지 않았다.

 

이외에도 평양의 관노 출신으로 호군이 된 김인(金忍), 곽추(郭樞)의 노자(奴子) 출신으로 2품까지 올랐던 전흥(田興)과 한방지(韓方至) 등 세종 때 천인 출신으로 고위직에 올랐던 인물은 많다. 세종 때의 국력 신장과 문화 르네상스는 신분보다 능력을 높이 샀던 실용정신에 힘입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 이덕일의 事思史 | 세종, 신분보다 능력을 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