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상(商)나라 말기 세 사람의 인자(仁者).
즉 미자(黴子), 기자(箕子), 비간(比干)을 말한다.
●미자(微子)
주왕(紂王)이 주색(酒色)에 빠져 정치가 혼란(混亂)하여 반란(叛亂)의 조짐(兆朕)이 보여서 주(紂)에게 자주 간(諫)하였으나 주왕(紂王)은 듣지를 아니하여, 미자(微子)는 태사, 소사와 상의(相議)하여 주왕을 내쫒기로 하였다.
훗날 주(周)나라 초대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토벌 했을때, 미자(微子)는 제사그릇을 들고 무왕(武王)에게 가니 무왕武王)이 복직(復職)시켜 주었다. 무경(武庚 : 주왕의 아들)과 관채(管蔡)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주공이 무경을 토벌하고 미자를 후임으로 은에 보내어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기자(箕子)
성(姓)은 자(子), 이름은 서여(胥余)이다. 기(箕, 지금의 山西太谷)에 봉(封)해져 기자(箕子)라고 한다.
기자(箕子)의 성(姓)은 자(子)이고 이름은 서여(胥餘)인데 자작(子爵)으로 기(箕) 땅에 봉해졌기 때문에 기자라고 하였다.
은나라【지나(支那)】 왕 성탕(成湯)의 후손이고 상(商)의 28대 태정제(太丁帝)의 아들로서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이다. 농사(農事)와 상업(商業), 예법(禮法) 등에 두루 능통하였으며, 상(商)을 떠나지 않고 주왕(紂王)의 음탕하고 사치스러운 폭정(暴政)에 대하여 자주 간(諫)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척하였으며 스스로 천민이 되어 유폐(幽閉)되었다.
●비간(比干)
상(商)나라의 28대 태정제(太丁帝)의 둘째 아들로서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이다. 사람됨이 곧고 강직하여 기자(箕子), 가 간언(諫言)하다 듣지를 않아 천민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비간(比干)이 계속 간(諫)하니주왕(紂王)이 대노하여 『성인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는데 확인해 보자』며 그의 간을 도려내어 잔인하게 죽였다.
●주왕(紂王)
상(商)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은 총명하고 용맹했지만, 자신의 재능을 지나치게 자신하여 신하의 간언(諫言)을 불필요하게 여겼다. 그는 술과 음악을 지나치게 즐겼으며 여자를 좋아하였다. 특히 달기(妲己)를 총애하여 그녀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주왕은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여「녹대(鹿臺)」 라는 궁궐을 짓고, 술로 연못을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놓고, 즐긴다는「주지육림(酒池肉林)」 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방탕하고 사치스럽게 생활했다.
백성들의 원성(怨聲)이 높아지자 형벌을 강화시켜 기름을 바른 구리 기둥을 숯불 위에 걸쳐 달군 뒤에 그 위를 맨발로 건너가게 하여 불에 타 죽게 하는 포락(炮烙)이라는 형벌까지 만들어냈다. 그리고 비중(費中)을 등용하여 국정을 담당하게 했는데, 그는 아첨을 잘하고 사리사욕(私利私慾)만 채웠기 때문에 상(商)의 백성들은 모두 그를 멀리하였다.
이처럼주왕(紂王)이 폭정(暴政)을 하자 백성들과 제후(諸侯)들은 점차 반기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특히 서백(西伯) 희창(姫昌, 뒤의 周文王)의 세력이 점차 강성(强盛)해졌다. 비간(比干)은 주왕(紂王)에게 이러한 정황을 간언(諫言)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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