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 단보(古公亶父, BC 15~12세기경)
周나라 문왕(文王)의 조부(祖父)로 무왕(武王)이 즉위한 뒤, 태공(太公)으로 추존(推尊)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조상인 후직(后稷)은 농업을 중시했으며, 공유(公劉)에 이르러 빈(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빈 현[彬縣])으로 부락을 옮겨 농업과 유목에 종사했다.
그러나 다시 단보에 이르러 융족(戎族)과 적족(狄族)의 약탈이 심해지자, 단보는 부족(部族)을 이끌고 빈을 떠나 주(周:지금의 산시 성 치산 산[峙山] 북쪽)로 옮겨 갔다. 성(城)과 집을 짓고 읍락(邑落)을 나누었으며, 종묘와 궁전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사토(司土)· 사구(司寇)의 5개 사직관(司職官)을 두었으며, 융족과 적족의 풍습(風習)을 개혁(改革)하고 토지를 개간(開墾)하여 농업을 발전시켰다. 주족(周族)은 이때부터 점차(漸次) 흥성(興盛)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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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太伯)과 우중(虞仲)→고공단보(古公亶父)의 큰 아들과 둘째아들
고공. 단보 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태백(太伯)과 우중(虞仲), 그리고 막내 계력(季歷)이었다.
막내인 계력은 어진 아내를 만나 아들 창(昌)을 낳았는데 낳을 때부터 상서(祥瑞)로운 일이 있고, 자라면서 특히 영특(英特)함이 범상(凡常)치가 않았다. 고공단보는 막내 계력에게 후사를 물려주고 싶었지만 그 당시(當時)엔 철저(徹底)한 장자 상속제(長者 相續制)였다.
이런 의중(意中)을 헤아린 태백과 의중은 서로 상의(相議)하여 남쪽에 있는 형만(荊蠻)땅으로 가서 오랑캐의 풍습(風習)에 따라 몸에 문신(文身)을 하고 머리를 잘라서 후사(後嗣)를 이를 자격(資格)을 스스로 받탈(剝奪)해 버렸다.
後에 태백과 우중은 형만(荊蠻)땅에서 수장(首長)으로 추대(推戴)되어 나라를 세웠는데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태백(太伯)과 우중(虞仲)의 후손(後孫)이라는 전설이 있다. 孔子도 태백(太伯)을 칭찬(稱讚)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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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公亶父 像 ↑太伯 像 ↑虞仲 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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