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국사(國史)

신륵사와 목은 이색

야촌(1) 2008. 2. 22. 17:06

신륵사와 목은 이색

 

■ 목은 거둔 제비여울엔 봄비가 -

 

↑강에 비가 내렸다. 지나치지도 않았고 모자라지도 않았다.

    바람도 알맞게 불었으니 고요한 강 덕분에 마음마저 차분해졌다.

 

 

봄비가 왔다. 다시 강으로 달려간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한강을 걷기 시작하던 지난 여름, 1년 동안 내려야 할 비를 하루 만에 퍼부은 탓인지 가을이어도 비는 드물었고 겨울이어도 눈조차 헤프지 않았으니 매번 이어지는 맑은 날의 풍경이 때로는 심드렁하기도 했다.
 
 더러는 강에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려도 나와 시간이 맞지 않아 걸음을 나누지 못했으니 오늘만큼은 기어코 비 내리는 강을 마주 보리라 다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눈 내리는 강의 정경을 그윽하게 바라보지 못한 아쉬움은 자못 크게 남아 있다.
 
마치 겨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묘한 박탈감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이미 길 나설 때 껴입는 두꺼운 옷들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비 내리는 신륵사의 새벽은 고요했다. 모든 것은 가라앉아 있을 뿐 들뜬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하늘빛이며 물빛, 절을 감싸고 있는 공기 또한 무게를 더하고 오직 빗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을 뿐, 풍경소리조차 잦아든 절 마당을 지나 강월헌으로 올랐다.

강물은 고여 있는 듯 흐름을 멈추었고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작은 파문이 일고 있었다. 물끄러미 비 내리는 강의 정경을 바라보다 발길 돌린 곳은 강월헌 위 다층전탑 뒤에 있는 전각이었다. 전각 안에는 깨진 비석이 세워져 있고 대장각기비각(大藏閣記碑閣)이라는 편액이 달려 있다.

비문은 도은(陶隱) 이숭인(1347~1392)이 지었지만 그 내용은 목은(牧隱) 이색이 1381년에 세상을 떠난 조부모와 부모님 그리고 공민왕을 위해 경(經)·률(律)·론(論) 삼장(三藏)을 새겨 신륵사에 모셨다는 내용이다.

본디는 목은의 아버지인 가정(稼亭) 이곡(1298~1351)이 1310년에 아버지, 그리고 1350년에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뜻을 세워 새기려 했던 것이지만 가정 또한 다음 해인 1351년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으니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1371년, 목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윽고 목은이 뜻을 세워 대장경을 찍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한 승려의 끊임없는 독려 때문이었다.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선사 중의 한 분이었으며 조선 태조의 제2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인 정릉(貞陵) 곁에 흥천사(興天寺)를 짓고 주지를 지냈던 상총선사(尙聰禪師)이다. 그는 목은의 아버지와도 가까운 사이였으며 가정이 부모를 잃은 슬픔에 젖어 있을 때 그 슬픔을 불법으로써 다스리라는 권고를 하며 대장경을 새기도록 권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상총선사는 틈나는 대로 목은에게 편지를 써서 그 일을 이루도록 독려했으나 목은은 이런저런 핑계로 일을 벌이지 않았다. 그러나 목은 또한 1351년 아버지를, 또 1371년에 어머니를 잃고 말았다.

 

그후 1379년에 목은을 만난 상총선사는 또 다시 “위로는 돌아가신 왕의 명복을 빌고, 아래로는 돌아가신 아버님의 뜻을 계승하는 일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라며 그 일을 이루라고 권하자 이윽고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 즈음은 목은이 나옹화상의 비문을 짓기도 했으며 나옹의 제자들과 깊은 교유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 마음을 일으켜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무급(無及)과 수봉(琇峯)이라는 호를 지닌 승려가 제자들을 이끌고 와 독려했으며 다음 해인 1380년에 일을 시작한 것이다. 

 

나옹화상의 제자들이 발 벗고 나서서 도운 끝에 1381년 4월에는 책을 묶었으며, 1382년 정월에는 개경의 영통사(靈通寺)에서 교열을 마치고 4월에 배에 싣고 이곳 신륵사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때 이미 신륵사에는 장경을 봉안할 전각을 이층으로 지어 단청까지 마쳤으며 전각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모시고 그 좌우에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을 협시로 세웠다고 비문은 밝히고 있다.

 

 

↑신륵사 대장경기비(보물 제230호)

 

비록 깨져서 내용을 다 알아 볼 수 없을 지경이지만 묵은 돌 하나에 이토록 깊은 뜻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유자(儒者)인 목은이 장경을 찍어 책으로 묶었다는 것이며, 또 선왕이나 부모님의 명복을 빌기 위한 일이었음에도 그 일을 무려 30년 동안이나 미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지난 글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나옹화상의 글이라면 도맡아서 짓지 않았던가. 또 그는 장경의 인쇄과정에서도 보이듯이 나옹이 입적한 후 그의 제자들과 깊은 교유를 나누었으며 이미 지나온 폐사지인 충주의 청룡사에 머물렀던 보각국사(普覺國師) 환암(幻庵) 혼수(混修)와는 젊은 시절부터 계(契)를 맺을 정도로 더할 수 없는 우의를 나누는 사상적 도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나옹화상이 입적하자 양주 회암사의 중창을 책임지고 이끈 윤절간(倫絶磵)이나 나옹의 입적 후 6~7년 동안이나 부도 곁을 떠나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킨 각웅(覺雄)과 같은 승려들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목은은 양주의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서 말하기를, “나는 본래 부처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현릉(玄陵)이 이분을 일찍이 스승으로 삼았기 때문에 경모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하물며 임금의 뜻을 받들어 명(銘)을 지은 터이므로 대사의 평생을 자세히 조사하여 더욱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았으니 어떠하겠는가? 

 

부처를 만들고 탑을 세웠어도 조금도 공덕이 없으나 대사의 도(道)에는 의논할 바가 아니다.” 여기서 이분이란 나옹을 말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공민왕 원년인 1352년에는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는 복중상서(服中上書)를 올린 적도 있다. 

 

그는 그 글에서 불교도의 수가 늘어났지만 오교양종(五敎兩宗)은 명리를 구하는 소굴이 되었으며, 큰 냇가 깊은 산골에 절이 없는 곳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여 승려가 되는 길을 제한하고 새로운 절을 세우는 것을 금하도록 하자고까지 주장했다.

 

 

↑효종과 인순왕후 릉

 

이는 오히려 안향(安珦, 1243~1306)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척불론(斥佛論)이나 배불론(排佛論)을 이어받은 담암(澹菴) 백문보(1303~1374)가 올린 척불소(斥佛疏)보다 10여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그런 그가 승려들과 우의를 나누고 장경을 인쇄하여 대장각을 짓고 봉안했으니 그를 주시하던 눈길들이 가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목은은 그것을 두려워해 장경 인쇄를 미루었던 것은 아닐까.

 

실제 대장경을 봉안하고 9년이 지난 공양왕 원년인 1389년에 그의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오사충(1327~1406)과 조박(1356~1408)은 그 일을 트집 잡아 이색을 탄핵하며 말하기를 “유종(儒宗)으로서 부처에게 아첨하여 장경을 인성(印成)함에 온 나라 사람들이 그 일을 본받아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풍속을 그르쳤다”라고 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배불론이 점점 드세게 펼쳐지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편승해 힘을 얻은 것이긴 하지만 목은과 같은 유학자로서 장경을 봉안한 일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안향으로부터 불기 시작한 배불론은 익재(益齋) 이제현(1287~1367)에게 이르러 주춤했지만 익재와 동시대의 인물인 졸옹(拙翁) 최해(1287~1340)는 안향의 배불론을 적극 수용했다. 

 

그러나 가정은 불교가 유교와 대립되는 것은 사실이나 근원에서는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겼던 인물이다. 그는 마음을 다스리고 기르는 존양(存養)의 면에서 유교와 불교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옹호론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유교적인 입장에서 기본 도리라고 할 수 있는 효(孝)의 문제에 있어서도 유교의 효와 불교의 자비는 서로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으니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나는 이제부터 어디를 믿고 의지할 것인가”라고 하자 상총이 장경을 인장하도록 권했던 것이리라. 

 

그러니 그는 유교를 따라 3년상을 치르고 또 불교를 따라 장경 인쇄의 불사를 일으킬 생각을 했던 것이다.

 

마암(馬巖)과 영월루(迎月樓)


그러니 목은을 불교에 치우쳐 성리학을 게을리한 인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다만 그는 성리학적 입장을 포기하지 않은 유학자이지만 불교를 이해하고 배척하지 않았으며 불교의 선지식들을 유교의 현인들과 같은 마음으로 대한 것이다. 그러니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이들보다

 

그의 학문의 폭은 더욱 넓었고 깊어질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그의 문집인 ‘목은집’에 절이나 승려들을 위해 쓴 기문(記文)이 37편이며 그중 9편이 나옹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둘이 서로 같은 고향이며 같은 장소인 신륵사에서 생을 마감한 사이이고 또 모두 왕의 스승이었지만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 일어섰다. 이색이 생을 마감한 곳은 신륵사라고도 하지만 이곳에서 강을 따라 양평 쪽으로 조금 더 내려 간 연자탄(燕子灘), 곧 제비여울이라고도 하기 때문이다. 여주대교를 지나 세종대왕릉으로 가는 길, 고대병원이 있는 곳 아래 강에 이르렀지만 빗줄기만 쏟아질 뿐 목은이 운명을 달리한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목은은 이곳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태조가 보냈다는 독이 든 술을 마시고 배 안에서 생을 마감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만 강을 떠나 효종대왕의 능인 영릉(寧陵)을 걸었다.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英陵)보다 한갓진 곳이기 때문이다. 

 

추적추적, 봄비 내리는 조선의 왕릉을 거닐며 내내 곱씹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 그리고 목은의 불굴(不屈)이었을 뿐 조선의 왕들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