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석(碑石)
1. 비석(碑石)이란?
고인의 사적(事蹟)을 칭송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문장을 새겨 넣은 돌로 비(碑), 빗돌, 석비 등 여러 말이 있
다. 그리고 비석에 새겨 넣은 글은 금석문이라 하여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비석의 시초는 옛날 중국에서 사당 문 안에 세워 제례(祭禮) 때 희생으로 바칠 동물을 매어 두던 돌말뚝에서 비롯되었
다하며, 또 장례식 때 귀인(貴人)의 관을 매달아 구덩이 안에 공손히 내려 놓기 위하여 묘광(墓壙)(무덤구덩이) 사방에
세우던 돌을 말하기도 한다.
그 돌을 다듬고 비면에 공덕을 기입하여 묘소에 세우게 된 것은 훨씬 후세의 일이며, 당시는 비석이 아닌 각석(刻石)이
라 하다가 이것을 비석이라 부르게 된 것은 전한 말기나 후한 초의 일이다. 우리나라는 비석이 언제부터 세워졌는지 확
실치 않으나 고구려 때 광개토대왕릉비가 세워진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세부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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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그림 출처 : 솔뫼
비석은 대개 비신과 이수(螭首), 귀부(龜趺)로 되어 있으나 서민층의 묘소에는 이수와 귀부 없이 비신만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이수(螭首)의 이(螭)자는 본래 뿔이 없는 용 또는 교룡(蛟龍)을 가리키는 글자이다. 그 용어와 양식은 중국에서부터 사용한 것으로, 본래는 비액(碑額), 돌기둥, 돌계단, 인장(印章), 종(鐘), 솥 등의 표면과 머리 부분에 용의 형체를 조각하여 장식한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비액(碑額)의 이수(螭首)가 형체나 크기로 보아 가장 대표적인 것이어서 오늘날의 일반적인 개념이 되었다.
지금의 이수와 비신(碑身), 귀부(龜趺)를 가진 비석 양식과 수법의 기본형이 등장한 건 중국 당나라 때이고, 이것이 한국에 전해져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 비석의 기본양식이 되기도 하였다.
중국 당나라 이수의 특색은 둥근머리의 형태에 좌우 2∼3마리의 반룡(蟠龍)들이 서로 얽힌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반룡의 머리만을 나란히 하여 비석을 물고 비신을 일제히 들어올리는 듯한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는 점이다. 이러한 당대 비석의 양식이 통일신라에 수용되어 한국의 비석에서도 귀부와 이수가 갖춰지게 되었다.
통일신라 초기에는 당비의 이수의 특징을 그대로 갖추고 있으나, 9세기 후반에 가면 둥근 머리형에서 관형(冠形) 또는 개형(蓋形)으로 변화되어 간다. 고려 초기까지 이러한 형식이 이어지다가 12세기 말에는 이수 없는 비신 위에 우진각 지붕형으로 된 형태의 비석이 나타나고, 14세기 말에는 옥개풍(屋蓋風)의 지붕형 이수를 가진 또다른 형식이 출현한다.
그러다 조선 초기에는 다시 당송시대의 이수를 가진 비석양식이 보이기도 하다가 15세기 말경부터는 고려 말의 옥개형 비석형식을 기본으로 하는 간략한 양식이 주조를 이룬다.
◇제액(題額) : 비신(碑身)의 상단부나 이수에 비의 명칭을 새긴 부분.
◇보주(寶珠) : 구슬 모양의 장식.
◇귀부(龜趺): 삼국시대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비신 위에 두 마리용으로 장식된
이수를 씌우는 것이 보통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용의 모습 외에 해태 모습을 한 것도 있고, 사실적인 거북 모양에서
점차 변형되어 장중한 것, 패기에 넘치는 것, 우아한 것 등 형태를 달리한 것이 많다.
◇여의보주(如意寶珠, 여의주) : 불교에서 이것을 가진 자의 모든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는 주옥(珠玉).
◇귀갑문(龜甲紋) : 거북등무늬. 거북의 등 모양으로 여섯 모 꼴이 가로세로로 잇달아 있는 무늬. 비석 중에는 이 귀갑문
에 王자를 새겨 넣은 비석을 볼 수 있다.
◇연화문(蓮花紋): 연꽃 모양의 무늬.
3. 비석(碑石)의 종류(種類)
비석의 종류로는 묘비를 비롯하여 능비, 신도비(神道碑), 기적비(紀蹟碑), 기념비, 순수비, 정려비(旌閭碑), 송덕비(頌
德碑), 애민비(愛民碑), 영세불망(永世不忘)(영원히 잊지 아니함)비 등이 있다.
가. 묘비(墓碑), 능비(陵碑)
무덤에 세우는 비. 능비는 무덤의 주인 중에서도 지위가 가장 높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일컫는 능에 세워진 비를 말
한다. 비신에는 죽은 자의 관직, 본관, 성명, 행적, 자손, 생몰연월일, 장지 등을 기록한다.
나.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高官)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석. 대개 무덤 남동
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우는데, 신도(神道)라는 말은 죽은 자의 묘로(墓路),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당시는 3품 이상의 관직자 무덤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에 한하여 세우는 것으로 제도화하였다. 조선 문종은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는 것을 법으로 금
지하였고, 공신이나 석학(碩學) 등에 대하여는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우게 하였다.
다. 순수비(巡狩碑)
왕이 순수(巡狩)한 곳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 순수라는 말은 천자가 천하를 돌아다니며 천지산천에 제사하고,
지방의 정치, 민정을 시찰하던 고대 중국의 풍습을 뜻한다. 우리나라에 발견된 순수비는 신라 진흥왕이 세운 것으로
이들은 모두 진흥왕이 확장한 영토, 곧 당시 신라의 국경을 표시한다.
라. 하마비(下馬碑)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말을 탄 사람이 왕릉, 궁궐, 서원 같은 중요한 장소로 들어갈 때는 말에서 내리라는 글을 새
긴 비석.
마. 정려비旌閭碑)
정려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걸 뜻하며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
이 정려비다.
바. 유허비(遺墟碑)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단계하위지선생유허비(丹溪河緯地先生遺墟碑)
↑단계하위지선생유허비각(丹溪河緯地先生遺墟碑閣)
즉 유허비란 한 인물의 옛 자취를 기리기 위해 세우는 비로, 이 비는 조선 전기의 이름난 문신인 하위지(1387∼1456) 선생의 고향에 자리하고 있다. 하위지 선생은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세종 20년(1483)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집현전의 교리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으며, 성삼문 등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참형을 당하였다.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그의 내력이 알려져 관직을 되찾았으며, 영조 때에는 이조판서로 증직되어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비는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이다. 비의 앞면에는 ‘유명조선단계하위지선생유허비(有名朝鮮丹溪河緯地先生遺墟碑)’이라는 비의 이름을 새겨저 있고 내용이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산 10-2 번지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탑비로, 높이 3.46m. 보물 제158호.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보조선사(普照禪師) 지선(智詵)의 탑비로서, 그가 입적한 뒤 4년 만인 884년에 사리탑(舍利塔, 보물 제157호)과 함께 조성되었다.
이 비는 비신(碑身)과 귀부(龜趺)·이수(螭首)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이수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명(迦智山普照禪師碑銘)”이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다. 비문은 김영(金穎)이 짓고, 글씨는 김원(金薳)과 김언경(金彦卿)이 썼는데, 첫줄에서 일곱째 줄의 ‘선(禪)’자까지는 해서(楷書)로 김원이 썼고 ‘사(師)’자 이하는 행서(行書)로 김언경이 썼다.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쓴 것으로 생각되는데, 일찍이 청말의 금석연구가 섭창치(葉昌熾)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 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이라고 평한 바 있다.
비신을 받고 있는 귀부는 얼굴이 용두(龍頭)처럼 변하였으며, 이목구비의 조각이 뚜렷하여 사나운 모습을 보여준다. 등 뒤에는 육각형의 귀갑문(龜甲文)이 등 전체를 덮고 있으며, 등 가운데 구름문과 연꽃을 돌린 비좌(碑座)를 설치하여 비신을 받게 하였다.
이수는 아래에 구름문을 조각하고 비제의 좌우에 대칭적으로 반룡(蟠龍 : 승천하지 않은 용)을 조각하였는데 뛰어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 비는 9세기말경의 석비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강희맹선생신도비(姜希孟先生神道碑)
↑강희맹선생신도비각(姜希孟先生神道碑閣)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 산2번지『조선 세종ㆍ세조ㆍ성종 대 활동했던 문신 사숙재 강희맹(私淑齋 姜希孟, 1424~1483)의 신도비이다. 그는 진주(晉州) 강씨로 조선 초기 시ㆍ글씨ㆍ그림으로 유명한 강희안(姜希顔)의 동생이다. 세종 29년(1447) 24세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의정부에서 일반정사를 처리하는 좌찬성에 이르렀다.
신도비(神道碑)는 종2품 이상의 공신이나 훌륭한 학자에게 허용되었던 것으로 묘의 아래 가까이 길 옆에 세웠다. 신도비의 비문은 서거정(徐居正)이 짓고 글씨와 전액(篆額)은 박증영(朴增榮)이 써서 1488년(성종 19년)에 건립되었다.
↑경기전 하마비
경기전의 하마비는 1614년(광해군 6년) 왜란때 소실되 버린 경기전을 중건하면서 세워졌으며, 이후 1856년(철종 7년)에 중각(重刻)되었다. 경기전 하마비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 써있다. 그 의미는 "이곳에 이르는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보편적으로 하마비의 비문이 하마(下馬)의 내용만 표기하고 있는것에 비해 경기전의 하마비 비문은 말에서 내리어 예를 표현하는것 외에 잡인(雜人)은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까지 표기하여, 지나는 사람들외에 출입하는 사람들까지도 통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王碑)/1984년 모습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 퉁거우[通溝]지방에 있는 고구려 19대 광개토왕의 비석이다.
414년(장수왕 2)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이 건립하였다.
높이 6.39m, 넓이 1.5m, 두께 l.53m의 사면석비[四面石碑]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묘호[廟號]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3글자를 본떠서 일명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받침돌이 없이 비신[碑身]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각 면의 위와 아래에는 가로선을 긋고 매행은 약 13㎝ 간격으로 가는 세로선을 그었다. 필체는 한예[漢隸]의 팔분서[八分書]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4∼15㎝ 정도 크기의 문자가 4면에 총 44행[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 1775자가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1534자이며 상고사[上古史]중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적었다. 능비는 1880년경에 재발견되었는데 재발견된 초기에는 비면의 상태불량과 탁본여건의 미비로 단편적인 탁본이나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 유행하였을 뿐 정교한 원탁은 87년경 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882년경에 만주를 여행하던 일본군 참모 본부의 밀정인 중위 사카와 가게노부[酒匈景信]에 의해 비문의 일부 문자가 변조되었다. 또 99년경부터는 일본·청나라 양국에서 비문변조를 합리화하거나 고가 매매를 하기 위해 보다 선명한 탁본을 얻고자 비면에 석회칠을 감행함으로써, 비면이 마멸고, 일부 문자가 오독되었다.
↑충주 중원고구려비(忠州 中原高句麗碑)
↑중원고구려비보호각건립기(忠州 中原高句麗碑保護閣建立記)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280-11 입석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고구려의 고비로서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다. 1979년 2월 25일 충주지방의 향토사연구 모임인 예성동호회의 제보에 의해 동년 4월 8일, 단국대학교박물관 학술조사단이 비면 탁본과 정밀한 해독(解讀) 작업을 실시해 비문에서「고려(高麗)」란 국명(國名)과 함께 「대사자(大使者)」,「발위사자(拔位使者)」, 「대형(大兄)」, 「당주(幢主)」 등등의 고구려 관등과 관직을 확인함으로써 고구려가 세운 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건립의 연대는 고구려 제20대 장수왕 69년(서기 481년)이다. 이 비는 광개토왕비를 축소한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할 정도로 외형이 비슷한데, 사각의 석주형(石柱形)으로 높이는 약 2.03m, 너비는 0.55m이다. 비의 재질은 견고한 화강암으로 자연석을 이용하되, 글자를 새긴 곳은 물갈이를 하였다.
글자의 크기는 3~5㎝로 일정하지 않으며, 앞면 10행, 왼쪽면 7행, 오른쪽면 6행이 확인되었다. 비문의 서체는 고졸(古拙)한 예서체라는 설과 예서체를 간직한 해서(楷書)라는 설 등으로 견해가 나뉘어져 있다. 문체는 순수한 한문은 아니며 이두문과 고구려식의 한문이 섞인 혼용문으로 되어 있다.
발견 당시 비의 전면에 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 글자의 확인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이끼를 제거하고 면밀히 조사한 결과 현재 앞면으로 추정되고 있는 면과 그 왼쪽 옆면, 그리고 오른쪽면에서 문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뒷면은 글자를 새겼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만 확인했을 뿐 글자를 한 자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해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많아 비를 세운 시기를 비롯한 비문의 전반적인 내용 등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논란이 분분해 왔다. 특히 글이 새겨진 비면의 수, 비문의 순서, 건립연대 등등을 둘러싸고 이견이 많았지만 최근의 면밀한 조사를 계기로 어떤 사항에서는 상당히 의견이 수렴되어 가고 있다.
발견 당시 2면 비, 3면 비, 4면 비로 보는 견해 등으로 엇갈려 있었으나 이제 4면 비임이 거의 확실시되었고, 앞면 상단부에서 ‘년(年)’ 자를 판독해냄으로써 원래 제액(題額)의 존재 가능성을 확인하고 아울러 앞면이 제1면이라는 점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앞면이 첫째 면이며, 왼쪽 면, 오른쪽 면, 뒷면의 순서로 문장이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앞면 1행 여덟 번째 글자가 「조(祖)」자임이 분명해져 그 동안 비의 건립연대에 대해 광개토왕대설, 장수왕 37년(449)설, 장수왕 68년(481)설 등으로 나뉘어 분분했던 논란은 거의 종식되고 문장왕대로 정리되었다.
이비는 고구려비 가운데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예로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東夷)」라 칭하면서 그 국왕에게 종주국으로서 의복을 하사했다는 귀중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등 문헌 기록에 전혀 나와 있지 않았던 사실로, 4세기 말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주변 세력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천하관(天下觀)의 존재를 보여 고구려사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 주었다.
그리고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란 직명으로 미루어 신라 영토 안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도 사실성이 높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밖에도 고구려에서 직명-부명-관등명-인명의 순으로 표기했다는 점, ‘절교사(節敎事)’ 등의 표현에 보이듯 고구려에서 이미 5세기 이전부터 이두가 사용되었다는 점등과 함께, 고구려 관등조직의 정비과정을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고구려사에 접근하는데 새로운 정보를 담고 있다.
비가 발견된 초창기에 연구자들이 공동 조사를 한 뒤 기본적인 비문 조사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였는데, 2000년 2월에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에서 최첨단의 기기(機器)를 동원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본 비를 본격적으로 재조사함으로써 연구사상 전환기를 맞이했다.
그럴 뿐만 아니라 특히 많은 연구자들이 동원됨으로써 객관성을 높이려 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때 1979년 처음 만들어진 탁본자료와 적외선 사진, 그리고 2000년 현장에서 탁본한 것을 직접 비교 분석하여 컴퓨터에 입력하는 한편, 그 동안 마모된 부분에 대해서 적외선 사진을 촬영하였는데, 이는 국내에서 비문 판독에 처음으로 시도해 본 것으로 앞으로 다른 고비(古碑)에 대한 연구에서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낳았다.
이 조사로 인해 이전에 판독하지 못하여 미상으로 처리되었던 글자를 23자 정도 더 밝힐 수 있게 되었고 견해가 엇갈려 논란되었던 글자들을 일부 확정짓기도 하는 등 고구려 연구와 고비(古碑)연구에 있어서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창녕 진흥왕순수비(昌寧眞興王巡狩碑/拓境碑)
◈높이 : 1.78m.
◈건립연대 : 신라 진흥왕 22년(561) 건립(辛巳年 2月 1日).
◈문화재 지정 : 국보 제33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동 소재원래는 화왕산 기슭에 있었던 비로서 1924년 현재의 위치로 옯겨 새웠다.
창녕의 신라 진흥왕척경비(국보 제33호)는 신라 진흥왕이 척경(拓境)과 순행(巡行)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일반적으로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국보 제33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국보 제3호)· 마운령 신라진흥왕순수비·
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 등을 일컫는다. 이들 순수비에는 대등(大等)을 비롯하여 당시 왕을 수행하였던 신하들의 이
름이 기록되어 있다.
진흥왕은 540∼576년의 37년간 재위하는 동안 낙동강 서쪽의 가야세력을 완전 병합하였고, 또 한강 하류 유역으로 진
출하여서 해안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동북으로는 함경남도 이원지방까지 경략하는 등 정복적 팽창을 이룩하
다.
이렇게 확대된 영역을 진흥왕이 직접 순수하면서 민심을 살피고 국가에 충성과 절의를 바친자에 대한 공로의 포상을 선
포하고 군신이 함께 경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모두 4개인데, 이들은 약칭하여 창녕비· 북한산비· 마운령비· 황초령비라고도 한다. 이 순수비들은 진흥왕 당대의 금석문 자료로서《삼국사기》의 소략한 기사를 보완해 줌으로써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첫째, 황초령비· 마운령비의 발견으로 진흥왕대의 신라의 동북국경이 함경남도 이원군까지 이르렀던 것을 알게 되었고,
둘째 수행한 신료의 명단을 기록함에 있어서 소속부명·관계명(官階名)·관직명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신라시대의 6부제와
17관등제의 구조와 성립시기 등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셋째 군주· 당주· 도사· 촌주 등의 관직과 술간(述干) 등의 외위가 기록되어 지방통치조직과 재지세력의 편제를 알 수 있
게 하였고,
넷째 이내종인(裏內從人)·집가인(執駕人) 등 국왕 측근신하의 직명이 기록되어 있어 이 시기 왕의 근시기구의 구성을 엿
볼 수 있게 하며,
다섯째 '제왕건호(帝王建號)', '짐(朕)'하는 제왕적 존대성을 과시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당대 신라인들의 자존의식
을 엿볼 수 있게 한 것 등이다.
전반이 마손되어 자획이 불분명한 점이 있으나 한반도에 전하는 비석으로는 가장 오랜 것인데, 건립연대는 비문에 보이는 “辛巳年 二月 一日 立”으로 미루어 561년(진흥왕 22)으로 추정되고 있어 앞의 3기(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보다 수년 앞서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척경비는 본래 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록(火旺山麓)에 있었는데, 1914년 일본인에 의해 발견되었고, 192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재료는 화강암을 갈아서 만들었으며, 비의 높이는 가장 높은 쪽이 299.9cm, 가장 낮은 쪽이 115.1cm이고, 가장 넓은 부분이 175.5cm, 두께는 51.6∼30.3cm이다.
자연암석을 이용하여 대석(臺石)이나 개석(蓋石)을 사용하지 않은 삼국시대 비석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형식이다.비면에 새긴 글자는 모두 27행으로, 한 행은 26자 내지 18자이며 자경(字徑)은 3.9cm이다. 글자체는 해서체이며 음각하였다.
비문의 구성은 제기(題記, 제1행 1∼8자)·기사(紀事, 제1행 11자∼제11행 1자)·수가인명열기(隨駕人名列記, 제11행 8자∼제27행)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는 진흥왕이 창녕지방을 영토로 편입한 뒤 이 지역을 순수하면서 민심을 살피고 그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1면을 간 다음 외연(外緣)에 비석 형상을 따라 윤곽선을 돌렸는데, 우상부(右上部)는 암석이 사면(斜面)을 이루고 있으므로 1행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중국(中國)의 육조풍 해서체(楷書體)로 각 행마다 27∼18자씩 모두 27행 643자이다.
이 중에서 현재 4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자수는 일정하지 않으며 끝 행은 3자뿐이고 우반부(右半部)에서는 위에서 2행마다 1자씩 낮추어져 있다. 인물의 열기는 속부(屬部)·인명(人名)·관직(官職)·직위(職位)를 표기하여 삼국시대 신라비문의 통식을 따르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하여 당시 지방행정조직(地方行政組織)의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이 순수비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가야의 고분들이 있다. 그런데 그 고분들 근처에 이 비가 세워졌다는 건 어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경주 태종무열왕릉비(慶州 太宗武烈王陵碑)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4-1에 소재하는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碑)들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몸위의 머릿돌에는 용의 모습을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그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
비각안에 모셔져 있는 비는 현재 비몸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위로 머릿돌만이 얹혀져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에는 큼직한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긴 후,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 주위로 연꽃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머릿돌 좌우에는 6마리의 용이 3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 놓아 비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건립되었으며, 명필가로 유명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글씨로 비문을 새겨 놓았다.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강한 인상을 주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도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으로, 능숙하게 빚어낸 기법에서 당시 석조 조각의 발달상을 엿볼 수 있다.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광주 십신사지 석비(光州 十信寺址石碑)
↑광주 십신사지석불(光州 十信寺址石佛)
십신사지석비((光州 十信寺址石碑, 유형문화재 제3호-1986. 11. 01지정).
광주광역시 북구용봉동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
이 비석은1978년2월 보수 공사 때 비석에 씌어진 글에서'정사년'이라는 글귀가 발견된 점으로 보아 조선 세종19년인1437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십신사지 석불과 함께 있다가 1977년 현위치인 광주시립민속박물관으로 이전 복원한 것이다.
십신사는 고려 문종 때 창건된 큰 절로 알려지고 있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는 기록에 의하면 조선 중종 때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없어졌는지 그 경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석비의 형태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기둥, 지붕돌을 모두 갖추고 있다.
받침돌에 새겨진'왕' 자는 고려적인 요소이나 팔작지붕과 퇴화된 거북 부분으로 미루어 고려 전통을 이어 받은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기둥에는 윗부분에 범자를 새기고 그 아래에 글을 새겼는데 그 내용은 불경의 한 종류인 능엄경에 나오는 글로'병을 막고 오래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비는 옥개석 일부가 결실되었을 뿐 비신과 귀부가 완전히 갖추어진 것이다. 비의 규모는 총고5.15m, 길이2.98m, 너비1.68m의 지대석위에 길이2.73m, 너비1.32m의 귀부를 놓고, 그 위에 길이3.96m, 너비0.98m, 두께 0.5m의 비신을 결구한 다음 높이0.35m인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비신의 상단부에 길이83㎝, 너비68㎝로 구획을 만들고 보주와 같은 문양을 새겨 놓았는데, 이 문양은 범자의 옴(唵)자를 도안화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서에 범자비로 기록되어 있다. 비의 제호는 범자문양 밑에 가로로 ‘大佛頂尊勝陀羅尼幢(대불정존승다라니당)’이라 오목새김되어 있어, 이 비가 불정존승다라니경을 세긴 경당(經幢)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은 한자로 오목새김하였는데, 석질이 약하고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힘들지만 대개 총9행으로, 1행31∼32자를 음각하였으며 제9행의 말미에 ‘丁巳(정사)’란 간지가 있다.
비의 건립 연대는 비문 끝부분에 있는 ‘정사년’이란 간지와 조선 초기의 작품인 점으로 미루어 세종19년(1437) 또는 연산군3년(1497년)으로 비정할 수 있어15세기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비에 새겨진 ‘대불정존승다라니당’이란 문자와 같은 불당을 새긴 예로는 황해도 해주와 평안북도 용천의 〈대불정다라니당〉이 있고 개성 선죽교와 평양 범수교의 교재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증심사범자칠층석탑의 경우도 이러한 경당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있다.
불정존승다라니경은 존승법(尊勝法)이라고도 하는데 그 내용은 석가여래불정으로부터 출현한 불정존승을 본존불로 삼고 ‘존승다라니’를 외우면서 얽매여 있는 일체의 생각이나 미망에서 벗어나려는 밀교의 수도법이며 또한 질병을 막거나 장수 등을 기원하는 현세구복적인 기도법이다.
이 석비도 이러한 경의 내용이나 기도법에 관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교의 한 계통인 밀교의 진리를 설법하는 비문을 새긴 범자비로서 남한에서는 처음 확인된 것이다.
↑배순 정려비(裵純 旌閭碑) 뒷면
↑배순 정려비각(裵純 旌閭碑閣)
배순(裵純)은 조선 중기 때의 사람으로 1615년(광해군 7)에 충신과 효자의 면모를 인정받아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워 표창 받았다. 이를 정려(旌閭)라고 하는데, 정려비(旌閭碑)는 1649년(인조 27) 그의 손자 배종이 세웠다.
지금의 정려비는 1755년(영조 31) 그의 7대 외손인 임만유가 ‘충신백성(忠臣百姓) ’이라는 말을 넣어 고쳐 세운 것이다.
배순(裵純)은 천성이 유순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문에 힘써 풍기 군수였던 이황(李滉)이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유생에게 학문을 강론할 때 그도 배우도록 배려하였다.
이황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3년상을 지내고 철상(鐵像 : 사람이나 동물 등의 형상을 쇠를 부어 만든 상)을 만들어 기리는 등 제자의 예를 다하였다. 배순이 죽자 군민들이 정려각을 세우고, 마을 이름을 그의 성인 ‘배(裵)’를 따서 ‘배점’이라 불렀다.
풍기 군수였던 창석(蒼石) 이준(李埈)은 배순의 충성과 효도 등 귀감이 되는 생활이 정려받도록 하여 정려가 상신(上申)되었고, 1615년(광해군 7) 5월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34년 후인 1649년(인조 27) 3월에 그의 손자 배종(裵種)에 의하여 지역출신 문사인 단곡(丹谷) 곽진(郭 山+晋)이 쓴 비음(碑陰)으로 묘비와 함께 정려비(旌閭碑)가 세워졌다.
현재의 비는 1755년(영조 31)에 그의 외손 임만유(林晩維)에 의하여 ‘충신백성’이라는 글이 들어가면서 개립된 것이다.. 단곡(丹谷) 곽진(郭 山+晋)은 시에서 “충효는 본래 타고나는 것인데, 사람들은 외물에 이끌려 천성만 잃는다네.[忠孝元來本自然 人牽外誘喪其天] 참된 충성 참된 효도 오직 배순이니 이 유허 지나가는 이 누군들 예를 표하지 않으리.[純忠純孝惟純耳 過此遺墟孰不虔)]라며 배순의 덕을 기렸다.
배순은 조선 명종~광해군 3대에 걸쳐 생존했던 인물로 소수서원 인근 마을인 배점리에서 철을 만드는 장인이었다. 천성이 순박하고 근면하여 평생 망언을 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학문을 좋아하였고 근처에 소수서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인이었던 까닭에 서원에서 정식으로 공부할 수 없었다.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재임하자 소수서원에서 유생에게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꼭 공손히 뜰아래 무릎을 꿇고 참가하였다고 한다. 그의 나이는 이황이 풍기 군수로 재임할 당시 16~17세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학문적 열정에 감복한 이황이 다른 제자와 함께 가르쳤다.
선조가 승하하자 매월 초하루 보름에 음식을 가지고 뒷산에 올라가 3년 동안 궁궐을 향해 곡을 하면서 제사를 지냈다.
마을 뒤의 초암사 뒷산은 배순이 선조를 제사한 곳이라고 해서 국망봉(國望峰 : 나라, 즉 선조를 바라본 봉우리라는 뜻)이라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배순은 이황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3년복을 입고 무쇠로 퇴계의 상을 만들어 제사를 올렸다.
그가 죽는 날 갠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까마귀가 뜰에 무리로 모여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또 부인이 집이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화염 속에 남편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는데 이날 배순은 자는 듯이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배순(裵純)은 무쇠를 다루는 대장장이였다. 어느 곳에서 태어났는지 알지 못하고 풍기로 이사 와서 산지가 30여 년인데, 죽계(竹溪 : 지금의 순흥)의 상류인 평장동(平章洞) 어귀에 가게를 지어 놓고 풀무간일로 업을 삼았다.
대장장이란 자들은 그릇이 틈이 있으면 진흙을 바르고 물이 새면 밀랍으로 때워서 자못 거짓으로 꾸며서 이익을 취하는데, 배순은 이와 반대로 기구가 틈이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알려 틈이 있다 하고는 값을 내렸고, 기구가 물이 새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물이 샌다고 말하여 가격을 내렸다고 한다.
나는 이로써 그의 정직함을 알았다. 성품이 벌을 치기를 좋아하여 벌이 거의 수십 통이었는데, 일찍이 벌을 죽이지 않으려고 꿀을 다 뜨지 않고 다만 때때로 숟가락을 잡고 뚜껑을 열어 그 맑은 것만 취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로써 순의 청렴함을 알았다.
순이 옛적에 선성(宣城) 지방에 살면서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심상삼년의 복을 하였고 선생의 철상(鐵像)을 만들어 놓고 제사지냈으니, 그 현인을 앙모하는 정성이 지극하였다. 선조대왕이 돌아가심에 순이 또한 삼년 상복을 입었고, 복을 마침에 담제(禫祭)를 베풀었으니, 그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지극하였다.
아! 순의 선행을 사군자들에게 물어 찾으니 또한 본 사람이 많지 못하였다.
착한 일을 많이 하여도 신분이 비천하여 마침내 이에 이르렀으니 아! 슬프도다.
범인들의 마음은 하는 바가 있어서 선을 하는 자는 능히 오래 가지 못하니, 혹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다가도 나중에는 게을러지고, 혹 어려서는 어질다가도 늙어서는 어기어지고, 심한 자는 하루 이틀 사이에 또한 혹 변하고 바뀌는데, 하물며 삼년이겠으며, 하물며 일생을 마칠 때까지이겠는가?
순은 팔십이 다 되어 죽었는데 그때까지 그 마음은 한결 같았으니, 나는 그가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겠다. 세상에서 재주 있는 사람이나 이름난 벼슬아치들도 그 마음이 누구인들 아름다운 이름을 따내어 일세를 빛내고자 하지 않으랴마는, 그러나 또한 능히 하는 이는 드무니, 곧 그 재주와 식견이 미치지 못하여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순이여! 천성적으로 얻어서 마음에 따라 지킨 것을 잃어버리다니 애석하도다.
순이여! 몸은 초목과 더불어 같이 썩었도다. 황천이 어둡고 어두우니 누가 어두움을 끼쳤던고?
순은 세 아들과 여덟 손자를 두어 심히 번성하니 일찍이 덕을 심은 효험이었던가? 내 감히 대략의 앞뒤를 서술하여 어진 사또에게 드리니 사또의 선을 좋아함이 진실 된 지라 내 생각에 배순은 영영 없어짐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당시에 사또는 창석(蒼石)이었다. 당음(棠陰 : 어진 지방관이 정사를 펴는 곳)에 아뢰어서 다시 조정에 보고하여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단곡(丹谷) 곽진(郭 山+晉) 짓다.
『단곡집(丹谷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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