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정안대군묘지명(定安大君 墓誌銘)

야촌(1) 2010. 12. 1. 02:03

■ 정안대군 상혜공 허종 묘지명(定安大君尙惠公許琮墓誌銘)

 

   [지은이] 이제현

   [형태사항] 크기>51.0 x 98.0/한자

   [비고] 識記 : 至正五年(1345) 五月日書備考 : 忠宣王公主駙馬許琮(미상-1345)의 墓誌銘임 소장처분 류기

              호: 54

   [소장정보] 현소장처 :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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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찬자는 이제현(李齊賢, 1287-1367), 서자와 각자는 모두 미상으로 해서(楷書)로 쓰여진 탁본(拓本) 1장의 금석문이다. 전액(篆額)이 ‘정안대군묘지명(定安大君墓誌銘)’으로 되어 있으나, 흔히 「허종묘지명(許琮墓誌銘)」이라 간칭한다.

 

비는 1345년(충목왕1년)에 만들었고 서울대학교도서관(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산 56-1)에 소장되어 있다. 현전본 『익재난고(益齋亂藁)』에는 이 묘지명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표제 : 定安大君墓誌銘 

 

[저자사항]

찬자는 추성양절좌리공신 삼중대광 김해부원군 영예문관효사관사(推誠亮節佐理功臣 三重大匡 金海府院君 領藝文館孝思觀事) 이제현이다. 이제현은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중사(仲思), 호(號)는 익재(益齋)·역옹(櫟翁)·실재(實齋)이다. 초명은 지공(之公)이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1303년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 등을 거쳐1310년(충선왕 2) 선부산랑(選部散郞), 1312년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등을 거쳐 1314년원나라에 가서조맹부(趙孟)등과 고전을 연구하였다.

 

1320년충선왕이 모함으로 유배되자 원나라에 그 부당함을 밝혀1323년에 풀려나게 하였다.

1336년삼중대광영예문관사(三重大匡領藝文館事)에 올랐다.

 

1339년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하자 연경(燕京)에 가서 해명하고 돌아왔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원나라 사신이 왕을 잡아가자 사면을 요청했다.

 

1348년(충목왕 4)왕이 죽자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으로 원나라에 가서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요청했고,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정승(右政丞) ·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가 되었다. 1356년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후 사직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로 호종,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공민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경주의 귀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역옹패설(櫟翁稗說)』 『익재난고(益齋亂藁)』 등이 있다.



[자료개관]
이 묘지명은 전액(篆額)이 ‘정안대군묘지명(定安大君墓誌銘)’으로 되어 있으나, 흔히 「허종묘지명(許琮墓誌銘)」이라 간칭한다. 비는 1345년(충목왕1년)에 만들었고, 크기는 세로 34.5cm, 가로 21.3cm이다. 서울대학교도서관(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산 56-1)에 소장되어 있다. 

 

글은 추성양절좌리공신 삼중대광 김해부원군 영예문관효사관사(推誠亮節佐理功臣 三重大匡 金海府院君 領藝文館孝思觀事) 이제현이 지었다. 단, 현전본 『익재난고』에는 이 묘지명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허종(許琮, 1286-1345)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의 손자이고, 양천군(陽川君) 검교정승(檢校政丞)허숭(許嵩)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염씨(廉氏)이다. 충렬왕에 의하여 궁중에서 자라서 충선왕의 딸수춘옹주(壽春翁主)와 혼인하였다. 충렬왕때 수사공(守司空)을 지내고 왕명으로 3년간 원나라에 가 있었다.

 

충선왕 때 수사도(守司徒)로 정안군(定安君)에 봉해지고, 뒤에 다시 원나라에 갔다가 어버이의 별세로 돌아와 은거하며 의술로써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그를 입조하게 했다.

 

충선왕이 연도(燕都)에서 돌아와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에 봉해졌고, 또 충혜왕을 따라 원에 들어가 5년 동안 머물렀다. 충목왕원년에 수춘옹주가 죽자 슬픔이 지나쳐 병이 들어 별세하니 향년 60세였다. 시호는 상혜공(尙惠公)이다. 후사는 없다.

 

『고려사절요』 제25권 충목왕(忠穆王) 을유 원년(1345)[원나라 지정 5년] 봄 2월에 다음 졸기가 있다.
2월에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 허종(許琮)이 졸하였다. 충렬왕이 허종을 궁중에서 길렀고, 자란 뒤에 충선왕의 딸 수춘옹주(壽春翁主)에게 장가들었다.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매일 의약으로 사람 살리는 것을 일삼았으며, 부귀하게 생장하였으면서도 교만한 빛이 없고 예를 지키고 덕을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버클리 소장 탁본을 통해『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중세하편(中世下篇)(1984)에서 해독하지 못한 몇 글자를 더 해독할 수 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자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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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定安大君墓誌銘(篆額)」

三重大匡定安府院大君贈諡尙惠公」


推誠亮節佐理功臣三重大匡金海府院君領藝文館孝思觀事李齊賢譔」


竹軒金政丞請於余曰故定安府院大君吾之親舅昆弟」友愛甚篤不幸而不祿將以今至正五年五月而申葬匃子」䚴銘諸石以納幽墟子必毋讓感其義爲之銘曰」


陽川之許赫世珪組父敬諱珙位宰之家生良肅公諱評改嵩」

委禽廉氏秦晋偕美定安英英許胄廉甥旣剛而敏亦精而謹」

績善有慶名以義定可寶可宗改易爲琮齊長公主幼而拘蹟」

及長成人令尙壽春忠宣作后曰予汝舅汝長憲司繩愆格非」

封仗彈刻」

具褫魄院君加大偑玉張益興之觀先引見仁皇擧止中度」

兼蒙語皇心悅諸授六尙書滿盈是戒撝謙自退三十五年」

優亭淸閑施藥濟民世感其仁損金供佛歲無虛月爲事俱備」

一恨無閑乙酉孟陬壽春僊遊哀毁成疾日二十七沒時丙寅」

年纔六旬情感之深實牢古今吾文在石千載歎惜」

至正五年五月日書」

 

[국역]

한국김석전문』中世下篇(1984)의 판독문을 수정, 보완함.
비문의 원문을 해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안대군(定安大君) 묘지명 「題額」

삼중대광 정안부원대군(三重大匡 定安府院大君)이고 추증된 시호는 상혜공(尙惠公)이다.
추성양절좌리공신 삼중대광 김해부원군 영예문관 효사관사(推誠亮節佐理功臣 三重大匡 金海府院君 領藝文館 孝思觀事) 이제현(李齊賢) 지음.


죽헌(竹軒) 김정승(金政丞, 金倫)이 나에게 부탁하며 “작고한 정안부원대군은 우리 외삼촌의 아우[昆弟]로 우애가 매우 깊었는데 불행하게도 복(福)이 다하여, 이제 지정(至正) 5년(충목 1, 1345) 5월 병신일에 장례를 지내려고 합니다. 

 

그대의 글로 돌에 써서 무덤에 넣고자 하니, 그대는 반드시 사양하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 뜻에 감동되어 명(銘)을 짓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양천(陽川) 허씨(許氏)는 대대로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였으니, 

문경공(文敬公) 공(珙)은 벼슬이 총재(冢宰)에 이르고

양숙공(良肅公)을 낳으니 이름이 평(評)이었으나 숭(嵩)으로 고쳤다. 

납채(納采)를 보내 염씨(廉氏)를 맞이하니 두 집안이 모두 아름답다.


뛰어난 정안공(定安公)은 허씨(許氏)의 맏아들이자 염씨(廉氏)의 외손자로 지조가 굳고 영민하였으며 정성스럽고 부지런하였다. 선(善)을 쌓은 집안에 복이 있으니 그 뜻을 따라 이름을 지었으나, 보배롭고 으뜸 가니 그 때문에 고쳐서 종(琮)이라 하였다. 

 

제장공주(齊長公主)가 어려서 안아 기르고 자라서 어른이 되자 수춘옹주(壽春翁主)와 결혼하니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여 말하였다. “나는 그대의 장인이오. 그대는 헌사(憲司)의 우두머리가 되어 허물을 바로 잡고 잘못을 다스리시오.”

 

내려준 지팡이를 짚고 탄핵하니 쓸모 없는 관리들은 넋을 잃었고 부원군(府院君)에 대자(大字)를 더하니 패옥(佩玉)도 더욱 늘어났다. 중국으로 가서 어진 황제[仁皇]를 찾아 뵈니 행동거지가 법도에 맞고, 아울러 몽고(蒙古)말에도 능숙하였다.


황제가 마음으로 기뻐하여 6 상서(六尙書)를 제수하자 가득 참을 경계하여 삼가하며 겸손하게 스스로 물러났다.
35년을 넉넉하고 한가하게 지내면서 약을 나눠주며 백성을 돌보니 세상이 그 어짐에 감동하였다. 

 

돈을 내어 부처에게 바치니 한 해에도 거르는 달이 없었고 일마다 모두 갖추어졌으니, 한 점 한(恨)이나 아쉬움도 없으리라.  을유년(충목 1, 1345) 정월에 수춘옹주가 세상을 떠나자 슬픔이 지나쳐 병이 되고 27일이 지났는데 병인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겨우 60이다.


아쉽고 그리운 깊은 마음 고금에 드물 것이니 돌에 새겨진 나의 글도 천 년 동안 탄식하며 애석해 하리라.
지정 5년 5월 일 쓰다.

 

[참고문헌]

「高麗時代의 定安任氏·鐵原崔氏·孔巖許氏 家門 分析-高麗 貴族家門 硏究(二)-」, 朴龍雲, 『韓國史論叢』3, 1978.「定安大君墓誌銘」, 許興植, 『韓國中世社會史資料集』, 서울 亞細亞文化社. 1972 <심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