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자찬 묘지명을 쓰신 인물

야촌(1) 2011. 6. 14. 23:50

■자찬 묘지명을 쓰신 인물

 

더러 조선의 선비들은 자신의 묘비명을 자신이 직접 짓기도 했다. 자찬묘지명自讚墓地名이다. 더러 조선의 선비들은 자신의 죽음에 부쳐 시 한 수를 남겨놓기도 했다. 자만시自挽詩다. 실학의 거두 다산 정약용이 그랬고 대학자 미수 허목도 그랬다.

 

자찬묘지명이나 자만시는 유서와는 사뭇 다르다. 유서가 남에게 하는 말이라면 자찬묘지명이나 자만시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유서가 짐을 내려놓으며 남기는 말이라면 자찬묘지명이나 자만시는 칼날을 더 시퍼렇게 세우며 적는 말이다. 유서가 용서와 화해와 안식을 위한 글이라면 자찬묘지명이나 자만시는 절차와 탁마와 혁파를 위한 글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무엇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소재로 글을 지었던 걸까. 왜 자신의 죽음 마저도 객관화하고자 했던 것일까!?. 이유는 간명하다. 언제 어디서든 늘 스스로의 말과 행동, 삶 전체를 반성하며 살고자 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가 부끄럽다. 자찬묘지명이든 자만시든 짓고 살만한 지식인은 도통 눈에 띄지 않으니 말이다. 

잘날 것들은 많아도 참한 것들은 없는 세상이니 선비의 향기가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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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만시나 자찬묘지명은 자기칭찬이나 자기변명 자기연민의 글이 아니란다. 

자신을 깍아내리거나 남의 시선을 빌어 자신의 인생을 평가하고 남 이야기하듯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글들이지. 겸손이랄 수는 있겠지만 후회나 자학으로 볼 순 없단다.

 

건데 왜 그들은 이런 글을 썼을까 궁금하지 않니.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이 자신의 죽음 마저도 뛰어넘어 자신을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내공을 지닌 선비였다는 점이야. 세상의 시선이든 죽음이든 훗날의 평가든 상관없이 눈감는 날까지 난 나의 삶을 살겠다는 자기다짐의 표현은 혹 아닐런지.

 

더러 조선의 선비들은 자신의 묘비명을 자신이 직접 짓기도 했다. 자찬묘지명自讚墓地名이다. 더러 조선의 선비들은 자신의 죽음에 부쳐 시 한 수를 남겨놓기도 했다. 자만시自挽詩다. 실학의 거두 다산 정약용이 그랬고 대학자 미수 허목도 그랬다.

 

자찬묘지명이나 자만시는 유서와는 사뭇 다르다. 유서가 남에게 하는 말이라면 자찬묘지명이나 자만시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유서가 짐을 내려놓으며 남기는 말이라면 자찬묘지명이나 자만시는 칼날을 더 시퍼렇게 세우며 적는 말이다. 

유서가 용서와 화해와 안식을 위한 글이라면 자찬묘지명이나 자만시는 절차와 탁마와 혁파를 위한 글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무엇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소재로 글을 지었던 걸까. 왜 자신의 죽음 마저도 객관화하고자 했던 것일까. 이유는 간명하다. 언제 어디서든 늘 스스로의 말과 행동, 삶 전체를 반성하며 살고자 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가 부끄럽다. 자찬묘지명이든 자만시든 짓고 살만한 지식인은 도통 눈에 띄지 않으니 말이다. 

잘날 것들은 많아도 참한 것들은 없는 세상이니 선비의 향기가 간절하다....

 

‘다산문화의 거리’를 지나 우선 들른 곳이 기념관. 다산의 일생을 간략하게 정리해뒀는데 출구쪽에 걸린 자찬묘지명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단다. 자찬묘지명이란 자신의 묘비에 써넣을 문구를 스스로 짓는 것. 다산은 실천하는 삶을 말하고 있더구나.

 

“내가 너의 착함을 기록했음이/

여러 장이 되는구려/

 

너의 감추어진 사실을 기록했기에/

더 이상의 죄악은 없겠도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사서육경을 안다’라고 했으나/

그 행할 것을 생각해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너야 널리 널리 명예를 날리고 싶겠지만/찬양이야 할 게 없다/

몸소 행하여 증명시켜 주어야만/ 널리 퍼지고 이름이 나게 된다//

 

너의 분운함(떠들썩하여 복잡하고 어지러움) 을 거두어들이고/

너의 창광(분별없이 함부로 날뜀)을 거두어 들여서 /

 

힘써 밝게 하늘을 섬긴다면/

마침내 경사가 있으리라.”

 

스스로 비명을 지었던 게 다산만의 멋은 아니란다.

 자만시(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애도하는 시)나 자찬묘지명은 조선시대 학자나 문인들 사이에서 꽤나 유행했던가봐. 

조선 중종 때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던 눌재 박상(1474~1530)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덤덤하게 자신의 묘비명을 쓰고 있어.

 

“재주도 없고/

덕도 없는/

보통 사람에 불과하고/살아선 벼슬이 없고/

죽어서는 명예가 없는/보통 넋에 불과하다/

 

시름도 즐거움도 사라지고/헐뜯음도 칭송도 그친 지금/

그저 흙덩이에 불과하구나.” 초탈의 경지가 느껴지는 글이야./

 

이런 글도 있대. “한평생 시름 속에 살아오느라/

밝은 달은 봐도 봐도 부족했었지/

 

이제부턴 만년토록 마주볼테니/

무덤 가는 이 길도 나쁘진 않군.” 

 

인생이 고달팠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겠는데 그래도 이렇게 쓸 수 있으려면 인생을 달관하지 않고는 안될 듯 싶구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시인 가운데 한사람인 이양연이 쓴 ‘내가 죽어서(自挽)’라는 시란다.

 

조선 중기의 학자로 실학사상의 계승 발전에 이바지한 미수 허목(1595~1682)도 ‘허미수자명’이라는 글을 남겨두었다는구나. 미수는 그의 호.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말은 행동을 가리지 못했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했다. 

 

한갓 시끄럽게 성현의 말씀을 즐겨 읽었지만 허물을 고친 것은 하나도 없다. 돌에다 새겨 뒷사람을 경계한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못하는 삶이 부끄러운데 너희는 나를 거울로 삼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는 셈이야.

 

자만시나 자찬묘지명은 자기칭찬이나 자기변명 자기연민의 글이 아니란다. 자신을 깍아내리거나 남의 시선을 빌어 자신의 인생을 평가하고 남 이야기하듯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글들이지. 겸손이랄 수는 있겠지만 후회나 자학으로 볼 순 없단다.

 

건데 왜 그들은 이런 글을 썼을까 궁금하지 않니.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이 자신의 죽음 마저도 뛰어넘어 자신을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내공을 지닌 선비였다는 점이야. 세상의 시선이든 죽음이든 훗날의 평가든 상관없이 눈감는 날까지 난 나의 삶을 살겠다는 자기다짐의 표현은 혹 아닐런지....

 

<유배지에서 쓴 아빠의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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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규의 자찬 묘지명

 

요즘 '이대원장군 인물지' 집필을 하면서 묘지명을 많이 읽게 됩니다.

죽은 멋을 그리며 쓴 묘지명도 있고 후손의 요청에 따라 자료를 보고 쓴 묘지명도 있고, 당색과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여 쓴 것도 많습니다.

 

한참 뜻을 펼 38세에

정치적 파란을 겼었던 정약용은'자찬 묘지명'을 두 개나써 두었다고 합니다.

남들의 평가도 번거롭고, 이러 쿵 저러 쿵 하는 것도 싫어서 스스로 자신을 평가한 것이겠지요..

 

결기가 느껴지지만 자신의 삶이라고 해도 죽은 뒤의 평가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겠지요.

 

제가 자찬 묘지명을 쓴다면 무엇이라고 쓸까 생각을 했습니다.

철이 들면서 '나눔'을 화두로 살아왔는데, 다 퍼주고도 아직도 많이 남았네!

라고 쓸 수 잇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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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신문기사>스스로 쓴 묘지명

 

큰 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검토하다 보면 좀 특이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문집에서는 그 문집 주인공의 생애를 정리한 묘지명이 실려 있게 마련인데 다산의 경우에는 그 묘지명을 자기 자신이 써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라는 제목으로 싣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은 묘지명이란 뜻의 이 글은 남이 내 생애를 정리하고 평가하지 않고, 내 스스로 내 생애를 정리하고 자신을 평가한다는 특별한 행위를 담아내고 있다. 다산이 그렇게 자신이 썼다는 점을 밝힌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묘지명이란 본래 타인이 죽은 자를 위해 쓰는 글이기에 굳이 그 점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사람이 죽어 무덤에 묻을 때에는 묘지명을 학자와 문사에게 받아서 그 글을 사기에 새겨넣고 불에 구워서 시신과 함께 묻었다. 묘지명을 새겨넣은 지석(誌石)은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후세 사람들에게 입증하는 증거물인 셈이다. 그러나 이 지석은 그러한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평생 행적에 대한 준엄한 평가를 담게 된다.

 

묘지명은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고 역사를 위해서도 중요한 실용적인 문체로 그 의미가 깊다. 그런 묘지명을 남이 아닌 죽은 자 자신이 자기의 죽음을 예상하고 미리 써놓아 죽음을 대비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아 넘길 수 없는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 특히 후기에는 스스로 자기 묘지명을 쓰는 일이 적지않게 일어났다. 그 연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무엇보다 남들이 쓰는 묘지명이 죽은 자를 위한 맹목적 예찬의 글이 되어 거짓된 내용으로 꾸며지는 극단적 폐단까지 낳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름과 가계 등 내용의 일부만 바꾸면 어느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묘지명, 그러한 죽은 글, 생명력 없는 평가를 거부하려는 반발의식에서 아예 자기 자신이 묘지명을 쓰고자 하였다. 남들의 허황된 찬사나 듣지 않고 자기가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를 기록하려는 의식은 자의식이 강한 학자와 문사들에게서 아주 강하게 나타났다. 

 

기묘사화 때 강직한 면모를 보여주었던 음애(陰厓) 이자(1480~1533)가 쓴 자찬묘지명이 그 대표적인 사례. 또 사후에 묘지명을 남에게 부탁할 자식이 없는 경우에도 스스로 묘지명을 썼다. 남학명(南鶴鳴)이나 남공철(南公轍)이 그 사례다.

 

또 내가 역사에 무슨 큰일을 남겼다고 남에게 묘지명을 받겠는가 하는 겸손한 생각에 의하여 스스로 쓰기도 하고, 또 자기가 영위한 삶과 개성을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안다고 하여 자신이 쓰기도 한다. 조선후기 들어 이러한 일은 일부 학자와 문사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졌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중국 문단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 명대의 저명한 문인인 서위(徐渭)나 장대(張岱)의 '자위묘지명(自爲墓誌銘)'은 우리 문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평범하지 않게 살아온 예술가의 삶을 마음껏 표현해내었다. 

 

이렇게 스스로 묘지명을 쓴 인물들 가운데에는 유척기(兪拓基), 남유용(南有容), 서유구, 강세황(姜世晃), 박세당(朴世堂), 김택영(金澤榮)이 있다. 이러한 파격적인 글은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삶과 의식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안대회 / 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 경향신문 200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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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들이 스스로 쓴 묘비명>

 

'내면기행'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태어나 크게 어리석었고, 자라서는 병치레 많았다. 중간엔 배운 것이 얼마나 되었나, 

늘그막엔 왜 외람되이 작록을 받았나? 배움은 추구할수록 아득해지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얽어 들었다. (중략) 

 

시름 가운데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 시름 있도다. 승화하여 돌아가리니, 다시 무엇을 구하랴"

이황(1501~1570)은 죽기 전 4언 24구의 글을 지어 자신의 묘비에 쓰도록 했다. 

 

스스로 묘비명을 쓴 것은 자신에 대한 엄정한 평가를 한 것으로, 제자나 다른 사람이 쓸 땐 실상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장황하게 쓸까 봐 염려했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죽음에 대처하면서 삶의 의미를 생각했다. 인생의 어느 순간 죽음을 의식하고 이제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쓴 묘비명은 인간의 내면을 가장 진실하게 드러낸다.

 

고려시대 김훤부터 일제강점기 이건승까지 역사 속 인물 57명의 묘비명과 그들의 삶을 살핀 '내면기행'(이가서 펴냄)은 당시 상황을 바탕으로 그들이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총체적인 관점에서 풀어내 흥미를 끈다.

 

저자인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는 살아있을 때 자신의 무덤에 묻거나 무덤 앞에 세울 비명(碑銘)을 미리 작성한 자찬 묘비명 자료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그 속에 담긴 정신세계를 깊이 있게 분석했다.

 

조선 전기의 시인 남효온(1454~1492)은 자기의 주검을 상상하면서 삶을 반추한 시를 남겼다.

"개미들은 내 입에 들어오고, 파리 모기는 내 살을 물어뜯으며 (중략) 다만 한스럽기는 세상 살았을 적, 끔찍하게 여섯 액운이 모였던 일. 용모가 추해서 여색을 가까이 못 한 것, 집이 가난해 술 충분히 못 마신 것"

 

정약용(1762~1836)은 죽기 14년 전 스스로 묘지(墓誌)를 지었는데 이 묘지명에서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자부하면서 정치인생을 방해했던 서영보에 대한 원망을 직접 드러냈다. 또 자기반성을 담으면서 남은 생애 동안 천명에 순응하겠다고 밝혔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울분을 느껴 경상도 영천에서 숨어 산 조상치는 자신의 묘비명에 "노산조 부제학 포인(逋人) 조상치 묘"라고 썼다. 단종 때 부제학을 지냈던 조상치는 수양대군이 등극하자 벼슬에서 은퇴하겠다고 청해 물러났으며 포인, 즉 도피한 사람이라 자처하며 부조리한 현실과 단절하려 했던 것이다.

 

"봉성 사람 금각은 자가 언공이다. 일곱살에 공부를 하기 시작해서 열여덟에 죽었다. 뜻은 원대하지만 명이 짧으니 운명이로다" 폐결핵으로 18세에 죽은 금각(1569~1586)이 죽어가며 남긴 글로 짧았던 삶만큼 너무 짧아 진한 여운을 남긴다.

 

농법서와 백과사전을 아우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편찬자로 잘 알려진 서유구(1764~1845)는 자신의 인생에서 낭비한 것이 다섯 가지나 되고 남은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며 자괴감을 나타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죽음에 대한 사색은 곧 삶에 대한 사색이자 내 안의 숭고함을 되찾는 일"이라면서 "옛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빛을 찾아내 죽음으로부터 살아 돌아왔다. 슬픔이 저며오는 때도 있었지만 끝내 음울함 속에서 죽어가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자기의 죽음을 예상하면서 쓴 묘비명과 만시 속에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것들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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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들이 스스로 쓴 묘비명>

 

'내면기행'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태어나 크게 어리석었고, 자라서는 병치레 많았다. 중간엔 배운 것이 얼마나 되었나, 늘그막엔 왜 외람되이 작록을 받았나? 배움은 추구할수록 아득해지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얽어 들었다. (중략) 시름 가운데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 시름 있도다. 승화하여 돌아가리니, 다시 무엇을 구하랴"

 

이황(1501~1570)은 죽기 전 4언 24구의 글을 지어 자신의 묘비에 쓰도록 했다. 스스로 묘비명을 쓴 것은 자신에 대한 엄정한 평가를 한 것으로, 제자나 다른 사람이 쓸 땐 실상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장황하게 쓸까 봐 염려했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죽음에 대처하면서 삶의 의미를 생각했다. 

인생의 어느 순간 죽음을 의식하고 이제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쓴 묘비명은 인간의 내면을 가장 진실하게 드러낸다.

 

고려시대 김훤부터 일제강점기 이건승까지 역사 속 인물 57명의 묘비명과 그들의 삶을 살핀 '내면기행'(이가서 펴냄)은 당시 상황을 바탕으로 그들이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총체적인 관점에서 풀어내 흥미를 끈다.

 

저자인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는 살아있을 때 자신의 무덤에 묻거나 무덤 앞에 세울 비명(碑銘)을 미리 작성한 자찬 묘비명 자료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그 속에 담긴 정신세계를 깊이 있게 분석했다.

 

조선 전기의 시인 남효온(1454~1492)은 자기의 주검을 상상하면서 삶을 반추한 시를 남겼다.

"개미들은 내 입에 들어오고, 파리 모기는 내 살을 물어뜯으며 (중략) 다만 한스럽기는 세상 살았을 적, 끔찍하게 여섯 액운이 모였던 일. 용모가 추해서 여색을 가까이 못 한 것, 집이 가난해 술 충분히 못 마신 것"

 

정약용(1762~1836)은 죽기 14년 전 스스로 묘지(墓誌)를 지었는데 이 묘지명에서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자부하면서 정치인생을 방해했던 서영보에 대한 원망을 직접 드러냈다. 또 자기반성을 담으면서 남은 생애 동안 천명에 순응하겠다고 밝혔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울분을 느껴 경상도 영천에서 숨어 산 조상치는 자신의 묘비명에 "노산조 부제학 포인(逋人) 조상치 묘"라고 썼다. 단종 때 부제학을 지냈던 조상치는 수양대군이 등극하자 벼슬에서 은퇴하겠다고 청해 물러났으며 포인, 즉 도피한 사람이라 자처하며 부조리한 현실과 단절하려 했던 것이다.

 

"봉성 사람 금각은 자가 언공이다. 일곱살에 공부를 하기 시작해서 열여덟에 죽었다. 뜻은 원대하지만 명이 짧으니 운명이로다" 폐결핵으로 18세에 죽은 금각(1569~1586)이 죽어가며 남긴 글로 짧았던 삶만큼 너무 짧아 진한 여운을 남긴다.

 

농법서와 백과사전을 아우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편찬자로 잘 알려진 서유구(1764~1845)는 자신의 인생에서 낭비한 것이 다섯 가지나 되고 남은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며 자괴감을 나타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죽음에 대한 사색은 곧 삶에 대한 사색이자 내 안의 숭고함을 되찾는 일"이라면서 "옛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빛을 찾아내 죽음으로부터 살아 돌아왔다. 슬픔이 저며오는 때도 있었지만 끝내 음울함 속에서 죽어가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자기의 죽음을 예상하면서 쓴 묘비명과 만시 속에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것들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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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자찬 묘지문 또는 묘갈문을 쓰신분들을 살펴보면,

 

1.퇴계 이황의 자찬 묘지명.

 

  생애 마지막으로 세상에 건네는 편지 하나가 있다. 스스로 쓴 자신의 묘지명, '자찬묘지명'이다. 묘지명은 한 사람의 평생의 행적을 기록한 글이다. 개인에게나 역사적으로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 글이다. 이 묘지명을 다른 문인이 아닌, 자신 스스로 쓰는 일이 많았다.

 

  조선의 대 유학자이자 사상가였던 퇴계 이황은 어느 날 조카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정에서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려 하면 사양하거라. 비석도 세우지 말아라. (중략) 내가 미리 써놓은 묘지명을 쓰도록 해라."당대 대 유학자의 묘비명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지난 삶을 감사하며 마지막을 맞이하는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죽음에 관한 글이자 삶에 대한 사유가 담긴 글, 자찬묘지명. 남겨진 세상을 전하는 바래지 않는 마지막 편지를 담아본다.

 

2,서계 박세당의 자찬묘지명,

3.미수 허목의 자명비,

  조선 중기의 학자로 실학사상의 계승 발전에 이바지한 미수 허목(1595~1682)도 ‘허미수자명’이라는 글을 남겨두었다는구나. 미수는 그의 호.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말은 행동을 가리지 못했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했다. 

 

  한갓 시끄럽게 성현의 말씀을 즐겨 읽었지만 허물을 고친 것은 하나도 없다. 돌에다 새겨 뒷사람을 경계한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못하는 삶이 부끄러운데 너희는 나를 거울로 삼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는 셈이야.

 

4.남명 조식 자찬묘지명,

5.박암 강세황 자찬묘지명,

6.다산 정약용 자찬묘지명,

  자찬묘지명은 다산 자신이 직접 쓴 묘지명으로, 다산선생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정리된 글입니다. 다산선생의 묘지명

  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문집에 넣기 위한 <집중본>이고, 다른 하나는 무덤 속에 넣기 위한 <광중본>입니다.

 

7.취운 이원우 자찬묘지문,

8.음애 이자 자찬묘지명,

9.사영 남공철 자찬 묘지명,

10.회은 남학명 자찬묘지명,

11.지수재 유척기 자찬묘지명,

12,풍석 서유구 자찬묘지명,

13.김태영 등입니다.

14.남종현 자찬묘지명

15.귤산 이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