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선(東文選) 제118권 / 비명
왕사 대조계종사 일공정령 뇌음변해 홍진광제 도대선사 각엄존자 증 시 각진국사 비명[병서]
王師、大曹溪宗師 一邛正令 雷音辯海 弘眞廣濟 都大禪師 覺儼尊者 贈 諡 覺眞國師 碑銘[幷序]
이달충(李達衷) 찬(撰)
지원 14년 을미년에, 왕사(王師) 각엄존자(覺儼尊者)가 적멸하였다. 5년이 지난 뒤에 그의 무리 원규(元珪) 등이 임금께 아뢰기를, “우리 스승님의 행실이 묻히어 없어지게 버려둘 수 없으니, 원하옵건대, 비석을 세워 기록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임금이 신에게 명령하여 비문을 지으라고 하였다. 신이 이미 명령을 받고 가만히 생각하니, 옛날에 달관한 사람들은 몸 담은 세상을 여관으로 생각하고, 명예와 지위를 헌 신짝 같이 본다고 하였다.
더구나 부도씨(浮屠氏)는 유위(有爲)를 꿈처럼 덧없이 여기고 무상(無相)을 굳게 지켜 청정하고 적멸하여 이루 이름지어 말할 수 없다. 비록 더할 수 없이 칭송한들 사(師)에게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무리가 통절하게 사모하는 것은 사의 교화가 반드시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며, 우리 임금께서 믿고 숭앙한 것은 사의 도가 반드시 다스리는 데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니, 서술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 우리 태조(太祖)께서 일찍이 국가를 창건하매, 모든 왕화(王化)를 도와 밝히고, 민생을 보우할 만한 것은 하지 않음이 없었다. 불법은 그 교화가 어질어서 우리나라의 정교(政敎)에 보탬이 된다고 하여, 드디어 널리 불사를 세우고 그의 무리들을 머물러 살게 하였다.
선종과 교종이 각각 그들의 법으로써 나라를 복되게 하나 선종은 교종에 비하여 더욱 왕성하였다. 도량을 주재하는 자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면 감히 그 자리에 있지 못하는 것이니, 그를 존숭하기 때문이라는 뜻이 이미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뒷날 혹은 게을러질까 염려하여 신서(信誓) 10조를 만들어서 조서로 반포하였다. 그 첫째 조목에 이르기를, “삼보(三寶)를 존경하고 신앙하라.” 하였다.
이로부터 그 뒤로는 반드시 그들의 무리 중에서 덕이 높은 자를 기용하여 예로써 섬기어 임금의 스승으로 삼게 되었다. 대대로 이루어 놓은 규례가 있어서 예의 형식이 점점 갖추어졌다.
위대한 우리의 주상께서는 정신을 가다듬고 잘 다스리기를 기도하여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하게 하였다. 베풀어 하는 모든 일은 거의 다 옛 법을 좇으며, 재상들에게 자문하고 여러 종문(宗門)을 방문하고 이르기를, “보잘 것 없는 어린 내가 왕위를 이었는데, 하필이면 어려운 때를 만났으니, 임금으로서 위에 임할 자격이 없을까 두려워한다.
장차 승려 중에서 덕이 높은 자를 높여 스승으로 모시어 나의 다스림을 보필하게 하고 조상의 교훈을 빛나게 하고자 하는데 누가 좋은가.” 하였다. 여럿이 아뢰기를, “각엄존자(覺儼尊者)만한 이가 없습니다.
전대(前代)에서 그를 존숭하여 호를 주어 그의 덕을 칭찬하였습니다.” 하니, 곧 주무관(主務官)에게 명령하여 드디어 왕사(王師)로 책봉하였다. 그때 사(師)는 불갑사(佛岬寺)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이가 많고 길이 험난하여 감히 불러오지 못하고, 사(師)의 초상을 그려 놓고 보는 예를 거행하였으며, 익재(益齋) 이시중(李侍中)으로 하여금 찬(讚)을 짓게 하고 크게 예물과 예의를 갖추어 사가 머무는 곳에 가게 하였다. 스승으로 섬기는 예를 표시함에 정성과 존경이 돈독하고 지극하였다.
사가 국서(國書)를 받고 말하기를, “노승이 일찍이 전왕(前王)의 그르치신 은총을 입어 외람하게 왕사의 지위에 있었는데, 이제 또 중한 명령을 욕되게 하였으니, 깊이 두렵고 부끄러워하는 바 있습니다.
향화(香火)의 받 뜸을 부지런히 하여 임금께 복을 받들어 올림이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실로 금상께서 즉위하신 제 2년인 임진년의 일이었다.
사(師)의 휘는 복구(復丘)이니, 스스로 호를 무언수(無言叟)라고 하였다. 고성군(固城郡) 사람이니, 판밀직 우상시 문한학사 승지(判密直右常侍文翰學士承旨) 이공(李公) 휘 존비(尊庇)의 아들이다.
사의 족계(族系)는 안팎으로 세상에 혁혁하게 드러났으므로 여기에서는 그의 계보를 생략한다. 사는 위대한 고승이다. 모부인(母夫人)이 항상 대승불경(大乘佛經)을 가지고 외우고 있었는데, 일찍이 꿈에 한 거사가 의관을 성대하게 차리고 앞에 와서 말하기를, “내가 이미 왔습니다.” 하였다.
이어 임신하여 지원(至元) 경오년 9월 15일에 낳았는데, 자질이 밝고 맑아서 진세(塵世)의 보통 아이들과는 같지 않았다. 조금 자라서 불법을 존경할 줄 알았으며, 장난하고 놀 때의 장난거리도 반드시 도량의 규칙을 본뜨는 것이었다.
나이 겨우 10세 때에 조계종의 원오국사(圓悟國師)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수구(受具 구족계를 받음)하였다. 얼마 안 되어 원오국사가 입적하매, 그의 유촉(遺囑)으로 대선사(大禪師) 도영(道英)에게 추종하여 쉬지 않고 부지런하게 배웠다.
10년 만에 배움이 이루어지니 총림(叢林)에서 여러 사람의 우두머리로 추앙되었다. 경인년 가을에 선선(禪選)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하니, 그 때 나이가 21세였다.
보는 바가 이미 초연하여서 도에만 뜻을 두고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였다. 구름처럼 노닐면서 도를 찾고 흙덩이처럼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는 심(心)을 관조하였다. 산과 물의 경치 좋은 곳에 슬슬 노닐고, 구름과 수풀 사이를 유유자적하면서, 공명을 위한 길은 밟지 않기를 맹세하였다.
자각국사는 사의 제2의 스승이었다. 사를 대우하기를 지극히 예로써 하였다. 일찍이 자기의 학도들을 사에게 맡기니, 사가 말하기를, “자기에게 얻은 바가 있은 뒤라야 남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인데, 나는 진실로 감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백암사(白巖寺)에 가서 동지 몇 명과 더불어 밤낮으로 참구(叅究 참선하여 진리(眞理)를 연구함)하기를 또 10여 년이나 하였다.
월남 송광대도량(月南松廣大道揚)에 머무른 것이 전후 모두 40여 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나라를 복되게 하고 민생을 이롭게 한 일과, 포상과 존숭하고 하사(下賜)의 은총을 받은 것은 갑자기 다 헤일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또 사의 찌꺼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쓰지 않는다.
만년에 불갑사에 머물게 된 것은 임금의 명령에 좇은 것이다. 그의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이 산에서 자고 간 일이 있었는데, 꿈에 어떤 사람이 와서 절하고 말하기를, ‘사께서는 마땅히 이곳에 머무르실 것입니다’ 하기에, 나는 마음으로만 이상하게 여겼더니, 이제 그 꿈이 증험이 있다.” 하고, 송(頌)을 지어 말하기를,
임금이 오성 불갑사를 주시니 / 君賜筽城佛岬山
사람들은 나더러 게을러진 새 돌아올 줄 안다고 하네 / 人言倦鳥已知還
공손히 간절하게 하늘 같은 수를 비노니 / 殷勤薦祝如天壽
이로부터 나라 기초 길이 편안하리라 / 從此邦基萬古安
하였다.
그가 임금과 나라를 위하는 일에 힘쓰던 마음을 또한 볼 수 있다.
을미년에 백암사(白巖寺)로 옮겨서 우거하였다. 6월에 병들었다가 7월 27일에 병이 조금 덜하니, 국왕과 재부(宰府)에 하직하는 봉함의 편지를 써서 읍관(邑官)에게 청탁하여 인신(印信)을 찍어 봉하게 하였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깎고 목욕하고 법복을 갖춰 입은 뒤에 모시는 자에게 명하여 북을 치게 하고, 작은 선상(禪床)에 앉아서 말하기를,
곧 심이고 곧 불인 강서의 늙은이여 / 卽心卽佛江西老
불도 아니고 심도 아닌 물외의 옹이로다 / 非佛非心物外翁
날다람쥐의 소리 속에 나 홀로 가노니 / 鼯鼠聲中吾獨往
열반에는 죽고 사는 것이 본래부터 공이로구나 / 涅槃生死本來空
하고, 의젓이 화(化)하니, 자색 구름은 골짜기에 가득하고, 얼굴빛은 분바른 것 같았다.
이튿날 문인들이 울며 절의 서쪽 산봉우리 아래에서 화장하고, 유골은 함에 담아서 불갑사로 모셔 왔다. 12월에 임금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조위하고, 시호를 각진국사(覺眞國師)라고 하였으며, 탑(塔)은 자운(慈雲)이라고 명명하였다.
국사의 춘수는 86세이고, 승려의 경력은 76세였다. 사람됨이 간묵(簡黙)하고 맑고 순박하며 단아하고 평화스러우며 곧고 정성스러웠다. 이마는 푸르고 눈썹은 반만 희고 입술은 붉고 이는 희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깨끗하기가 신선과 같고, 가까이 나아가면 온화하기가 부모와 같았다. 입으로는 남의 선악을 말하지 아니하고, 마음으로는 공경함을 지니고 있었다.
평생을 방장(方丈 주지)으로 지냈으나 한 개의 제물도 갖지 아니하였다. 그가 조술(祖述)하는 종파는 보조(普照)로부터 국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13대이며, 그의 문인으로서 뛰어난 자는 선원(禪源)ㆍ백화(白華)ㆍ가지(迦智)ㆍ마곡(麻谷) 이하 1천여 명이 된다. 내질(內姪)인 행촌(杏村) 시중(侍中)은 지금의 명재상(名宰相)으로서 우리들의 모범이 되어 있다.
행촌의 아우 이부 상서(吏部尙書)는 나의 동갑인 친구로서 내가 또 한 번 주실(籌室)에 참여하였더니, 그 뒤로 여러 번 편지를 받게 되어 아주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국사의 비명을 글의 낮고 졸렬한 것을 돌아보지 않고 다행으로 생각하여 글을 쓴다. 그 명(銘)에 이르기를,
높아도 위태하지 않음은 / 高而不危
우리 국사의 스스로 하심이고 / 吾師之爲
몸을 낮추어 스스로 기르심은 / 卑以自牧
우리 임금의 복이로다 / 吾王之福
큰 길이 갈림길로 나뉘었으나 / 大道歧分
한 근원에 뿌리하였더라 / 本乎一原
서로 도와서 제도하여 / 相須以濟
복지를 세상에 키우시니 / 介祉于世
몇천 년 몇만 년 / 於萬斯年
뒤에도 빛이 나고 앞에도 광채나네 / 耀後光前
비석에 새기는 사연이야 / 刻辭于石
찌꺼기며 막치일 뿐이나 / 伊糟伊粕
유구하고 아득한 먼 날까지 / 悠悠茫茫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로다 / 庶乎不忘
하였다.
출전 > ⓒ 한국고전번역원 | 남만성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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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高麗王師、大曹溪宗師一邛正令雷音辯海弘眞廣濟都大禪師、覺儼尊者贈諡覺眞國師碑銘[幷序] 李達衷 撰 維至元十四年乙未。王師覺儼尊者示滅。間五年。其徒元珪等。聞于上曰。吾師之行實。不可使堙晦。願碑而識之。於是上命臣爲文。臣旣受命。竊謂之曰。古之達者。以身世爲蘧廬。視名位如弊屣。况所謂浮屠氏。夢幻有爲。住持無相。淸浄寂滅而不可名言。雖極稱頌。於師乎何有。然其徒之所以痛慕者。師之化必有以感于心。吾王之所以信崇者。師之道必有以補于理。可不敍乎。昔我太祖。肇造邦家。凡可以贊毗王化。保佑民生者。靡所不爲。謂佛氏其化仁於吾東方。政敎爲允迪。遂廣置仁祠。以居其徒。粤禪若敎。各以其法福于國。禪視敎爲尤盛。主道塲者非其人。不敢處焉。其所以尊崇之意。旣已炤然。尙慮後之或怠。爲信誓十條而詔之。其一曰敬信三寶。自是厥後。必擧其徒之德尊者。禮事而爲之師。代有成規。禮儀浸備。洪惟我主上。勵精圖理。宵旰憂勤。凡所施爲。率繇舊章。咨于相府。訪諸宗門。若曰眇冲嗣位。適値時艱。恐無以臨涖。將以僧中碩德者。尊拜爲師。以輔予理。用光祖訓。疇歟。僉曰無如覺儼尊者。前代尊崇。號稱其德。迺命有司。遂冊爲王師。時住佛岬寺。以年高道阻。未敢屈致。畫像瞻禮。俾益齋李侍中爲讚。大備物儀使還師所。以申師事之禮。誠敬篤至。師奉國書乃曰。老僧甞荷前代誤恩。濫居師位。今又辱重命。深有兢慚。第以香火之勒。庶幾奉福耳。實上卽位之二年壬辰也。師諱復丘。自號無言叟。固城郡人也。判密直右常侍。文翰學士。承旨李公。諱尊庇之子。師之族系。內外赫世。今略其譜。大浮圖也。母夫人常持頌大乘佛經。嘗夢一居士盛冠服而前曰。我已來矣。因而有娠。洎至元庚午九月十五日而生。資質明朗。不類塵凡。稍長知敬佛乘。嬉游之具。必模㨾道塲規矩。年甫十歲。就曹溪圓悟國師。剃落受具。未幾圓悟順寂。以遺囑從大禪師道英。孜孜請益。十年而學通。叢林推爲衆首。庚寅秋。中禪選上上科。時年二十一。所見已超然。志道厭煩。雲游訪道。塊處觀心。徜徉乎泉石。搖裔乎雲林。誓不蹋名途。慈覺國師。師之二師也。待之甚禮。甞以學徒委諸師。師曰有得於己然後傳諸人。吾固不敢。遂往白巖寺。與同志如干人。蚤夜參究十又餘年。住月南松廣大道塲。前後四十餘年。其間福國利生之事與夫褒崇錫賜之寵。蓋不可遽數。而又師之糟粕也。故不書。晚住佛岬寺。王命也。謂其徒曰。往宿此山。夢有人拜且曰。師宜住此。心竊異之。今而驗矣。乃作頌曰。君賜筽城佛岬山。人言倦鳥已知還。殷勤薦祝如天壽。從此邦基萬古安。其惓惓於君國之意。亦可見矣。乙未移寓白岩寺。夏六月示疾。七月二十七日疾小閒。緘書辭于國王宰府。請邑官封印信。更衣剃沐具法服。命侍者擊鼓。坐小禪床。乃云卽心卽佛江西老。非佛非心。物外翁。鼯鼠聲中吾獨往。涅槃生死本來空。儼然而化。紫雲滿洞。顔如傅粉。翌日門人號奉茶毗于寺之西峯下。函還佛岬寺。冬十二月。上遣使弔慰。謚曰覺眞國師。塔曰慈雲。春秋八十六。夏七十六。爲人簡默淸淳。端平直諒。綠頂尨眉。丹唇皓齒。望之洒然如神仙。就之溫然如父母。口不臧否。心存敬恭。平生方丈。不留一物。其祖派。則繇普照至師。凡十三世。門人之秀者。禪源,白華,迦智,麻谷。而下等千有餘人。內姪杏村侍中。爲今之名宰相。吾輩所矜式。杏村之弟吏部尙書。於吾爲同年友。予又一參籌室。厥後屢奉辱書。深以爲幸。故於師之銘。不揆鄙拙。幸而爲之辭。其銘曰。 高而不危。吾師之爲。卑以自牧。吾王之福。大道歧分。本乎一原。相須以濟。介祉于世。於萬斯年。耀後光前。刻辭于石。伊糟伊粕。悠悠茫茫。庶乎不忘。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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