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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議政 荷屋 金左根 墓表。

야촌(1) 2011. 6. 14. 17:15

영의정 충익공 하옥 김공 좌근 묘표

    (領議政 忠翼公 荷屋 金公 左根 墓表)

 

[생몰년] 1797년(정조 21)~1869년(고종 6)

[지은이] 영의정 심암 조두순 찬((領議政心菴趙斗淳撰)

[글씨]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오호라! 공의 묘도가 이뤄지고 신도도 차차 정리가 되었으니 그 행적을 기술하여 돌에 새겨 지석은 묻고 비갈은 세우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헤아리지 못할 바는 나처럼 위태위태하게 사경을 헤매는 사람이 지금 이 글을 쓰게 된 일이다.

 

공의 휘는 좌근이고, 자는 경은이다. 김씨가 안동을 본관으로 한 지는 오래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 상헌은 좌의정을 지냈고, 명나라 편에 서서 대의를 천하에 드러냈으니 시호는 문정이며 학자들이 청음 또는 석실대로라 칭하였다. 휘 수항의 시호는 문충이요, 휘 창집의 시호는 충헌인데, 모두 멸정지화를 당하였으니 고금에 없었던 일이다.

 

증조의 휘는 달행으로 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충정공의 아우이다. 조부의 휘는 이중으로 부사를 지냈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조순으로 순원성모의 아버지인데, 순조가 등극하니 예에 따라 영안부원군에 봉해졌고 영돈령부사를 지냈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충문은 그의 시호이다.

 

어머니 청양부부인 심씨는 정랑을 지내고 찬성에 증직된 심건지의 따님이다. 공은 정조 정사년(1797년) 12월 4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농담이나 우스개짓을 좋아하지 않고 장중하고 덕기가 있었다. 

 

충문공이 일찍이 공이 뜰 앞을 지나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좌객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자식들 중에 우리 집을 키울 사람은 틀림없이 이 아이일 것이오.”라 하였다.

 

기묘년(181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부사정에서 시직부솔로 전직되었으며 6품에 올라 제사의 낭관을 두루 거치고 금화현감으로 나갔다가 얼마 뒤에는 고양군으로 옮겼다. 무자년(1828년)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복을 벗고는 익위사에서 연안 부사로 나갔다. 임진년(1832년)에 충문공이 졸하였다. 갑오년(1834년)에는 상방과 주원의 첨정을 연해 지냈다.

 

무술년(1838년)에 함흥 판관에서 인일의 성균관 제술에 응시하여 장원하니 전시에 응시하라는 명이 내렸다. 합격자를 부르는 날에 부교리에 특별히 제수되어 이후 차례대로 승진하여 응교까지 이르렀는데, 그동안 삼사의 제직을 지낸 것은 여기에 기록치 않겠다.

 

내각에 들어가 직각이 되고 기해년(1839년)에 동부승지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이어서 대사성 이조참의를 지냈으며 이듬해에는 예조참판에 특제되고 중간에 도승지도 지냈다. 

 

신축년(1841년)에는 참판에서 공조판서에 특승하여 병조판서로 옮겼고 임인년(1842년)에는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계묘년(1843년)에 다시 병조를 맡았는데 전후하여 다섯 번이나 병조를 맡았다.

 

정미년(1847년)에는 수원유수가 되었고 기유년(1849년)에 좌참찬으로 들어와 비변사의 유수당상, 예문관 제학, 내각 제학, 선혜청 당상, 강관, 지실록사에 차출되었고 총융사에 제수되어 금위대장과 훈련대장에 옮겼으며 임자년(1852년)에는 호조판서로 옮겼으니 참판이 된 이후로 제사의 제조를 지낸 것은 전의감, 혜민원, 내의원, 상의원, 승문원, 사재감, 사도시, 종부시, 종묘, 내자시등이요, 정헌에서 보국숭록까지 이른 것은 돈공과 서사의 공로 때문이었다.

 

우의정에 제수된 뒤 계축년(1853년)에 영의정에 오르니 이때부터 갑자년(1864년)까지 정부에 들어간 것이 모두 네 번이나 되었다. 을축년(1865년)에는 영돈령부사로 있었고 병인년(1866년)에는 기로사에 들어가 안석과 지팡이, 선온을 하사받았다. 아울러 1등악을 내리고 영삼군부사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867년)에 졸하니 춘추는 73세이다. 임금께서 부음을 듣고는 매우 슬퍼하여 죽은 신하에 대한 예를 다하였고 상례와 제례를 도운 바는 참으로 두터웠다. 또한 바로 그날로 충익이라 시호를 내렸다.

 

오호라! 이것이 공의 50년 동안의 관직 경력과 일생의 대략이다. 종묘, 사직, 남전, 경모궁, 약원, 음위영, 어영청, 사역원의 도제거는 정승으로 있으면서 전후하여 겸직하였었다. 6월 갑진일에 지사의 말에 따라 이천 백면 금곡리의 부인묘 좌측에 잠시 묻었다가, 8월 경술일에 합부하니 간좌원이다.

 

배위 정경부인 해평 윤씨는 이조참판으로 증직된 윤치승의 따님인데 아들이 없었다. 병기로 뒤를 이으니 벼슬은 전 좌찬성이요 충헌공의 사손으로, 현 보국인 영근의 둘째 아들이다.

 

병기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공은 온화하면서도 엄하고 곧으면서도 융통성이 있었는데 백성들이 인애하고 사물을 아꼈던 것은 천성이 그러하였던 것이어서 백씨 문정공이 사랑하고 공경하며 중히 여겼다.

 

여러 자매들과는 적은 것이라도 나누어 갖고 조금만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나누어 먹었으며 그 밖에도 여유가 있으면 무엇이든 나누어 주었다. 하인들이나 노비들에게도 저주스런 말을 한 일이 없으며 길이 열려 지위와 권위가 날로 높아갔으나 물러나려 하였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추연한 빛을 띠웠다.

 

오호라! 기유년(1849년) 현종께서 승하하셨을 때 우리 성모께서 국세의 기울음을 막고 어려움을 헤쳐나가면서 태산처럼 사방을 진압하고 인을 베풀었으니 요순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서로 더불어 모의 협찬하여 조정이 편안하고 백성이 안돈한 것은 공말고 또 누구의 힘이었던가?

 

그러나 공 자신은 주야로 편할 때가 없었으니 손님이 다 떠나고 난후에 문서를 정리하였고 이것이 끝난 연후에야 비로소 발을 걷고 청소를 하니 그때에야 집안이 조용하여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이 되었다.

 

세부를 맡아서는 계수를 신중히 다루었고 갑병을 맡아서는 조련을 엄히 하였는데, 이런 일은 공에게는 여사에 불과하였다. 조정에서 신홀을 갖추고 들고 나는 것을 고할 때에는 정성스럽기가 상제를 대하듯 하였으니,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하고 덕화를 넓히고 자방을 부지런히 하는 것들도 모두 지성에서 나온 일들이다.

 

유학을 숭상하고 절조를 장려하고 어진 이를 등용하고 능한 이를 추천한 것들은 모두 훌륭한 사람을 맞아 함께 행하고자 함이었다. 수령들을 만나본 것은 능력있는 이를 알아보려 함이요, 바닷가의 세금을 감면해 준 것은 노약자를 돌보아 주려함이었다. 

 

아전들이 백성들에게 그릇되게 징세한 것이나 궁장, 요호들이 이름을 없애고 요역을 회피한 것들은 모두 장부를 깔끔하게 정리하여 원천을 막았다. 문순 권공과 문경 정공이 사판의 체천을 버리고 묘제로 돌림을 불허한 것이나 부령 9의사의 유사에 선액한 것이나 지평 이공 봉상의 초증 사시나 제주 계성사의 창설 등은 모두 유학을 창도하고 명절을 장려하며 세교를 길이 유지하려는 뜻이었다.

 

인재를 아껴 말만 들으면 바로 천거하였고 수령들의 정사를 중히 여겨 관례에 따라 연한을 늘려 주었으며, 기무가 정체되면 장주 사송을 가리지 않고 경계하였고, 귀양가서 돌아오지 못할 사람은 가족을 데리고 가는 것을 금하지 않은 것은 모두 실심으로 실사를 행한 것들이다.

 

지금 임금께서 입승 대통할 때 공은 영상으로 있었는데 친히 사저에 가서 맞아들였으니, 임금이 공을 돈독히 대함이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공은 겸손하고 그 영예를 차지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오호라! 경전에 이르지 아니하였는가? “선인은 나라의 기강이다.” 자기를 위함은 순리에 맞고 상서롭게 하며 남을 위해서는 인애와 공평을 다함이 선의 근본인 것이다. 

 

공이 졸한 날부터 온 세상이 모두 “좋은 사람이 죽었다.”하였으니, 이 어찌 자신이 가진 바로 남의 호평을 받음이 아니겠는가? 평생에 희롱하거나 거만하거나 재치가 넘치는 짓은 하지 않았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은 것을 여름날 뙤약볕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힘들게 여겼으니, 어찌 경전의 이른바 “자신을 속이지 말라.”가 아니겠는가?

 

공은 하옥이라 자호하였으며 평생에 역사서 읽기를 좋아하였다. 시는 맑고 그윽하고 담담하였는데, 비근한데서 재료를 취하였어도 뜻은 높아 시의 전문가들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오호라! 나는 공과는 형제와 같으나 성만 다를 뿐이다. 다만 눈물을 섞어 먹을 갈아 사양하지 않고 이처럼 글을 쓰니, 후인들은 나의 망녕됨을 용서하고 나의 뜻을 슬프게 여겨 주기를 바란다. 아아, 슬프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치사 봉조하 양주 조두순 지음.

삼종질 보국 숭록대부 행 판중추부사 겸 호조판서 판삼군부사 병국 삼가 씀.

 

숭정기원후 다섯 번째 기사년(1869년) 8월 일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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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有明朝鮮國 領議政 贈諡 忠翼公 荷屋 金公 左根 墓表

配貞敬夫人海平尹氏祔左」

 

嗚呼。公隧道之成。而神之道且寢成矣。述其行上諸石。賁幽而示于顯。宜也。而所不料者。以余廩廩視廕焉。而效玆役於今也。公諱左根。字景隱。金氏。籍安東也久矣。入本朝有若諱尙憲官左相。袒明聲大義天下。諡文正。學者稱淸陰先生。又曰。石室大老。有若諱壽恒。諡文忠。有若諱昌集。諡忠獻。俱上相。有諱濟謙。諡忠愍。有諱省行。諡忠正。傡四世而遘蔑貞之禍。古未有也。公曾祖諱達行。贈贊成忠正弟也。祖諱履中。府使贈上相。考諱祖淳。寔誕我純元聖母。及御坤極也。例授永安府院君領敦寧府事。後贈上相。忠文其諡也。妣靑陽府夫人沈氏。正郞贈贊成健之之女。公以正宗丁巳十二月四日生。幼不好弄。寡嬉笑。莊重有德器。忠文公嘗見其趍庭而過。默視而語座賓曰。吾之後而長我家者。必此兒也。己卯。中生員試。初由副司正。轉侍直副率。陞六品。歷諸司郞。出爲金化縣監。尋換高陽郡。戊子。丁內憂。卽吉。由翊衛。爲延安府使。壬辰。忠文公捐館舍。甲午。連爲尙方厨院僉正。戊戌。由咸興判官。魁人日泮製。命赴殿試。唱名日。特授副校理。歷序至應敎。他凡三司諸職。多不錄。入內閣爲直閣。己亥。特授同副承旨。連除泮長吏議。翌年。特授禮曹參判。間爲都承旨。辛丑。由亞銓。特授工曹判書。移兵曹判書。壬寅。吏曹判書。癸卯。又判兵曹。前後居於是者。爲五。丁未。拜水原留守。己酉。入爲左參贊。差籌司有司,藝文館提學,內閣提學,宣惠堂上,講官,知實錄事。除摠戎使。移禁衛大將。又移訓鍊大將。壬子。戶曹判書。自亞卿以後。諸司提調。則典醫,惠民,藥院,尙衣,承文,司宰,司䆃,宗簿,宗廟,內資也。自正憲。至輔國。則用敦工及書寫勞也。進拜右議政。癸丑。陞領議政。自是至于甲子。入中書者四。乙丑。領敦寧府事。丙寅。入耆社。賜几杖宣醞。侑以一等樂。領三軍府事。己巳四月丁卯卒。春秋七十有三。訃聞。震悼。所以隱卒而庀其終者渥矣。又命不日。節壹惠曰忠翼。嗚呼。此公垂五十年歷官哀榮終始之大榷也。而若宗廟,社稷,南殿,景慕宮,藥院,禁衛,御營,司譯,軍器,奉常,司僕,厨院都提擧。大拜後。後先所兼領也。六月甲辰。用形家說。權厝于利川柏面金谷里夫人墓左。八月庚戌。合祔焉。卽負艮原也。配貞敬夫人海平尹氏。贈吏參致升女。無育。取炳冀爲嗣。官前左贊成。忠獻祀孫。今輔國泳根氏第二男也。有一子幼。公和而不流。直而不絞。仁民愛物之性。天所植也。伯氏文貞公。愛敬而器重之。其於諸姊妹。分甘絶少。有贍無匱。傔奏臧獲。未嘗以誶呪語加之。及進塗闢而位眷日隆。斂遠而不可得。則色愀如也。嗚呼。當屠維崩坼之會。我聖母持傾濟屯。泰山而四維之。宣仁堯舜之不是過也。而時則宥密贊襄。廷輯而野於謐。捨公而誰之功也。然公則夙夜不寧。每賓客散而簿領歇焉。簾閣却掃。落然若無事也。掌財賦而謹樁杙。典甲兵而整組練。在公爲餘事也。其紳笏巖廊。入告而出告也。侃侃乎其敬對越。恤幽隱。典緝煕。勤諮訪。出於至誠。以至崇儒奬節。進賢擧能。皆所以迓有靈長。可按而行之也。若守令之賜對。以稽其能否也。海稅之覈蠲。以懷其旄倪也。吏隷欠折之橫徵者。宮庄饒戶之竄名逃其徭者。率淸賑而絶其源。若文純權公。文敬鄭公祠版之不許其去祧爲墠。富寧九義士遺祠之宣額。持平李公鳳祥之超贈賜諡。濟州啓聖祠之刱設。皆所以倡儒學勵名義壽世敎也。惜人材。有聞輒薦。重吏治。就舊式而展差遣。年限機務之停滯。則章奏詞訟之勿拘齋戒也。逬謫而不可還者。則妻孥之勿禁。其任便隨率。皆所以以實心行實事也。我主上入承也。以元輔迎于邸。上之篤毗公何如也。而退然不敢自居也。嗚呼。傳不云乎。善人國之紀也。其爲己也順而祥。爲人也愛而公。玆爲善之本也。自公易簀之日。擧一世咸曰善人其已矣。是豈非藏乎身者。有足以取之者與。生平不能善乎謔。視嫚媟捷給心口不相應者。病之若夏畦。豈傳所云毋自欺者與。公自號荷屋。居平喜讀史。詩則淸警幽澹。取材近而爲旨遠。類非專門者所可能也。嗚呼。余於公兄弟也。特姓不同耳。顧和涕淚漬觚墨。不辭而爲之辭如此。後之人倘有以恕其妄而悲其志也與。嗚呼。 <끝>

 

大匡輔國崇祿大夫致仕奉 朝賀楊州趙斗淳撰」

三從姪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兼戶曹判書判三軍府事炳國謹書」

 

崇禎紀元後五己巳八月 日立

 

심암유고 > 心庵遺稿卷之二十三 / 墓表

 

 

 ↑이천시 백사면 내촌리 222~14번지에 영의정 하옥(荷屋) 김좌근[金左根, 1797(정조 21)~1869(고종

     6)] 선생의 고택 마당에 서있을 때의 묘비 모습이다.

 

원래는 선생의 고택 바로 뒤 나지막한 야산에 좌찬성을 지낸 그의 양아들 김병기(金炳冀) 묘와 위아래로 있었는데, 그의 5대손 김광한씨가 1997년 별세한 뒤에 2006년경 후손들이 두 분의 묘를 파묘하여, 화장∙산골한 뒤 묘비와 석물들은 고택마당으로 옮기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마을사람들이 전한다.

 

그 후 2009년 김좌근의 6대 손녀가 고택과 묘비를 비롯한 석물과 주변 땅 10만 1500㎡(약30,000평)를 서울대에 기증 함으로서 이 묘비는 현재 서울대 역사박물관 주변에 옮겨져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 주변에 옮겨저 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