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광서기(廣西記) - 제정공파 이름자 유례

야촌(1) 2022. 5. 29. 22:49

■ 광서기(廣西記) - 이상언(李尙彦)

 

월성이씨(月城李氏)로 이름에 ‘입(立)’ 자 편방을 넣은 사람은 모두 문정공(文靖公)의 자손들이다. 태조가 내린 교지를 종갓집에 보관하여 여러 대를 거쳐 전하였는데, 중간에 불에 타는 재난을 당하여 재가 되고 말았으니, 이 어찌 우리 가문이 쇠락한 운명과 무관한 것이겠는가.

 

그 후 자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조상의 산소도 제대로 모를 뿐만 아니라, 선대에 ‘입(立)’ 자 편방을 넣어 이름을 짓게 된 뜻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원주(原州)에 사는 이의(李毅)나 온양(溫陽)에 사는 이종언(李宗彦)은 당초에 모두 다른 글자로 이름을 삼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관동의 안절사(按節使)로 나갔을 때 이의 어른은 선대가 이름을 짓던 뜻을 비로소 듣고 곧바로 이름을 ‘의(毅)’ 자로 고쳤으며, 이에 아들 이기영(李奇英)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종언은 도사로 있을 때 또한 특이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훈계하기를,

“네가 만약 이름에 ‘언(彦)’ 자를 쓴다면, 당연히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될 것이다.”

하였다.

 

나중에 서울에 와서 선대가 이름을 짓던 전통을 전해 듣고는 비로소 신령이 자신을 경계한 것임을 깨달았다. 대과와 소과는 모두 이름을 바꾼 이후에 합격하였다고 한다.

 

정구 선생이 일찍이 나의 조부에게 말하기를,

“이씨가 이름에 ‘입(立)’ 자 편방을 쓴 것은 태조의 교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비록 여러 대가 지났다 하더라도 이 전통을 없애서는 안 됩니다.

 

이름 두 글자 중에 간혹 선대의 이름 한 글자를 범하는 것 또한 혐의가 되지 않습니다.”

하였으니, 문정공의 후손들은 이를 몰라서는 안 된다.

 

정유년(1657, 효종8) 맹동(孟冬) 하순에 후손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성균관 전적(行成均館典籍) 이상언(李尙彦)이 금호문(金虎門) 밖 여저(旅邸)에서 쓰다.

 

 

[註記]

 

[주01] 문정공(文靖公) : 이달충(李達衷)을 가리킨다. 문정은 그의 시호이다.

 

[주02] 이종언(李宗彦) : 156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 자는 자미(子美)이며, 아버지는 통정대부 이인(李

           寅)이다. 1603년(선조36) 계묘 식년시에 생원이 되었고, 1609년(광해군1) 기유 증광시에 합격하였다.

         《國朝文科榜目》

 

[주03] 정구(鄭逑) : 1543~1620. 본관은 청주,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이다. 1573년(선조6) 유일(遺逸)로 천거

           되어 여러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사직하고 나가지 않았다.

 

          1580년 창녕 현감(昌寧縣監)으로 가서 선정을 베풀었고 이후 우승지, 강원도 관찰사, 성천 부사(成川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문집에 《한강집》이 있고, 편저로 《성현풍(聖賢風)》ㆍ《태극문변(太極問辨)》ㆍ《역대기년(歷代紀

          年)》 등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주04] 이기영(李奇英) : 1585~? 본관은 경주, 자는 자화(子華)이다. 1627년(인조5) 정묘 식년시에 합격하였다.

         《國朝文科榜目》

 

[주05] 이상언(李尙彦) : 1597~167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용수(溶叟), 호는 성서(城西)이다. 1633년(인조11) 진사가

           되었고, 1648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병조 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654년(효종5) 영광 군수(靈光郡守), 1656년 다시 성균관 직강에 임명된 이후 안악 군수(安岳郡守), 성균관 전적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성서집》이 있다.

 

[주06] 금호문(金虎門) : 창덕궁의 돈화문 서쪽에 있는 작은 문을 말한다.

 

제정집 제4권 / 추록(追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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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廣西記

 

月城之李。名以立字偏傍者。皆文靖公子孫也。太祖朝有御旨。藏在宗家。累葉傳來。而中遭回祿之災。未免失之灰燼。此豈非私門衰運之所關歟。其後子孫散之四方。不但昧昧於松楸之路。至或不知其先世命名之義。如原州之李毅。溫陽之李宗彥。初皆以他字名。至寒岡鄭先生逑案節關東。李毅丈始聞先世命名。卽改以毅字。其子奇英登文科。李宗彥都事又嘗得異夢。有老人敎之曰。汝若改名用彥。當貴顯云。後到京中。聞其傳來之舊。始覺其神靈之警我矣。其大小科。皆在改名之後云。鄭先生嘗謂吾王父曰。李氏立字。肇自御旨。雖至累世。不可廢。二名或犯先世一名。亦不爲嫌云。爲文靖後裔者。不可不知也。丁酉孟冬下澣。後孫通訓犬夫。行成均館典籍尙彥。書于金虎門外旅邸。<끝>

 

제정집 제4권 / 추록(追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