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168

慶州李氏 月城君派 家狀, 行狀, 墓碣銘 集成

■ 慶州李氏 月城君派 家狀, 行狀, 墓碣銘 集成 (경주이씨 월성군파 가장, 행장, 묘갈명 집성) ◈21世 月城君 李之秀 / 金紫光祿大夫 月城君 祭壇碑銘 ◈25世 大司憲公 李繩直 / 先祖考嘉善大夫大司憲府君家狀 ◈26世 琴湖公 李時敏 / 先府君家狀 ◈26世 琴湖公 李時敏 / 成均生員琴湖公墓碣銘 ◈26世 琴湖公 李時敏 / 李宗準遺墟碑 ◈27世 訥齋公 李弘準 / 月城李氏家訓 ◈27世 訥齋公 李弘準 / 書自製墓銘後 ◈27世 訥齋公 李弘準 / 自製碑文 ◈27世 訥齋公 李弘準 / 通訓大夫行樂安郡守南公墓碣文 ◈27世 訥齋公 李弘準 / 墓碣陰記 ◈27世 訥齋公 李弘準 / 行狀 ◈27世 慵齋公 李宗準 / 琴軍威墓碣 ◈27世 慵慵齋公 李宗準 / 墓碣銘 ◈27世 慵齋公 李宗準 / 墓誌文 ◈27世 慵齋公 李宗準 / 行狀 ◈27..

구봉 이도겸 효행록(九峯李道謙孝行錄)

작성일 : 2010. 03. 26 구봉 이도겸 효행록(九峯李道謙孝行錄) - 명고 정간 찬(鳴皐鄭幹 撰) 30世 이도겸「1667(헌종 9)~1718(숙종 45)」 公諱道謙字好與姓李氏。慶州人。以新羅及梁部大人謁平爲鼻祖。中世失譜。入國朝有諱良官工曹判書。卽公之十世祖也。曾祖諱明翼。祖諱挺善。考諱夏相。妣驪江李氏。童蒙敎官垷之女。晦齋先生之玄孫也。崇陵丁未二月八日。生公于府北杞溪縣里第。公幼有至性。年十四遭外艱。哀毁如成人。事王府君及母夫人。克殫誠孝。定省未嘗廢。甘旨未嘗匱。聲色必和愉。應對必敏謹。其有不安節則晝不離側。夜不解帶。鼎俎必親執。藥餌必先嘗。人不曾見其翔容也。嘗出宿友人家。忽心動不寐。明發亟還。母夫人有微恙云。丁丑丁王府君憂。易慽備至。壬辰母夫人疾病。公斷指灌血得少甦。旣不能救則公孺子啼。水漿不入口者累日。送終諸節。必誠必愼。一遵文公家禮。旣葬結廬墓傍。藉一..

靑城 孝烈傳[李箕齡] - 백사공파

작성일 : 2010. 03. 26 李箕齡 靑城 孝烈傳 -성해응 찬 이기령「李箕齡, 1666(현종 7) ~ 미상」 李箕齡字明仲。慶州人。文忠公恒福傍孫也。肅廟丙午生。家縣南楸谷村。好學。年甫十三。通四書五經。其母文忠公李景奭從孫也。嚴有法度。敎箕齡甚力。箕齡亦有至行。年十四。丁父憂。將母而廬于墓。嘗暮哭于墓。有一老人曰猛獸在前何不歸。及歸廬兩虎在廬外若相護者。自是每晨昏哭墓。虎輒翼而前後之。以終三年。母嘗患痁。醫言當灸內踝。箕齡不忍苦其親。每朝自灸其踝。母病尋亦愈。強盜嘗入室。箕齡恐傷母。冒盜刃匍匐蔽其母。盜曰孝子也。爲留衾褥而去。及遭母喪。哀毁踰制。母畏雷。有雷輒立筵几側而泣。雷止乃退。 ---------------------------------------------------------------------------------------------..

7代를 이은 李正根 가의 도화원 명가 小考

歷史上 前無後無한 7代를 이은 李正根 가의 도화원 명가 小考 조선 5백여 년간 한 대도 빠짐없이 十여代를 사자관(寫字官 : 承文院과 奎章閣의 한 벼슬)과 명필로 나라에 공적을 남긴 경천군 북악 이해룡(李海龍) 선생가가 있다면 요즘 같이 사진이 없던 시대에는 서화로 사물의 고증 및 기록을 남겼는데, 도화서 화원으로 7대를 이어서 나라에 공적을 남긴 가문 또한 전무후무한 진기록이고 경주이씨의 자랑할 만한 명가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초기에는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가 도화원(桃花園)이었는데 1463년(세조 9)에 도화서(圖畵署)로 개칭되고 예조에 소속된 종6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어진(御眞) 제작 및 궁중의 각종 행사를 그리거나 풍경 및 전쟁 시 적과 아군의 주둔지와 진지를 사생(寫生)..

경주이씨 동종계 서문

경주이씨 동종계 서문(慶州李氏同宗禊序文) 白沙 李恒福 요(堯) 임금 때에 옥사(獄事) 다스리는 관리를 이관(理官)이라 하였는데, 직무를 잘 수행한 이가 있어 관(官)으로 성(姓)을 삼아 주었던바, 소리가 서로 가까움을 인하여 마침내 이씨(李氏)가 되었다고도 하고, 또 주(周) 나라 말기에 수장사(守臧史) 노담(老聃)이 모태(母胎)에서 70년을 있다가 막 태어나면서 손가락으로 오얏나무 이(李)를 가리켰으므로 또한 성을 이(李)라고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너무 요원한 일이라, 아득하여 이 두 가지 설(說)을 자세히 구명하기가 어렵다. 이로부터 이후로 뿌리가 배양되고 가지가 창달하여 가지와 잎이 멀리 퍼졌다. 그리하여 우리 동방(東方)에 이르러서는 실로 우리 조(祖)가 사는 곳에 촌락(村落)을 이루어 뭇 사람..

이알평(李謁平)

■ 이알평(李謁平) 신라 건국기의 씨족장으로 기원전 117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자(字)는 천서(天瑞), 호(號)는 표암(瓢巖), 시호(諡號)는 문선(文宣) 또는 은열왕(恩烈王)이라 전한다. 혁거세 거서간 때에 개국좌명공신에 녹훈되고 각간, 아찬을 역임하였으며 군무를 주관하였다고 한다. AD83년에 20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사후 법흥왕 때 문선공(文宣公)의 시호가 내려졌고, 태종무열왕 때 왕으로 추존되어 은열왕이라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경주이씨의 시조이며 이알평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이거명(李居明)을 중시조로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 봉후(封侯) 육촌장(六村長)의 수장(首長)이니 좌장(座長)이니 하고 혁거세(赫居世) 옹립(擁立)의 좌명공신(佐命功臣) 위 태사태부(爲太史太傅) 성국대부(..

사적으론 원수지만 공적 일엔 힘을 모은 - 이종성(李宗城)

조선왕조 인물 탐구 - 이종성, ■ 사적으로 원수지간이나 공적인 일엔 힘을 모으는—이종성 이종성(李宗城)은 영조때 급제하여 영조말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영조가 만년에 정순왕후로부터 후사를 이으려는 희망이 간절하여 회임에 도움이 되는 보약을 정순왕후에게 자주 올리도록 하였다. 정순왕후는 성덕이 있어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이 애기를 가지면 혹 세손(정조를 가리킴)이 임금의 사랑을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몰래 약을 다른 곳에 버리고 들지 않았는데 영조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 이종성「1692년(숙종 18)~1759년(영조 35)」 당시 영조가 문씨 성을 가진 후궁을 귀여워하고 있었다. 이 여자가 몰래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할 계략으로 옷으로 배에 덧붙여 마치 아기를 밴 것처럼 꾸미고 아기를 가졌다고 ..

임금이 내린 명을 받들 수 없다고 한-이경휘

■ 임금이 내린 명을 받들 수 없다고 한 - 이경휘 이경휘[李慶徽, 1617년(광해군 9)~1669년(현종 10)]의 자는 군미(君美), 호는 묵호(默好) 또는 춘전거사(春田居士) 이다.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이경윤(李憬胤)의 증손이다. 조부는 이대건(李大建)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이시발(李時發)이다. 어머니는 신응구(申應榘)의 딸이다. 공은 나이 17세 때인 1633년(인조 11년)에 진사가 되고, 1641년(인조 22년)에 문과 별시(文科別試)에 급제하고 춘추관기사관, 강화유수, 경기감사, 이조판서를 역임했다.공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충익공(忠翼公), 벽오 이시발(碧梧 李時發)이 바다에 해 두개가 아름답게 떠오르는 꿈을 꾸고서 공과 훗날 좌의정에 오른 아우 화곡(華谷) 경억(慶億) 형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