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매산공 이인혁 이야기

야촌(1) 2020. 12. 20. 07:43

글 : 영암 망호리 이송재(1645~1703)

 

지난 을축년「乙丑年,1685(숙종 11)」 봄에 나는 우리 경주이씨 대동보(1684년의 甲子譜) 추보(追補)시 기존에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전남 영암에서 서울로]  잠시 머물러 있었는데 여러 선비들이 우리 종친중에서 매산처사(梅山 處士) 이인혁李寅爀,1634년(인조 12)∼1710년(숙종 36)」이란 분이계시는데 이분으로 말할것 같으면 중국(中國)의 남송(南宋·420~479)시대 황숙도「黃叔度: 황헌(黃憲)의 字」나 당(唐) 나라 때의 원자지「元紫芝: 元德秀의 字,696~754)」와 비길만한 아주 청렴한 분이라며 나에게 일러 주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내어 매산공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으며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이리도 늦게  만나게 되었다며 진작 만나 뵙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나는 서울에 머물러 있는 일정이 그리 오래지 않았기에 추보 발간일을 마치고 다시 영암 집으로 내려 간다며 작별 인사를 드린 후 헤어졌는데 그때 매산공과 함께 나누었던 감동적인 이야기들은 늘 잊을 수가 없었다.

 

그후 10여년이 지난 갑술년(甲戌年,1694년) 여름에 매산공께서 환갑나이에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부임하시었고 나는 다시금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다. 이후 나주(羅州)와 영암(靈巖)은 가까운 거리였기에 나는 자주 나주로 찾아 가서 서로의 안부를 살피며 편하게 하루를 보내다 느즈막에 영암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리고 인혁공께서 목사(牧使)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시 나주 백성들이 나주 동문밖에다 천막을 치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송별(送別)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읍민들은 술잔을 돌리며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목사공(牧使公=이인혁을 말함) 께서는 나주 백성들을 위하여 바르고 어질게 잘 다스리는 정치를 하였기에 우리 읍민들은 전적으로 목사님의 지시를 믿고 따르며 복종하였고 북송(北宋) 사람 장방평「張方平: 字는 安道,號는 樂全居士,1007년~1091년/백성들에게 主德을 베풀어 백성들이 그 은혜에 보답코저 사당을 짓고 화상을 그려 모셨다고 함」과 같은 선한 정치를 하였으며, 당시 촉(蜀)지방 사람들은 장방평(張方平)이 다른곳으로 이임(移任)하게 되자 그의 화상을 그려 사당에 모시고 공경한 것처럼 우리 읍민들도 그렇게 합시다라고 서로들 이야기를 나누며 장방평(張方平)의 선정에 대해서는 "소순(蘇洵=중국 북송 때의 문학가)이라는 사람이 널리 알렸다"라고 서로들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