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사류재 이정암 선생 유언

야촌(1) 2021. 8. 12. 11:21

26世 이정암李廷馣, 1541(중종 36) ~ 1600(선조 33)의 유서[遺書 庚子八月二十四日]

 

내 너희를 위해 남긴 것이 없다만....

 

내가 작은 종기를 잘못 조리하여 마침내 독한 종기가 되고 말았다.

밤낮으로 고통스럽고, 죽음이 아침저녁에 있고 보니 다시 무엇을 말하겠느냐?

 

나이 쉰이면 요절했다고 말하지 않는데, 하물며 나는 예슨 해를 살았다.

벼슬은 재상의 반열에 올랐고 게다가 자손까지 있지 않느냐? 기꺼운 마음으로 눈을 감아 조금도 여한이 없다.

 

너희는 내 죽은 뒤에 장례 등의 일을 검약에 힘써 내 평일의 뜻을 따르도록 해라.

국장(國葬)이 끝나거든 바로 전포(錢浦)에 있는 죽은 아내의 곁에 묻고, 고양촌(오늘날 고양시 일산동구 사리현동)의 집에 신주를 모시고 슬픔을 아껴 효를 마치면 될 것이니라.....

 

사람의 부귀와 빈천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에서 부여받는 법이라 그 사이에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평일에 자손을 위해 산업을 영위하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다만 너희들이 이미 재주와 덕으로 당세에 입신하지 못하였고, 게다가 가업(家業)조차 없고 보니 무엇으로 살아가겠느냐? 시골 사람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 틀림없겠는데, 이 또한 운명이니 어찌 하겠느냐?


직장[直長:3자 준(濬)]은 큰 형님께 출계(出系)하였는데, 또 아들 없이 요절하고 말았다.

제사가 끊길 것을 생각하면 잊을 수가 없구나. 경성[慶成: 둘째아들 남(湳)의 次子]이가 성장하거든 세워 후사로 삼을 것을 의논해 보아라. 만약 그 처가 원치 않으면 굳이 할 것은 없다.

 

늙은 첩은 천리 길을 따르면서 온갖 기쁨과 슬픔을 모두 맛보았다. 하지만 아들이 없으니, 막내 홍(洚)이에게 의탁케 함이 좋겠다.

 

넷째[위(湋)]는 불행히도 전쟁 통에 죽어 골육을 묻은 곳이 제자리가 아니다. 떠도는 넋이 방황할 것이 더욱 마음 쓰이는 구나. 잠시 경란(慶蘭)이 크기를 기다려 전포(錢浦: 북한 개풍에 있는 지명)로 이장해서 지하의 혼백이 서로 기댈 데가 있게 함이 옳을 것이다.

 

서울 서부의 작은 집은 따로 경란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 그 아비가 살았을 때 내가 그 집을 전해주려 했으므로 지금 다시 말해둔다. 전포의 묘지기인 종[奴] 언창과 여종[婢] 잉금, 그리고 과천에 사는 종 막산과 그 소생의 세 자식 등은 제사 지내는 맏 자손에게 대대로 전하라. 비록 많더라도 나누지 말고 힘써 거느려 살피도록 해라.

 

사당에 지내는 제사와 무덤에 지내는 제사는 모두 장자로 하여금 봉행케 하고, 여러 자손들은 힘껏 비용을 보태면 될 것이다. 이것이 내 유언의 대략이다. 나머지는 모두 도연명(陶渊明,365년~427년)이 다섯 자손에게 고한 글 가운데 자세히 실려 있으니, 벽 위에다 붙여 두고 힘써 행하도록 해라. 어지러워 다 말하지 않는다. 두 아들과 네 손자, 그리고 두 사위에게 주노라.

 

[원문]

余以微痒, 將理失宜, 轉成毒腫, 晝夜苦痛. 死在朝夕, 夫復何言. 五十不稱夭, 況吾六十, 而官忝宰列, 又有子孫哉. 甘心瞑目, 小無所恨, 汝等吾死後, 斂葬等事, 務從儉約, 以從平日之志. 國葬後, 卽窆于錢浦亡夫人側, 返魂于羔羊村家, 節哀終孝可也. 人之富貴貧賤, 禀於有生之初, 不可容力於其間. 吾之平日, 不爲子孫營立産業者, 以此. 但汝等旣無才德立身于當世, 又無家業, 何以得生? 其不免爲鄕人也必矣. 是亦命也, 奈何. 直長出繼于伯氏, 又無子而夭, 言念絶祀, 未能忘也. 慶成成長, 相議立爲後. 若其妻不欲, 則不須爲也. 老妾相隨千里, 備嘗甘苦, 而旣無子, 托之末兒洚可也. 第四子不幸死于兵, 骨肉葬非其所, 旅魂飄飄, 尤可念也. 姑俟慶蘭成立, 令移葬于錢浦, 地下魂魄, 庶有相依可也. 京中西部小家垈, 別給于慶蘭爲可. 其父生時, 吾欲傳給其家, 故今復云云. 錢浦墓直奴彦昌, 婢芿今, 果川奴莫山及其所生三口等, 奉祀長子孫世傳. 雖多勿分, 務令護恤. 廟祭墓祭, 皆令長子奉行, 諸子孫隨力助奠可也. 此其大略, 餘則具于陶淵明告五子孫書中, 付諸壁上, 勉以行之. 荒迷不宣. 付二子四孫二壻.

 

사류재(四留齋)  이정암李廷馣, 1541(중종 36) ~ 1600(선조 33)이 죽음을 보름여 앞두고[이정암은 1600년 9월 10일 병으로 졸하였다.] 아들과 손자, 사위 등에게 준 유서이다. 자신의 사후의 일을 하나하나 당부했다. 글 속에서 도연명이 아들 엄 등에게 준〈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 이야기를 꺼냈다. 도연명이 남긴 글의 한 대목은 이렇다.


내 나이 쉰을 넘겼다. 젊어서는 곤궁하여 늘 집안의 가난함 때문에 동분서주하였다.

성격은 뻣뻣하고 재주는 졸렬하여 사물과 더불어 어그러짐이 많았다. 혼자 자신을 헤아려 봐도 필시 세속의 근심을 받으려니 하였다. 애써 세상을 떠나 지내느라 너희들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춥고 주리게 하였다.

 

내 일찍이 한나라 왕패(王覇)의 어진 아내 유중(孺仲)의 말에 느낌이 있었다.

낡은 솜옷을 걸친다 해도 어찌 자식들에게 부끄럽겠느냐?(중략) 질병을 앓은 이후로 점점 쇠약해지는구나.

 

친구들이 날 버리지 않아 매번 약석으로 도움을 받지만, 수명이 장차 다해갈까 염려되는구나. 너희는 어리고 집은 가난하여 매번 나무하고 물 긷는 노고를 감당하니, 어느 때나 면하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노라면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중략)

 

《시경》에서는 “높은 산을 우러르며 큰 길을 간다”고 했다. 비록 능히 이렇게 할 수는 없다 해도 지성스런 마음으로 이를 숭상해야 할 것이다. 너희들은 삼갈진저. 내 다시 무슨 말을 하랴. 나라에 국장(國葬)이 있어 바로 장례 할 수는 없을 테니, 국장이 끝난 후에 먼저 간 아내 곁에 묻어달란 당부를 남겼다. 인간의 부귀빈천은 작위로 될 일이 아니어서 넉넉한 살림을 남기지 못하고 가는 것을 미안해했다.

 

여러 자식과 손자에게 제사 받드는 문제를 말하고, 집안의 큰일들을 가늠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연안성 전투에서 왜군에게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막상 그가 조정에 올린 장계는 “적이 아무 날 쳐들어 와서 아무 날 물러갔나이다.”란 딱 한 줄 뿐이었다.

 

그는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제 공을 내세워 자랑하기 바쁠 자리에서도 남의 일 말하듯 한 줄 글로 보고했다. 죽음을 앞두고 담백하게 써내려간 그의 유서에서 또 공(公)의 성품과 우린 만난다. 이정암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류재(四留齋)·퇴우당(退憂堂)·월당(月塘),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당시 이조참의로 있었다. 선조가 평안도로 피란하자 뒤늦게 호종(扈從)하였지만 이미 체직된 뒤라 소임이 없었다. 아우인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개성을 수비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 뒤 황해도로 들어가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연안성(延安城)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다. 준비 작업을 서두르던 중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많은 장졸을 이끌고 침입하였는데, 4일간의 치열한 싸움 끝에 승리하였다.

 

그 공으로 황해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이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해서초토사(海西招討使)로 해주의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지키기도 하였다. 난이 끝나자 풍덕(豊德: 개풍의 옛지명)에 은퇴하여 시문으로 소일하다가 1600년(선조 33) 9월 10일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독역고(讀易攷)》·《왜변록(倭變錄)》·《서정일록(西征日錄)》·《사류재집》 등이 있다.

이정암은 파평윤씨(坡平尹氏) 윤광부(尹光富)의 딸을 아내로 맞아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부인 윤씨는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공의 나이 57세) 7월에 먼저 죽었다.

다섯 아들 중 둘째인 이남(李湳)과 넷째인 이위(李湋)는 일찍 죽었고, 큰 아들 이화(李澕)도 공보다 먼저 죽은 것으로 보인다.

 

유서에 두 아들 뿐인 것도 이 때문이다.[족보기록에는 장자가 공보다 14년 뒤인 1614년(광헤 6)에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있다.]이정암은 부인 윤씨의 상이 끝난 뒤인 1598년(선조 31)에 남은 아들 셋째 준(濬)과 막내 홍[洚: 족보에는 명(沔)으로 되어있음]에게 재명(齋名)을 지어주며 말에 대한 경계를 강조했다. 제목은 〈이자명재설(二子名齋說)〉이다.

 

옛 사람은 반드시 재명(齋名)이 있었다. 이름을 돌아보아 뜻을 생각하기 위해서이지, 단지 아름다운 이름을 훔쳐 취하여 스스로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주자의 호는 실제 회암(晦庵)이고 아버지 주송(朱松)의 호는 위재(韋齋)이니, 또한 스스로 뜻을 취한 것으로, 전기에 기록된 것으로 대개 가늠할 수가 있다.

 

너희들은 타고난 자질이 아주 둔하지는 않다. 하지만 가정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고, 또 사우(師友)의 일깨움이 부족한데다 변고를 만나고 시습(時習)에 점차 물들고 말아, 군자가 되지는 못하겠고, 마침내 촌사람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내가 근심하는 바는 촌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울 것을 걱정할 뿐이다. 지금 네가 어머니의 복을 마치고 사는 곳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나는 아침저녁으로 서로 본보기가 되지 못할 것을 염려한다.

 

삼가 《논어》의 “행실은 바르게 하되 말은 겸손하게 하라.”는 가르침과《중용》의 “침묵은 용납되기에 충분하다.”는 말을 취하여, 준의 재명은 “손재(遜齋)”라 하고 홍의 재명은 “묵재(默齋)”라 짓는다. 이어서 이렇게 설을 짓는다.

무릇 마음이 쉬 드러나 제어하기 어려운 것으로는 말보다 심한 것이 없다. 수치와 다툼을 일으키는 연유와 계단이 되는 것도 말만한 것이 없다. 예로부터 성현들이 서로 힘써 삼갔던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물며 준은 빼어나고 예리하며, 홍은 우직하니 어찌 병에 맞는 좋은 약이 아니겠느냐? 돌아가 이 설을 벽 사이에 써 두고 아침저녁으로 돌아보고 생각하여 이것을 염두에 두게 되면, 비록 천리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오히려 슬하에서 친히 가르침을 받는 것과 같을 것이다.

 

만약 ‘아버지께서도 정도대로 행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면서 물러나 뒷말을 하고 장 단지를 함부로 뒤집는다면, 내가 오늘 너희 둘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다. 너희 둘은 힘쓰도록 해라. 이미 써서 주고, 또 인하여 스스로를 경계한다. 무술년(1598년) 상완(上浣)에 쉰여덟의 노인이 덕수별업(德水別業)에서 쓴다.

 

[원문]

古之人, 必有齋名, 所以顧名思義, 不但竊取美號, 以自標榜而已. 朱子之號, 實爲晦庵, 其考韋齋, 亦自取義, 傳記所錄, 槪可想已. 汝輩資禀不至駑下, 而旣蔑家庭之訓, 又乏師友之誨, 遭罹變故, 漸染時習, 其不得爲君子, 而終未免爲鄕人也必矣. 然余之所憂, 不在於鄕人之歸, 而憂其難免於亂世也. 今汝闋母之服, 告歸所棲, 余恐其不得朝夕相規也. 謹取魯論危行言遜之訓, 中庸其默有容之說, 名濬曰遜齋, 名洚曰默齋, 而係之說曰, 夫心之易發而難制者, 莫甚於言語, 而起羞興戎, 所由以階者, 亦莫如言語也. 從古聖賢, 相與勉勅者, 不出於此. 況以濬之頴銳, 洚之愚直. 豈非對病之良藥乎. 歸以是說, 題在壁間, 朝夕顧諟, 念玆在玆, 則雖在千里之遠, 猶之膝下親承謦欬也. 若曰, 夫子亦未出於正也, 退有後言, 漫覆醬瓿, 則非吾今日所望於汝也. 二子勖哉. 旣書而贈之, 又因以自警云. 戊戌上浣, 五十八歲翁, 書于德水別業.

위의 글은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치고 개풍(開豊)의 아버지 곁을 떠나 원래 살던 집[高陽]으로 돌아가는 아들에게 당부를 겸하여 지어준 글이다.

 

그래도 곁에 있을 때는 이런저런 일깨움으로 흐트러진 자세를 다잡아 줄 수 있었는데, 막상 떠나고 나면 아침저녁으로 잘못을 바로잡아 줄 수도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준(濬)은 총명하고 홍(洚)은 우직하니, 준에게는《논어》의 “위행언손(危行言遜)”에서 의미를 따와 “손재(遜齋)”란 재명을 붙여주고, 홍에게는《중용》의 “기묵족이용(其默足以容)”에서 의미를 따와 “묵재(黙齋)”란 이름을 붙여 준다고 했다.

 

준의 경우 빼어나고 예리하니 겸손으로 말을 다스리란 뜻으로 지었고, 홍의 경우 우직하니 고요함으로 말을 다스리란 뜻을 담은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