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85

취운 이원우 서유록(翠雲李元雨西遊錄)

■ 취운 이원우 서유록(翠雲 李元雨 西遊錄) 낭주(朗州)고을 망호리(望湖里)는 우리 선조가 대대로 거주한 마을이다. 호남의 남단인 이곳은 내가 50평생을 살면서 드나들며 보고 들은 것이 날마다 호남 경치가 아닌 것이 없었다. 월출산 바위돌은 빠트린 것 없이 그 많은 것을 세어 보았으며 덕진호(德津湖)는 깊고 얕음과 길이와 넓이를 빠짐없이 측량하였으니 어찌 붓을 다시 잡을 것인가. 관동지방과 관서지방을 관람하지 않았기에 지나간 해에는 관동지방 유람 계획을 세웠고 금년에는 해서(海西)지방 여행 계획을 세웠는데 사람들이 간혹 나를 지나친 방락객으로 지적하지 않을가 싶은데 그들이 어찌 나의 마음을 안다고 하리요, 나는 기특한 경치를 좋아서가 아니라 그 지방 물과 토양, 풍속을 보고 사람들을 접촉해 본 뒤에 마음..

통훈대부 의정부사인 이영선생묘지명 - 정순공파

통훈대부 의정부사인 이공 묘지명 (通訓大夫 議政府舍人 李公墓誌銘) ◇二十三世 : 국당공후 정순공파 유재 이현석 지음(游齋 李玄錫 撰) 公慶州之李。諱瑛。字子潤。鼻祖謁平事羅祖以著。後世多名人。麗之忠烈朝。有天場及第。密直副使檢校政丞。曰世基。其嗣月城府院君文孝公蒨。魁文科。同平章事。是生諱誠中。佐我太祖太宗。位左相。諡靖順。卽公五代祖也。高祖諱援。延安府使。曾祖諱赫孫。參奉。祖諱增。僉知。考諱良弼。贈兵曹參議。妣贈淑夫人李氏。縣監守柔之女。全義望族。三韓功臣李棹後也。公生于弘治辛酉。早失怙恃。鞠于女兄。自惟煢孑。罔以振家業。能感奮勵學。資固穎秀。績文又勤。 篤藝術夙就。中乙酉司馬。捷己亥別試。繇成均權知。轉典籍。乙巳。拜水部員外。仍遂歷敭闡聲望。夏官之正佐郞。秋冬官之正郞。諫院則正言,司諫。憲府則持平,掌令,執義。爲修撰,校理於玉署。爲檢詳,舍人於政府。爲正於司宰監奉常..

신라 소판 경주이공 사단 비명

■ 신라 소판 경주이공 사단 비명/국역 (新羅 蘇判 慶州李公 祀壇 碑銘/國譯) 이땅에 민생이있으면 하늘이 신성한 임금을 반드시 낳으시며, 현철 충량한 보필도 반드시 있게 되어 국가를 세우고 정치를 이루나니, 이는 천하만세의 통하는 의리인 것이다. 저 옛날 진한(辰韓) 유민들이 육부촌을 만들고, 각. 각 촌장을 두어 다스리다가 박혁거세의 신성함을 보고 임금으로 세웠으니, 겸양하는 풍토를 볼수 있도다. 이때 양산촌장 휘 알평(謁平)께서, 선두에서 주장 하였으니 바로 우리경주이씨의시조이시다. 경주 표암에서 태어나 신성 문무 겸전하여, 나라를세우고 임금을 도와 민생을 보살피었으니, 지극한 덕망은 하늘과 사랑의 도움을 얻어, 높은 벼슬과 긴 수명을 모두 누리게된 것이다. 유리왕 구년에 이씨의 성을 받았고, 대대로..

취운 이원우 선생 자찬 묘지문.

■ 취운 이원우 선생 자찬 묘지문 (翠雲 李元雨 先生 自撰 墓誌文) 아주 먼 옛날에 우리 경주이씨(慶州李氏)는 비로소 표암(瓢巖)으로 내려 오셨으니 이름은 알평(謁平)이라고 하는 이분을 상조(上祖)라 한다. 이때부터 가문이 번창하여 우리나라에 큰 씨족(氏族)으로 울렸다. 고려말기에 이르러 알평 시조(始祖) 15세孫 핵(翮 : 아호 열헌-悅軒)은 문하평리(門下評理)라는 벼슬을 지냈고, 핵의 둘째아들 진[瑱: 호는 동암(東庵)]은 백가서(百家書)를 통달하였으며 시(時)로 유명하였고 벼슬은 검교정승(檢校政丞) 임해군(臨海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定)으로 고려사 열전에 행적이 기록되었다. 세상에서 유명한 선조(先祖)가 알평 시조 17세손 제현(齊賢), 호는 익재(益齋)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성균시..

通德郞 李寅烒 墓誌銘. 墓表陰記

이인식『李寅烒, 1647년(인조 25) ~ 1689년(숙종 15)』 통덕랑(通德郞-正五品) 이인식(李寅烒) 공은 벽오 시발(時發)의 손자요. 벽오공의 2자 이조판서 춘전 경휘(吏曹判書 春田 慶徽)의 여섯째 아들로 오늘날 황해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촌의 익재공선영을 수호하다 43세의 젊은나이에 요절했다. 배위는 좌의정(左議政) 노봉 민정중[老峰 閔鼎重,1628(인조 6)∼1692(숙종 18)]의 딸이다. 묘는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촌 익재공 묘역 건너편 언덕에 있다. -------------------------------------------------------------------------------------------------------------------------------------..

재사당 이원선생 묘지명(再思堂 李黿先生墓誌銘)

■ 재사당 묘지명(再思堂 墓誌銘) 허목(許穆) 찬(撰) 공의 휘는 원(黿), 자는 낭옹(浪翁), 성은 이씨(李氏)이며, 본관은 계림(鷄林)으로, 고려의 정승을 지낸 제현(齊賢)의 7대손이다. 대대로 높은 관직을 지낸 인물이 배출되어 대족(大族)으로 불렸다. 증조부는 참판을 지낸 계번(繼蕃)이고, 조부는 관찰사를 지낸 윤인(尹仁)이다. 부친은 현령을 지낸 공린(公麟)인데, 이분은 노릉(魯陵)의 육신(六臣) 가운데 한 분인 고(故)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 박팽년(朴彭年)의 사위로서, 육신의 사건에 연루되어 세상에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공은 명신(名臣)의 후손으로 매우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며, 고결한 태도로 처신하여 젊어서 점필재(佔畢齋)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또한 학문을 좋아하여 성인의 글..

정경부인경주이씨묘지명 / 명곡 최석정 배위.

■ 貞敬夫人慶州李氏墓誌銘 ◇좌의정 화곡 이경억 공의 장녀/영의정 명곡 최석정 부인 만정당 서종태 지음(晩靜堂 徐宗泰 撰) /(1654 - 1712) ------------------------------------------------------------------------------------------------------------------------------------- 世之論近古內範。必稱申國夫人。呂正獻簡重刑家。夫人莊正有法度。相資以成呂氏號有家法。而夫人 襲魯參政典訓。皆有自也。滎公之賢。豈獨天資已哉。崔相國明谷公家治修整。而閫德焯有光美。其美之出於典訓與成。有令子與正獻家實似之。盛哉。凡閨闥之懿。多潛耀不見於外。相國家門第盛而族大。故著聞於世。宗泰素講聞而歆仰之。夫人卒數年。胤子副學君手爲夫人狀。屬宗泰曰。雖祔也。而內..

백사 문충 이공 묘지명(이항복)/ 李廷龜 撰

■ 영의정 오성부원군 증시 문충 이공 묘지명 (領議政 鰲城府院君 贈諡 文忠 李公 墓誌銘) 지은이 : 이정구(李廷龜) 만력(萬曆) 무오년(1618, 광해군10) 5월 13일에 백사(白沙) 이 상공(李相公)이 북청(北靑)의 적소(謫所)에서 졸(卒)하였다. 그해 8월에 포천(抱川)의 신향(辛向) 기슭에 귀장(歸葬)하고 궤연(几筵)이 동강(東岡)의 옛집에 돌아왔다. 이때 나는 교외(郊外)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으면서 이미 몇 줄의 글로 공의 묘표(墓表)를 지었고, 또 1300여 자나 되는 장문의 제문(祭文)을 지어 곡(哭)하였다. 그리고 12년 뒤 기사년(1629, 인조 7)에 태학사 장공 유(張公維)의 행장에 의거하여 서문을 쓰고, 명(銘)을 붙인다. 그 서문은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항복(恒福), 자는 자..

정부인 남양홍씨 절부전(貞夫人南陽洪氏節婦傳)

■ 정부인 남양 홍씨 절부 전(貞夫人 南陽洪氏 節婦傳) ◇부인은 평안도 관찰사 이윤인(李尹仁) 공의 배위(配位)이다. 진산군 강희맹 찬(晋山君 姜希孟 撰) 부인(夫人)은 남양홍씨(南陽洪氏)로, 명망(名望) 있는 집안이다. 만호(萬戶) 중량(仲良)의 따님으로 나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아버지를 모시는 모든 일을 맡아 시중 하였는데 법도(法度)가 있었으므로 아버지가 사랑하고 아끼었다. 경주 이공(慶州李公) 윤인(尹仁)한테 출가(出家)하게 되었다. 부군(夫君)이 일찍 아버지를 여의자 아직 성취(成娶) 하지 못한 아우들이 몇 사람 있었는데 모두 부군(夫君)에게 의지(依支)하게 되었다. 부인(夫人)은 더욱 도탑게 어루만져 길러서 자기(自己)의 재물(財物)을 들여가며 때를 놓치지 않고 명문가(名門家)의 규수(..

건원릉 참봉 이봉남 묘지명. 묘갈명.

26世 이봉남『李鳳男,1537년(중종 32) ~ 1593년(선조 26)』 이몽윤(李夢尹)의 손자임.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 이군(李君)의 묘지명/26世 백사 이항복 찬(白沙 李恒福 撰) 이서중 봉남(李瑞仲鳳男)은 나의 죽은 종형(從兄) 안복(安福)의 아들이다. 형은 강개한 성품에 학문을 좋아하여 가정(嘉靖) 연간에 명성이 있었다. 고(考)는 몽윤(夢尹)으로 우리 백부(伯父)인데,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사도시 정(司䆃寺正)으로 졸관(卒官)하였고, 또 그 고(考)는 예신(禮臣)으로 우리 조부(祖父)인데,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이다. 우리 이씨는 경주에서 나왔는데, 휘 알평(謁平)이 혁거세 때를 당하여 익대(翊戴)의 공이 있었고,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훌륭한 인물이 있었다. 서중은 정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