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정부인 남양홍씨 절부전(貞夫人南陽洪氏節婦傳)

야촌(1) 2009. 1. 26. 07:17

■ 정부인 남양 홍씨 절부 전(貞夫人 南陽洪氏 節婦傳)   

 ◇부인은 평안도 관찰사 이윤인(李尹仁) 공의 배위(配位)이다.

 

진산군 강희맹 찬(晋山君 姜希孟 撰) 

 

부인(夫人)은 남양홍씨(南陽洪氏)로, 명망(名望) 있는 집안이다.

만호(萬戶) 중량(仲良)의 따님으로 나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아버지를 모시는 모든 일을 맡아 시중 하였는데 법도(法度)가 있었으므로 아버지가 사랑하고 아끼었다.

 

경주 이공(慶州李公) 윤인(尹仁)한테 출가(出家)하게 되었다.

부군(夫君)이 일찍 아버지를 여의자 아직 성취(成娶) 하지 못한 아우들이 몇 사람 있었는데 모두 부군(夫君)에게 의지(依支)하게 되었다. 부인(夫人)은 더욱 도탑게 어루만져 길러서 자기(自己)의 재물(財物)을 들여가며 때를 놓치지 않고 명문가(名門家)의 규수(閨秀)를 골라 성취(成娶)시키니, 향리(鄕里)에서 이를 칭송(稱頌) 하였다.

 

신묘(辛卯) 1471년(성종 2) 부군(夫君)이 평안도 관찰사 겸 평양 부윤(平安道 觀察使 兼 平壤府尹)이 되었고, 부인(夫人)도 같이 따라갔다. 부군(夫君)이 등에 악성(惡性) 종기가 나서 세상(世上)을 뜨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病)을 얻어 거의 죽음에 까지 이르게 되었었다.

 

아들 공린(公麟)과 더불어 관(棺)을 부축하여 마전군 모지(馬田郡 某地)에다 반장(返葬) 하였다. 스스로 묘제(墓制)를 정(定)하였으니, 비록 그 속에 양실(兩室)을 만들었으나 동혈(同穴)의 뜻을 나타냈고 그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몸소 조석(朝夕)으로, 전(奠)을 올렸다. 비록 춥고 덥고, 비 온다고 해서 명복(冥福)을 비는 일을 거르는 법(法)이 없었다.

 

공(公)은 고기가 없으면 배불리 먹지를 않았으므로, 제사(祭祀)에는 반드시 고기를 진설(陳設)하였고 곡(哭)을 거를 때가 없이 반복(反復)하여 호곡(號哭)하고 애통(哀痛)해 하니 모든 이들이 모두 비참(悲慘)해 했다.

 

삼 년간(三年間)의 집상(執喪)을 마치고서는 이어서 그 여막(廬幕)에 위폐(位牌)를 안치(安置)하고서 항상(恒常) 평시(平時)와 같이 그 아래 앉고 누었으며, 새벽과 저녁에는 몸소 상식(上食)을 올렸다. 초하루 보름과 명절(名節)에는 반드시 묘(墓)를  찾아갔다. 철 따라 새로운 것이 나오면 반드시 이를 천신(薦新)하였다.

 

갑오(甲午) 1474년(성종 5) 겨울에 집에 불이 나서 사람들은 모두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으나 부인(夫人)은 버려둔 신주(神主)를 품에 안고 나왔을 뿐. 재산(財産)이 불타버리는 것은 돌아보는 바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어찌 상(床) 위에 버려둔 신주(神主)의 타다 남은 것을 거두지 아니하느냐고 하였다.

 

부인(夫人)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거두었다. 신위(神位)를 만일(萬一) 그대로 버려둔다면 도리(道理)에 거슬림이 없을까 놀랍고 두려웠으며, 신위(神位)가 의지(依支)할 곳이 없음을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 일 년 남짓 살다가 또다시 집에 불이 났다. 처사(處事)함이 또한 먼저 번과 꼭 같았다. 향당(鄕黨)에서는 성심(誠心)을 믿게 되었다.

 

아들 공린(公麟)이 아들의 혼례(婚禮)를 서울에서 치르느라 어머니를 청(請)해서 손자(孫子)의 혼사(婚事)를 올라오셔서 살펴 달라고 하였다. 부인(夫人)은 말하기를『어찌 감(敢)히 잠시인들 분묘(墳墓)와 더불어 신주(神主)를 두고 떠날 수가 있겠느냐. 내 비록 이웃 일지라도 아직까지 감(敢) 히 왕래(往來)하지 않은 것은 신(神)이 고적(孤寂)해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서울까지 가겠느냐』며 끝내 승락(丞諾) 하지 않았다. 

 

부인의 병(病)이 위 독(危篤)해 지자 여(女) 종이 신불(神佛)에 기도(祈禱)하여 제사(祭祀) 지내고자 하니 부인은 내 살아 평생(平生)에 무당을 믿지 않았으니 빈다고 해서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죽으면 마땅히 먼저 가신 부군(夫君)과 더불어 함께 있게 될 터인데 사생(死生)을 두려워하겠는가고 말하였다. 

 

병(病)으로 운명(殞命)하려 할 때 병중(病中)에 나오는 헛소리로 부군(夫君)과 더불어 서로 친근(親近)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부인(夫人)이 하세(下世)한지 일주년(一週年)만에 마전군(麻田郡)에서는 그 절행(節行)을 적어서 조정(朝廷)에 알렸던바 조정(朝廷)에서는 이 글을 예조(禮曹)에 내려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道理)를 권장(勸奬) 하도록 의논(議論)하라 하였고, 예조(禮曹)에서 는 법(法)을 살피러 정문(旌門)을 세우고 친자(親子)를 벼슬 줌으로서 후세(後世) 사람들을 격려(激勵)하게 하라고 청(請)하니 왕(王)은 좋다고 하교(下敎)하였다.

 

아들 공린(公麟)이 묘도(墓道)에 비석(碑石)을 세우려고 그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써 달라고 청(請)하였다.

 

아!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것은 일정 불변(一定不變)한 인륜(人倫)이 있기 때문이다. 항상(恒常) 변(變)치 않는 하늘의 도(道)를 굳게 지키고 부귀(富貴) 속에 있어도 여유(餘裕)가 있게 하지 않고 외롭고 궁(窮)한 속에 있어도 부족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 하지만 능(能) 히 이행(履行)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천백(千百) 속에서 하나, 둘, 있을 뿐이다.

 

진실로 뛰어난 덕화(德化)와 고상(高尙)한 절개(節槪)가 있어 행동거지(行動擧止)가 높이 솟아난 것을 보고 듣는다면 비록 성질(性質)이 흉악(凶惡)하고 어리석으며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무리라 할지라도 갑자기 이를 만나게 하면 그 사람의 귀천(貴賤)을 묻고 빈부(貧富)를 묻는 것이 나니라. 저도 모르게 경모(敬慕)하는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속에 그런 생각을 품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마에 땀을 흘릴 것이다. 이는 물론 하늘의 이치(理致)가 아직까지 없어지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나라에서 절의(節義)를 숭상(崇尙)하고 장려(奬勵)하는 뜻과 까닭이 어찌 헛된다고 하겠는가? 홍씨 부인(洪氏夫人)의 절행(節行)은 세상(世上)에 도움을 줌이 있거니, 어찌 적다 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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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南陽洪氏節婦傳

 

강희맹 찬(晋山君 姜希孟 撰

 

夫人。南陽望族也。萬戶洪仲良季女也。年幼母歿。侍家君。措辦諸事有法度。家君愛重之。及配鷄林李公尹仁。李早孤。有弟未娶者數人皆依李。夫人敦加撫養。出己財擇娶名門。使不失時。鄕里稱之。歲辛丑。李爲平安道觀察使兼尹平壤。夫人偕往。李到任未久。遽發背卒。夫人哀毀幾滅性。與子公麟。扶喪返葬於麻田郡某地。自定墓制。離其中爲兩室。以示同穴之意。結廬其側。躬朝夕之奠。雖祈寒暑雨不廢。以公無肉不飽。祭必設肉。使不乏。時復號痛。觀者皆爲酸鼻。服闋。仍其廬安木主。常坐臥其下。如平生。晨夕。親自上食。遇朔望俗節。必上冢。得時新必薦之。甲午冬。家失火。人皆失措。夫人收主置懷中。焚蕩貲產。無所顧。或曰。盍姑置主於床上而收燼餘。夫人曰。吾尙驚懼。神其無悸。若置之。恐神之無依也。居歲餘。又失火。處之亦如初。鄕黨益信其誠也。及公麟醮子于京。請夫人往視婚事。夫人曰。安敢頃刻離墳墓與神主。吾雖比隣。未敢往來。爲神之孤寂也。况京師乎。終不肯焉。初。觀察公畜全州妓妾。夫人待之無間。及公卒。撫愛不少衰。丁酉夏。家有疫癘。公麟請避。夫人曰。脩短有數。吾何避之。及夫人病革。女奴欲禱祀。夫人曰。吾生平不信巫。禱之何益。死當與亡人俱矣。可怕死求生乎。臨絶作譫語。若與公相款云。夫人下世之幾年。麻田郡錄其節行。聞于朝。朝廷下禮曹議奬典。禮曹按法請旌門閭。敍親子以勵後人。敎曰可。公麟將立石墓道。請記其顚末。噫。人之異於禽獸者。以其有彝倫也。秉彝之天。在富貴不爲有餘。在孤窮不爲不足。然能踐履無愧者。千百中一二耳。苟有英風峻節。聳動觀聽。則雖使頑嚚無恥之徒。卒然遇之。勿問其人之貴賤也貧富也。不覺心生敬慕。內懷不若。而顙有泚焉。是固天理之未嘗泯也。國家所以崇奬節義之微意。夫豈徒也。洪氏之節。其有補於世也豈淺淺哉。

 

<출전 : 私淑齋集卷之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