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사당 묘지명(再思堂 墓誌銘)
허목(許穆) 찬(撰)
공의 휘는 원(黿), 자는 낭옹(浪翁), 성은 이씨(李氏)이며, 본관은 계림(鷄林)으로, 고려의 정승을 지낸 제현(齊賢)의 7대손이다. 대대로 높은 관직을 지낸 인물이 배출되어 대족(大族)으로 불렸다.
증조부는 참판을 지낸 계번(繼蕃)이고, 조부는 관찰사를 지낸 윤인(尹仁)이다. 부친은 현령을 지낸 공린(公麟)인데, 이분은 노릉(魯陵)의 육신(六臣) 가운데 한 분인 고(故)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 박팽년(朴彭年)의 사위로서, 육신의 사건에 연루되어 세상에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공은 명신(名臣)의 후손으로 매우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며, 고결한 태도로 처신하여 젊어서 점필재(佔畢齋)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또한 학문을 좋아하여 성인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았고 큰 절개를 지녀 추강(秋江) 처사(處士) 남효온(南孝溫)이 공을 보고는, ‘어린 임금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이른 나이에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성종 20년(1489)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거쳐 승문원 박사에 올랐고 태상시(太常寺)의 관직을 겸하였다. 견책을 받아 파직된 뒤로는 이름난 산수를 찾아다녔다.
풍악산(楓嶽山)을 유람할 때 마하연(摩阿衍)의 승려가 공에게 묻기를,
“그대의 눈이 만물을 보는 것인가. 아니면 만물이 그대의 눈으로 들어오는 것인가?”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눈으로도 만물을 보았고, 만물 또한 눈으로 들어왔습니다.”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격물물격설(格物物格說)〉을 지었다.
그 뒤 서용되어 예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자 공이 점필재의 문인이라 하여 그 당인(黨人)으로 지목되어 곽산(郭山)에 유배되었고, 3년 뒤에 나주(羅州)로 양이(量移)되었다.
갑자년(1504, 연산군에 당인들에게 죄를 가중함에 따라 공이 사죄(死罪)로 논죄되자, 아무 죄도 없이 죽는 것을 불쌍히 여긴 한 노복(奴僕)이 몰래 공에게 말하기를, “죄가 죄 같지 않고 임금이 임금답지 않아서 이리된 것인데, 어찌 살길을 도모하지 않으십니까? 하면서 이장곤(李長坤)의 일을 끌어대 말을 하니, 공이 한동안 수심에 잠겨 있다가, “임금이 명령한 것이니 도망해서는 안 된다.”하였다.
그리고 처형을 당할 때에도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였다. 폐왕(廢王)이 이 일을 보고받고 더욱 노하여, “죽으면서 까지도 복종하지 않는구나.”하고는 그의 집안을 적몰(籍沒)하니, 부자와 형제가 모두 연좌되었고 타(鼉)와 별(鼈) 두 아우는 세상에서 도망쳐 나오지 않았다.
중종 원년(1506)에 당인들을 대거 풀어 주면서 모두 옛 벼슬을 복관시켜 주었는데, 이때 공에게는 승정원 도승지의 벼슬을 추증하고 그 자손의 녹용(錄用)을 명하였다.
부인 최씨(崔氏)는 참판에 추증된 최철손(崔鐵孫)의 따님으로, 훌륭한 부녀자의 행실을 지녔다고 칭송을 받았다. 공이 화를 입은 것은 갑자년(1504, 연산군 10) 10월 24일이고, 부인은 그해 8월 17일에 별세하였다.
양주(楊州)의 치소(治所) 동쪽에 있는 천계(泉溪)의 최씨 선영에 합장하였다. 공이 화를 당하자 부인의 아우인 승문원 정자 최명창(崔命昌)이 즉시 관직을 버리고 나주(羅州)로 가서 이곳으로 운구해 장사를 치른 것이다.
공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수(洙), 강(江), 하(河), 발(渤)이며, 그 가운데 수는 군수를 지냈고, 발은 우통례(右通禮)에 추증되었다. 수의 손자 홍업(弘業)은 과거로 진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려다 불행히도 궁액(窮厄)을 당해 별세하였고, 발의 손자 시발(時發)은 형조판서를 지냈다.
시발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경휘(慶徽)는 이조 판서이고, 경억(慶億)은 좌의정이다. 홍업의 손자 언무(彦茂)는 선행으로 소문이 나 효종(孝宗) 때에 정려(旌閭)를 받은 인물로서, 송라 찰방(松羅察訪)을 지냈으며 지금 현재 80여 세이다.
공의 별호는 재사당(再思堂)이며, 문장이 또한 당대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나 지금 그 문장이 그다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동문선(東文選)》과 《대동시림(大東詩林)》에 시부(詩賦) 수십 편이 전해지며, 《유금강록(遊金剛錄)》 한 권이 자손에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군자의 도가 막혀 / 君子道窮。
나쁜 때를 만났으니 / 逢時不祥。
재앙에 걸려들었고 / 身罹禍殃。
간사한 자 무고하여 / 憸人媒孽。
이런 화란 얽어내니 / 搆此卼臲。
선량한 이 죽었다네 / 良善斬伐。
정도를 지키고 운명을 받아들여 / 守正安命。
생사를 초월하여 지조를 지켰으니 / 死生一節。
충신의 매서운 기상은 / 忠臣之烈。
백대에 이름을 남길 것이요 / 百代之名。
지사의 한숨 소리는 / 志士之欸。
무덤 속의 슬픔으로 남으리 / 墟墓之哀。
-------------------------------------------------------------------------------------------------------------------------------------
[註解]
[주-01] 계림(鷄林) : 경상도 경주(慶州)의 옛 이름이다.
[주-02] 노릉(魯陵) : 노산군(魯山君), 즉 단종(端宗)을 가리킨다.
[주-03] 육신의 사건 : 1456년(세조2)에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愷), 유응부(兪
應孚), 유성원(柳誠源) 등 여섯 신하가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질(金礩)의 밀고로 발각되어 처형된
사건을 말한다.
[주-04] 점필재(佔畢齋) : 김종직(金宗直)의 호이다.
[주-05] 태상시(太常寺) : 봉상시(奉常寺)의 별칭이다.
[주-06] 풍악산(楓嶽山) : 금강산(金剛山)의 별칭이다.
[주-07] 마하연(摩阿衍) : 금강산에 있는 유점사(楡岾寺)의 말사로서,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지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摩訶衍’으로 표기한다.
[주-08] 무오사화(戊午史禍) : 1498년(연산군4)에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유자광(柳子光)
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이 사화는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면서 자신이 기초한 사초(史草)속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삽입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士禍)이므로 다른 사화와는 달리 이처럼 ‘사화(史禍)’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 일로 김종직은 죽은 사람의 관을 파헤쳐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벌을 당했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허반(許磐)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하였다는 죄를 쓰고 죽었으며, 강겸(姜謙), 표연말(表沿沫), 홍한(洪瀚), 정여창(鄭汝昌), 강경서(姜景敍), 이수공(李守恭), 정희량(鄭希良), 정승조(鄭承祖) 등은 난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유배 보내졌고, 이종준(李宗準), 최부(崔溥), 이원(李黿), 이주(李胄), 김굉필(金宏弼), 박한주(朴漢柱), 임희재(任煕載), 강백진(康伯珍),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유배 보냈으며, 어세겸(魚世謙), 이극돈(李克墩), 유순(柳洵), 윤효손(尹孝孫), 김전(金銓)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면되었다.
[주-09] 갑자년 : 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를 가리킨다. 이 사화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廢妃尹
氏)의 폐출과 사사(賜死)의 사연이 임사홍(任士洪)에 의해 보고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일어났다.
이 사화에서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한명회(韓明澮), 정창손(鄭昌孫), 어세겸(魚世謙), 심회(沈澮), 이파(李坡), 김승경(金升卿), 이세좌(李世佐), 권주(權柱), 이극균(李克均), 성준(成俊) 등은 윤씨를 폐한 일에 연좌되어 모두 극형에 처해졌고, 홍귀달(洪貴達), 권달수(權達手), 이유령(李幼寧), 변형량(卞亨良), 이수공(李守恭), 곽종번(郭宗藩), 이심원(李深源), 박한주(朴漢柱), 강백진(康伯珍), 최부(崔溥), 성중엄(成仲淹), 박은(朴誾), 이원(李黿), 김굉필(金宏弼), 신증(申澄), 심순문(沈順門), 강형(姜詗), 김천령(金千齡), 정인인(鄭麟仁), 이주(李胄), 조지서(趙之瑞), 정성근(鄭誠謹), 정여창(鄭汝昌) 등은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나 바른말로 간언했다는 이유로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이미 죽은 자는 모두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주-10] 이장곤(李長坤)의 일 : 이장곤은 1474년(성종5)에 태어나 1495년(연산군 1)에 생원시에 장원하였고
1502년에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의하면, 이장곤은 1505년 5월 22일에 자신을 천거한 이극균(李克均, 1435~1504)이 갑자사화에 화를 당함에 따라 그에 연좌되어 1505년 5월 22일에 섬으로 유배를 보내라는 처분을 받았으며, 1506년 8월에 유배지인 거제도(巨濟島)에서 도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건은 후대에 왕명을 피해 도망가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많이 거론되었다. 그런데 이원은 본 묘갈에서 보듯이 갑자사화로 인해 1504년 10월 24일에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가 죽은 때는 이장곤이 아직 유배도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이야기는 이원을 부각시키기 위해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덧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주-11] 폐왕(廢王) : 연산군(燕山君)을 가리킨다.
[주-12] 궁액(窮厄=재앙과 액운으로 고생함)을 당해 별세하였고 : 이홍업은 1579년(선조 12)에 식년 문과(式年文
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 병조 좌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으로 있다가 함경도의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전주(全州)에서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유배된 국경인(鞠景仁)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켜 이곳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러 온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그리고 그들을 수행한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황혁(黃赫) 등을 결박하여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 진영에 넘겨주어 조정에 대한 한풀이를 하였다.
이에 가등청정은 강화 문서를 작성하여 포로가 된 두 왕자와 신하들에게 강제로 서명하게 한 뒤 그 문서를 조선에 전달하기 위해 같은 시기에 잡혀온 이홍업을 지목하여 그로 하여금 문서를 가지고 행재소(行在所)가 있는 의주(義州)로 가게 하였다.
의주에 도착한 이홍업은 적의 문서를 가지고 온 것은 나라를 욕되게 한 행위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탄핵을 받아 투옥되었고, 이 일로 4년 동안 길주(吉州)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그 이듬해에 사망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국역 기언》 별집 제19권 〈감찰(監察) 이군(李君) 묘갈음기(墓碣陰記)〉에 나온다.
[주-13] 손자 : 실제로는 증손이다. 세계(世系)에 의하면 발(渤)의 아들은 경윤(憬胤), 손자는 대건(大建), 증손은
시발이다.
[주-14] 동문선(東文選) : 1518년(중종13)에 신용개(申用漑), 김전(金銓), 남곤(南崑) 등에 의해 편찬된 《속동문
선(續東文選)》을 가리킨다.
-------------------------------------------------------------------------------------------------------------------------------------
[原文]
公諱黿。字浪翁。姓李氏。本鷄林人。高麗相齊賢七世孫也。世有達官貴人。號爲大族。大王父參判繼蕃。王父觀察使尹仁。父縣令公麟。魯陵六臣故集賢學士朴彭年之壻也。連六臣事。不顯用於世也。公以名臣之世。好卓犖。潔身高行。少遊佔畢齋之門。亦嗜學。非聖人之書不讀。偉然有大節。秋江處士南孝溫稱之曰。可以託六尺之孤者也。早年陞上庠。成宗二十年。及第。由承文正字。至博士兼太常。以譴罷。放迹名山水。遊楓嶽。有摩阿僧見公。問之曰。目覩萬物乎。萬物入目乎。公曰。目覩萬物。萬物亦入目。作格物物格說。後敍爲禮曹佐郞。及戊午史禍起。公佔畢門人目爲黨人。流郭山。三年。量移羅州。甲子。加罪諸黨人。公當論死。有僕隷悶其無罪死。私謂公曰。罪非罪。君不君。盍亦善爲之。亦引李長坤事言之。公愀然久之曰。君命。不可亡也。臨刑。亦自若。廢王聞之愈怒。以爲死且不服。命沒其家。父子兄弟皆連坐。二弟鼉鼈。因逃世不出也。中宗元年。大釋黨人。皆復其官。追爵承政院都承旨。命錄用其子孫。夫人崔氏。贈參判鐵孫之女。稱賢婦人之行。公被禍。當甲子十月二十四日。夫人其八月十七日歿。合葬楊州治東泉溪崔氏族葬。當禍。夫人弟承文院正字命昌。卽去官至羅州。以喪返而葬。公有男四人。曰洙。曰江。曰河。曰渤。洙爲郡守。渤贈右通禮。洙孫弘業以科目進。將顯矣。不幸窮抑而歿。渤孫時發刑曹判書。時發二子。慶徽吏曹判書。慶億爲左議政。弘業孫彥茂。以善行聞。孝宗時。表善行閭者也。仕爲松羅察訪。方八十餘。公別號曰再思堂。爲文章。亦一時所推許。今其文不大傳。東文選,大東詩林。有詩賦累十篇。遊金剛錄一卷。傳於子孫。其銘曰。
君子道窮。逢時不祥。身罹禍殃。憸人媒孼。搆此▨臲。良善斬伐。守正安命。死生一節。忠臣之烈。百代之名。志士之欸。墟墓之哀。
기언 별집 제21권 / 구묘문(丘墓文)
'■ 경주이씨 > 묘지명(墓誌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취운 이원우 선생 자찬 묘지문. (0) | 2009.09.11 |
---|---|
通德郞 李寅烒 墓誌銘. 墓表陰記 (0) | 2009.08.31 |
정경부인경주이씨묘지명 / 명곡 최석정 배위. (0) | 2009.03.17 |
백사 문충 이공 묘지명(이항복)/ 李廷龜 撰 (0) | 2009.02.05 |
정부인 남양홍씨 절부전(貞夫人南陽洪氏節婦傳) (0) | 2009.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