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85

부총관 증 병조참판 이순곤 묘지명/풍천공 이시득 증손자

■ 副捴管贈兵曹參判李公墓誌銘 (부총관증병조참판이공묘지명) [생졸년] 1652년 09월 20일생(효종 3) ~ 1729년 05월 17일졸(영조 5) 月城 李裕元 景春 撰 公諱順坤。字仲厚。姓李。系出慶州。始祖謁平。新羅佐命功臣。遠祖文忠益齋先生諱齊賢。麗季名臣。本朝有諱尹仁觀察使。生諱公麟縣令。生諱黿禮曹佐郞。號再思堂。卽朴醉琴彭年外孫。罹戊午史禍。死於甲子獄。中廟追雪。贈都承旨。寔公七代祖也。高祖諱大建進士。贈左贊成。號梧村。曾祖諱時得府使。判書諱時發之弟。祖諱慶會贈左承旨。考諱寅馨贈參判。文章孝友著。號醉隱堂。詩酒自娛。脫畧世事。敎子孫有法。妣順興安氏。進士汝止女。文成公裕後。公以壬辰生。戊申始仕。乙丑。丁內憂制闋。拜康津縣監未赴任。丁外憂。癸酉。歷訓鍊院僉正。除順川郡守。時値歉荒。捐廩俸營賑資。民賴而免餓殍。方伯,繡衣。一辭褒聞。進通政階。拜朔州府使。壬午。除釜..

천휴당 이몽규선생 묘지명 / 상서공파

천휴당 이몽규선생 묘지명(天休堂 李夢奎先生 墓誌銘) / 상서공파 ■지중추부사 이공묘지명(24世) (知中樞府事 李公墓誌銘) 月城 李裕元 景春 著 天休堂先生。爲東國高士。聞仁宗昇遐。與金河西同入山不出。使其弟仕之曰。夢麟多將略善騎射。幼時嬉戱。有兼人勇。諸少年莫敢抗。及登科。屢立功。官至節度使知中樞。與夫人慶州金氏。葬坡州月隴塋左岡子坐。雲谷公撰判官公墓記曰。公之孫夢麟名將。此可驗也。公慶州人。始祖謁平。我朝參判延孫之後。祖曰成茂安東判官。禰曰仁臣主簿。妣曰光州潘氏煕女。噫。爲將者身未嘗經鋒鏑之交。足未嘗履沙場之地。若一朝授以營閫重任。只儼然建大將旗而已。公受業於天休先生。所學者甲冑干櫓。忠信禮義。故屢仗斧鉞。不愧名將之稱也。子孫零替。後三百載。始謀幽堂之誌。人無有識公者。悲夫。銘曰。 公白沙先生之從叔也。其氣豪而其才蓄也。當時之笠轂也。識之者孰也。 [자료문헌] ◇가오..

모정 삼세 선영지(茅亭三世先塋誌)

■ 모정삼세선영지(茅亭三世先塋誌) 이경양『李敬養, 1734년(영조 10) ~ 1790년(정조 14)』 月城 李裕元 景春 著 李氏籍慶州。始祖曰謁平。爲赫居元臣。入我朝。有諱恒福。領議政文忠公白沙先生。三傳有諱世弼。以遺逸官參判。贈領議政文敬公龜川先生。龜川先生有四子。第二曰鼎。佐副正。贈吏曹參判。副正公第二子曰宗喆。字子明號混軒。肅廟己丑七月二十八日生。英廟壬申十月十七日卒。葬振威縣二西面茅亭里負庚原。從先兆也。公天姿英發。符采秀朗。接人坦率。不設畛域。樂易之容。著於言笑。讀經史。硏賾精微。伯父忠定公每稱吾弟有子。癸丑。與大成公聯登司馬。除貞寢郞。轉諸署。長官每詡以廊廟材。後出守郡縣。以廉潔著。至於汗漫筆札。爲儕友所推重。從兄梧川公期待甚厚曰。不墜遺緖。屢赴擧不中。竟以淳昌郡守終。後贈吏曹參判。娶貞夫人江陵金氏。判敦寧始㷜女。某年生。某年卒。與公同封。第二子曰敬養。字聖浩..

이경국(李敬國) 추모비/펑리성암공파

■ 이병장 훈련원판관 증 병조판서 경주이공 격암공 경국추모비명 (義兵將訓鍊院判官 贈 兵曹判書 慶州李公 格菴公 敬國追慕碑銘) 한밝學術院長 哲學博士 李相斐 撰 하늘이 대환난(大患亂)을 내리심은 백성(百姓)을 일깨울 충신(忠臣)을 내고자함이라. 임진(壬辰)에 왜적(倭賊)이 二十一萬軍으로 반도(半島)를 석권(席卷)할 때, 팔도(八道)에서 일어난 의병장(義兵將)으로 호남(湖南)의 란입(亂入)을 막았으나 정유(丁酉 : 1597년 선조 30)에 다시 十五萬兵을 투입(投入)하여 덮치니 남원(南原)이 떨어지고 전주(全州)에 왜적(倭賊)이 집결(集結)하여 국력(國力)의 원천(原泉)인 노령이서(蘆嶺以西)를 노략하려하니 이곳의 보루(堡壘)인 입암산성(笠巖山城)에 전운(戰雲)이 짙어 감으로 관민(官民)이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

성균진사 이병 묘지명(成均進士李炳墓誌銘)

■ 成均進士李公墓誌銘 ◇국당공후 정순공파 서암 신정하 찬(恕菴 申靖夏 撰) (1680~1715) 지난 광해조(光海朝) 때에 간옹(艮翁) 이공(李公)이 직언(直言)을 했다가 해도(海島)로 쫓겨났는데, 그의 맑은 명성과 곧은 절조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빛나고 있다. 그런데 간옹의 손자인 진사 병(炳)이 기사년의 화(禍)를 당하여 화색(火色)이 매우 치성한 가운데 서울 지역의 선비 수백 인을 거느리고 대궐에 엎드려 상소하여 율곡(栗谷)ㆍ우계(牛溪) 두 선생이 무함받은 것을 극력 변호했다가 죄에 걸려 단천(端川)으로 유배되었으니, 사문(斯文)을 보위하고 세도(世道)를 다행스럽게 한 것이 대단하였다. 그래서 사대부(士大夫)들이 공을 아는 이건, 모르는 이건 간에 모두 훌륭하게 여겨 감탄하면서「명망 ..

경주이씨효열비(고흥 금산면 어전리)

경주이씨효열비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효열(孝烈)을 기리는 비문 금산면 어전리 평지마을 경주이씨 부인은 성이 이씨(李氏)이고 경주(慶州)가 그 본관이니, 보한당(保閒堂) 휘 욱(郁)의 11세손 원춘(元春)의 따님이시다. 집안에 있을 때에 가정의 가르침에 훈도(薰陶)되었고, 《예기(禮記)》의 편(篇)을 즐겨 읽었으며, 뜻과 행실이 단정하고 의젓하였다. 자라서는 학성군(鶴城君) 김완(金完)의 11세손 김차태(金次泰)에게 시집갔는데, 시부모를 섬김에 있어 한결같이 옛날의 법도를 따랐다. 시아버지가 일찍이 병이 들어 오래도록 낫지 않아, 백방으로 치료하고 봉양하였으나 그 효력을 보지 못한 채 점점 위독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부인은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변을 맛보아 혀에 느껴지는 달고 쓴맛으..

공인 이씨 묘지명 / 다산 정약용의 맏형수.

공인 이씨 묘지명(恭人李氏墓誌銘) 丁若鉉 配位/다산 정약용의 맏형수. ■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의 묘지명 정약용 찬(丁若鏞 撰) 용(鏞 : 丁若鏞)이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연천현(漣川縣)으로 갔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 선비(先妣) 숙인(淑人)이 술 담그고 장 달이는 여가에 형수와 저포(樗蒲)놀이를 하여 3이야 6이야 하며 그 즐거움이 융융하였다. 수년 뒤에 어머니가 세상을 버리니, 용이 그때 겨우 9세였다. 머리에 이와 서캐가 득실거리고 때가 얼굴에 더덕 더덕 하였는데 형수가 날마다 힘들여 씻기고 빗질하였다. 그러나 용(鏞)은 또한 흔들며 벗어나고 형수에게로 가려 하지 않았다. 형수(兄嫂)는 빗는 빗과 세수대야를 들고 따라와서 어루만지며 씻으라고 사정하였다. 달아나면 잡기도 하고 울..

숙부인 이씨 묘지명 / 우참찬 이몽량의 세째딸

■ 숙부인 이씨 묘지명(淑夫人李氏墓誌銘) ※우참찬 몽량의 3녀임/백사 이항복의 누님 이항복 찬(李恒福 撰) 숙부인 이씨는 경주인(慶州人)인데, 신라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인 알평(謁平)의 후예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휘 몽량(夢亮)의 딸이며, 자헌대부 이조판서 눌헌(訥軒) 이 선생(李先生) 문강공(文剛公) 사균(思鈞)의 외증손(外曾孫)이다.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 시집가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세량(世良)의 며느리가 되고 승정원 좌승지 선(善)의 아내가 되어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 딸은 숭록대부(崇祿大夫)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아내가 되어 아들 미(瀰)를 낳았는바, 미는 옹주(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양위(錦陽尉)가 되었고, 딸..

충정공 이태좌 묘지명(忠定公 李台佐 墓誌銘)

先考 忠定公 墓誌銘 아들 이종성 찬(梧川 李宗城 撰) 先考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舘事,致仕奉朝賀府君姓李氏。諱台佐。字國彦。號鵝谷。慶州人。新羅佐命元臣諱謁平後也。領議政文忠公白沙先生諱恒福。觀察使南郭朴公諱東說。大司憲慕堂洪公諱履祥。左議政月沙李文忠公諱廷龜。領議政象村申文貞公諱欽。宲爲府君內外高祖。白沙之孫吏曹參判諱時術爲大父。文敬公龜川先生諱世弼爲考。南郭之孫禮曹參判世模爲外祖。貞敬夫人潘南朴氏其妣也。府君以顯宗庚子十一月三日午時生。甲子中進士。己卯闡文科。戊子陞通政。甲午嘉善。壬寅資憲。癸卯崇政。戊申拜相。丙辰致仕奉朝賀。歷官藝文舘檢閱,待敎,侍講院司書,文學,弘文舘修撰,校理,應敎,司諫院正言,大司諫,司憲府持平,執義,大司憲,承政院承旨,掌隷院判决事,漢城府右尹,兵曹佐郞,正郞,參知,判書,吏曹正郞,參議,判書,刑曹參判,判書,工曹參議,判..

숙인 해평윤씨 묘지명-인천부사 이성곤 배위

白下集卷之七[墓誌銘]/ 윤순(尹淳) 著 淑人尹氏墓誌銘[仁川府使李成坤配位] 尹淳 撰 吾先子無他兄弟。獨與從父弟處士公。同宮而居。實有骨肉同氣之愛。其有子女。互視以己出。子女亦皆父母之。不知其異出也。內而諸姊妹。外而諸昆季。齒隊相逐。歡笑盈屋。然退而聽於閨梱之評。未甞不以處士公長女。李淑人爲之眉目焉。雖余晩出穉迷。亦敬愛淑人。以事吾姊者事之。中經憂戚分離。不復見兒時事。而淑人遽又不幸。兩家昆弟姊妹若干人。死喪自淑人始。則余之爲痛。又無間於喪吾姊矣。今淑人季子上舍君。袖所自爲狀。徵余以隧誌。嗚呼。文非吾有。若求其詳於淑人者。余又何辭焉。然淑人懿德喆行。旣咸且備。彰灼於內外。尊章諸親之頌久矣。顧何待於余言。盖淑人端溫柔婉。動止有則。生八九歲。已通內範諸書。粹然有女士風。大父庶尹公甞曰。此女恨不爲丈夫。以振吾門也。性至孝。早喪母夫人。毁甚成疾。後母朴夫人。齒比而事之若所生。又能隨事左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