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85

贈兵曹參議 李良弼 淑夫人墓誌銘

副司果贈兵曹參議李公淑夫人李氏墓誌銘 公諱良弼。字。姓李氏。其先慶州人。新羅始祖有佐命大臣曰謁平。其鼻祖也。高麗時有諱蒨。以儒術歷仕六朝。謇直守義。爲世名臣。致位三重大匡月城君, 知藝文館事諡文孝。公於公間四葉矣。高祖諱誠中。當國初。以檢校左政丞, 寶文閣大提學致仕。退居開城卒。諡靖順。曾祖諱援。通政延安府使。爲治有惠政。祖諱赫孫。中生員。仕厚陵直。考諱增。修義副尉。妣辛氏。寧越著姓。左領護軍諱黍之女。前朝贊成事裾之後。以天順戊寅十月二十八日壬午生公。少力學通經史。至於陰陽地理。靡所不究。累試不第。用先蔭積資三品。以婚姻故。寓居仁川府東龜有尾村。治圃搆堂。日與諸子講論。雖屢空泊如也。正德庚辰四月二十九日丙戌。卒于正寢。享年六十三。是年十月丁酉。葬于府東多完山乾坐巽向之原。後以季胤太常公故。有贈典。配淑夫人李氏。全義之望。通訓, 茂長縣監, 贈嘉善, 兵曹參判守柔之女。贈領議政士寬之曾孫..

시조 유허비. 중수기(始祖遺墟碑/重修記)

■ 신라 좌명공신 급량부대인 이알평 유허비 (新羅 佐命功臣 及梁部大人 李謁平 遺墟碑) 삼가 살펴 보건데 경주이씨 옛 족보에「시조의 이름은 알평(謁平)인데 진한(辰韓)의 표암봉(瓢巖峰), 아래에서 처음 내려왔다」하였으니, 처음 내려 왔다함은 탄생(誕生)을 말한 것이다. 시전(詩傳)에 유악강신(維嶽降神)하야, 생보급신(生甫及申), 이로다. 생각 컨데 묏부리가 신을 내려서 보아 신을 낳았도다. 묏부리의 제사를 잘 지내면 감동하여 좋은 아들을 낳는다고 생각 하였다. 「보는 보(甫)의 제후인 후작 보후(甫侯)이고 신은 신(申)의 제후인 백작 신백(申伯)을 의미한다.」라고 하였으니 소자첨(蘇子瞻 :소동파의 자)이 신(申)과 여(呂 : 甫를 말함, 甫라고 부르기 전에는 呂라고 불렀음)가, 다 묏부리에서 내려 주엇다고..

21世 之帶 漢城 判尹公 遺墟碑銘.

■ 한성 판윤공 유허비 명(漢城 判尹公 遺墟碑 銘) / 二十一世 본종 종형 지음(本宗 鍾瀅 撰) /벽오공(碧梧公 九代 嗣孫) 경주읍(慶州邑)에서 남쪽으로 약 육십리(六十里)에 아늑한 마을이 있으니 중리(中里)라고 한다. 옛날 죽은 이공(竹隱 李公)이 살았는데, 그 터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위, 아래 오백년(五百年) 사이에 풍우(風雨)와 성상(星霜)이 여러번 변천되고 산천(山川)과 능곡(陵谷) 옮기었으니 지난일이 아득하여 찾아볼 흔적이 없었다. 어느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모공(某公)이 일찍이 이 마을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부노(父老)들이 모두 공경 할줄을 알고, 지나는 자 까지도 돌아보고 바라보며 발걸음을 멈추었으니, 대개 공을 사모하여 잊지 않았고 땅도 공을 얻어 소중하게 된것이다. 공(公)..

성암공전

■ 성암공전(誠菴公傳) [지은이] 외사씨『外史氏, 1780년(정조 4)~1832년(순조 32))』 고려 때 이인정은 경주인이다. 자태가 간중 방정하여 뜻을 삼대의 정치와 같이 하는데 두었고 경륜과 지조는 부귀영화와 길흉화복으로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젊어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언론이 심히 높아서 군자들은 믿고 소인들은 꺼려하였다. 그 시조는 급양부 대인 알평인데 신라 창업하는데 으뜸가는 공신이시다. 그 후손 휘 핵의 호는 열헌이고 벼슬은 증직이 상서좌복야이다. 배위는 군부인 김해김씨이니 늘리 서사를 통달하여 친히 세 아들을 가르쳐 큰 선비로 만들었으니 장자 인정의 호는 성암인데 고종조에 출생하여 진사와 광주 판관을 거쳐 충렬왕 경진(1280) 삼월 을묘에 민 묵헌 지와 같이 전 중시를 지어 올렸다..

벽오 부인 여흥민씨 묘지명 병서

■ 벽오부인 여흥민씨 묘지명 병서 - 간이 최립 (碧梧夫人驪興閔氏墓誌銘 竝書) [생졸년] 1569년(선조 2)~1609년(광해군 1) /향년 41歲 ----------------------------------------------------------------------------------------------------------------------------------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이공(李公)의 처 정부인(貞夫人) 민씨(閔氏)의 묘지명(墓誌銘) 병서(幷序) 내가 서경(西京)에서 우거(寓居)하고 있을 적에, 지금 평안도관찰사로 재직 중인 이공(李公)이 부인상을 당하였다. 그런데 장차 영구(靈柩)가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즈음에, 방백이 부인의 묘지명을 써 달라고 나에게 신신당부하였다..